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15화 (15/70)
  • 제15화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임석영의 머리칼이 젖어 있고 물기를 덜 닦았는지 얼굴과 목, 팔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 있다.

    붕대는 온데간데없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붕대와 함께 상의도 없었다. 상의는 없는데 복근은 있다. 아니, 이게 아니지.

    뜬금없는 상의 탈의에 눈이 동그래졌다. 화들짝, 놀랄 틈 없이 얼었다. 눈도 못 깜박이고 ‘냐’를 삭제한 ‘오’를 소리를 줄이며 계속 발음했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임석영이 들였던 발을 거두며 나가버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니, 방금, 뭐냐.”

    표정을 정리했다.

    여기서 얼굴이 붉어지면 진짜 이상한 거야. 같은 반 친구가 벗은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건 진짜 이상한 거라고.

    마음을 다스렸다. 진정하자. 착한 생각. 그러고 있을 때 벌컥, 다시 문이 열렸다. 임석영이 붉어진 얼굴로, 수건으로 상체를 가린 채,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아니, 왜 네 얼굴이 붉어?

    “어, 씨, 씻고 나왔구나! 하하하! 자식! 몸 좋네!”

    괜히 호탕하게 웃으며 매트리스를 팡팡 쳤다. 그게 꼭 옆에 앉으라는 신호처럼 느껴져 뒤늦게 슥슥, 이불을 쓸었다.

    그러다 급하게 바닥에 있는 아령을 집어 들었다. 나도 내가 왜 아령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열심히 들어봤다. 더럽게 무겁네.

    “12시에 온다며.”

    “아, 그러게. 생각보다 빨리 왔네.”

    같은 아파트라는 걸 잊고 집에서 빨리 나선 탓이었다.

    임석영이 등을 보이지 않은 채, 게처럼 걸어서 옷장으로 향했다. 쑥스러운 건 난데, 왜 얼굴은 네가 붉히고 난리지.

    “안 나가?”

    “어?”

    아령을 힘들게 들어 올리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임석영을 보았다.

    남자애들은 원래 이런 거에 좀 무감하지 않나. 방에서 나가면 괜히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싶어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중이었는데.

    “가, 같은 남자끼리, 뭐가 어떠냐. 부끄러워하기는. 하하!”

    임석영이 허, 하고 웃으며 옷장 문을 열었다.

    상체를 가리고 있던 수건을 어깨에 걸치는 모습에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렸다.

    미친. 하하는 얼어 죽을 하하. 임석영이 바지라도 입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것마저 벗고 들어왔어 봐. 죄라고, 이건. 남자라고 속이고 있는 주제에.

    방금 뱉은 말을 후회하면서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내 모습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탁, 하고 옷장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티셔츠를 꿰어 입은 임석영이 머리칼 사이에 손을 넣고 물기를 털어내며 나를 보았다.

    “너 이런 거 아무렇지 않구나? 같은 남자끼리라 그런가.”

    허허허,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웃음이 너무 어색했나. 호탕하게 웃을 걸 그랬나. 고민하고 있는데 임석영이 느리게 걸음을 옮겨 앞에 멈춰 섰다. 괜한 긴장감에 마른침이 넘어간다.

    “설마 바지 벗고 들어왔어도 그렇게 말했을까.”

    “음, 음?”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올렸다. 임석영의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지를 물들인다.

    “자고 가라.”

    “…어?”

    “오늘 부모님 나가서 안 들어오시는데, 자고 가라고.”

    “나, 나는 집에 가야지.”

    “그럼 너희 집 가서 잘까?”

    이 미친놈이, 왜 이래.

    임석영의 큼지막한 손이 머리칼을 헤집고 들어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손에 쓸려 간 머리카락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갑자기 남윤수가 임석영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남자 좋아하냐?

    “이마가 예쁘게 생겼네.”

    뭔, 갑자기 이마 타령이야. 이맛살을 구겼다. 아무리 봐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뜬금없이 이마가 예쁘다니. 친구한테 자고 가라고 할 수는 있는데, 앞뒤 맥락이 이상했다. 설마, 나를? 아니, 그러니까. 홍차연을?

    “숙제 범위가 많아서 하루로는 모자랄 거 같아.”

    “내, 내일도 하면 되지.”

    알바, 까짓것, 내일도 빼면 된다.

    “내가 내일 안 돼.”

    얼굴은 단호한데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 새끼, 눈빛이 왜 이러지.

    “새벽에 끝날 거 같은데? 부모님께 미리 말해둬.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왜, 왜? 안 돼. 나 집에서 자야 돼.”

    점점 가까이 상체를 숙여 오는 탓에 몸을 뒤로 뺐다. 임석영과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뒤로 물러나던 몸이 조금의 간격을 두고 거의 침대에 붙다시피 했다. 이거 자세가 이상한데.

    “야, 좀 가.”

    바짝 거리를 좁히며 내려온 임석영의 어깨를 툭 밀었다.

    한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은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맞췄다.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눈 맞춤에 입술만 바짝 마른다.

    뚝, 임석영의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에 닿았다. 그 차가운 감촉이 점점 열이 오르는 체온과 상반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홀라당 웃통을 벗고 들어왔는데 같은 남자끼리 뭐가 어떠냐고 한 게 황당하네.”

    “아, 그, 그치? 기분 나쁠 수 있지? 나, 나가 있을게. 비, 비켜줄래.”

    상체를 일으키고 싶은데 위로 몸을 드리운 임석영이 좀처럼 물러날 기미가 안 보인다. 손을 올려 옆에 우뚝 박힌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야, 팔 좀.”

    제발 치워주기를 바라며 눈을 올렸다. 위에서 임석영이 빤히 나를 내려다본다.

    “같은 남자끼리 그럴 수 있지. 있는데, 너 내 앞에서 깔 수 있어?”

    “어?”

    “웃통 깔 수 있냐고.”

    “…….”

    닥치고 나가 있을걸. 뭐 한다고 아령 들고 설치면서 엉덩이는 붙이고 있어가지고. 어색하게 눈을 깜박였다. 웃음도 안 나왔다.

    잔뜩 얼어서 내게 고정된 임석영의 눈만 쳐다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미안. 그러니까, 이 팔 좀….”

    치워주겠니, 그런 말을 하려는데 임석영의 손이 내 뺨에 닿는다. 제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를 문질러 닦아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장할 노릇이다.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 나 좋아하면 안 돼! 안 된다고!

    임석영이 부드럽게 내 뺨을 문질렀다.

    “그… 석영아, 네 마음이 혹시 그런 거라면…. 미안하다. 나는 여자 좋아해….”

    “뭐?”

    “나 여자 좋아한다고.”

    “…….”

    이렇게 된 거 임석영을 잘 달래서 상황을 무마하자, 그런 생각으로 넌지시 던져본 말에 임석영이 픽 웃음을 터트린다.

    “나도 여자 좋아해.”

    “아, 그… 그래?”

    그런데 나한테 왜 이래. 이 분위기 뭔데. 이렇게 나를 침대에 눕히고 옆에 팔뚝 박고 뺨을 쓸고, 이거 뭔데!

    “그런데 너 여자 좋아해? 그건 좀 아쉬운데.”

    뺨을 쓸어내린 손이 가볍게 턱을 쓸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벅였다.

    “수염도 안 났고.”

    턱을 쓸어내린 손이 목에 닿는다.

    “울대뼈도 안 튀어나왔고.”

    “…….”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가만 내려다본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숨이 턱 막혔다. 임석영의 입술이 느긋하게 열린다.

    “너 홍차연 아니지?”

    “뭐, 미, 미쳤냐? 나와! 나갈래!”

    몸을 옆으로 돌리며 임석영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임석영이 어깨를 내려 누르며 못 일어나게 막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매섭다.

    “너 여자잖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식은땀이 나는 게 등골이 서늘하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안 떠올랐다.

    “아, 아닌데!”

    “비닐봉투 뒤집어쓰고 아이스크림 떨어트린 거, 너잖아.”

    “…….”

    아닌데, 라는 말이 안 튀어나왔다. 왜냐면, 그거 나 맞거든.

    “모른 척해주려고 했더니, 같은 남자라면서 바지 까는 것도 볼까 봐 안 되겠어.”

    아령 들고 설친 김누리, 나가. 당장 나가. 퇴장해. 지구에서 로그아웃.

    *

    나는 침대에, 임석영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꾸중이라도 듣는 사람처럼 절로 주먹 쥔 두 손이 무릎 위로 올라갔다.

    결국 임석영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그 사실을 털어놓는 과정에서 내 가정사도 까발려졌다. 이야기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내가 돌이 지나기도 전에 아빠가 집 나간 것까지 튀어나왔다.

    임석영의 입을 막아야 했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최대한 사연이 있어야 했다.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는 임석영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학교에 까발릴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담임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따질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것도 아니면 교육청 홈페이지에 고발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더 불안했다. 이야기를 듣는 임석영의 손이 까닥까닥 책상을 때렸다.

    아빠 집 나간 이야기 했고, 엄마 돌아가시고 할머니랑 둘이 살다가 독립한 것도 이야기했고, 겨울에 온수가 안 나와서 찬물 샤워 한 것까지 이야기했는데. 더 이상 할 말도 없는데.

    입술을 꾸물거리다가 임석영의 눈치를 살폈다.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여 책상을 두드리던 임석영이 의자를 쭉 밀어 내 앞에서 멈췄다.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린다.

    “신기하네. 어떻게 똑같이 생길 수가 있지?”

    “똑같은 건 아니고, 그냥 좀 닮은 거야.”

    “그래도.”

    잡고 있던 턱을 놓은 임석영이 의자에 등을 밀어 붙이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생각해보니 임석영이 나를 차연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전학생, 그다음엔 홍차라고 불렀다.

    공에 맞고 기절한 나를 업고 보건실에 간 게 임석영이었으니. 그때 눈치를 챈 건가.

    “남고 생활이 얼마나 험난한데. 애들 땀 냄새는 또 어떻고. 말도 못 해. 여름 되면 걔들 이제 옷도 막 훌러덩훌러덩 벗고 다녀. 5월만 되어도 덥다고 난리인데.”

    임석영이 혼자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뱉었다. 끼어들 틈 없이 혼자서 계속 말을 이었다. 뭔 소리인가, 하고 들어보니 내가 겪게 될 고충에 대해 미리 말해주는 것 같았다.

    걱정해주는 얼굴은 아니고, 뭐가 되게 못마땅한 표정인데. 지금 나를 걱정해주는 게 맞는 건가.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긁적였다.

    “그래서, 집은 진짜 준대?”

    “주겠지?”

    “계약서 그런 거 썼어?”

    “응.”

    “그건 잘했네.”

    불안한 얼굴로 묻던 임석영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발을 바닥에 붙인 임석영이 빙글빙글 의자를 좌우로 돌렸다. 으음, 하고 소리 내며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묻는다.

    “그럼 너 다시 전학 가는 거네?”

    “뭐, 전학은 전학이지. 홍차연이 자기 학교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건 좀 아쉽네.”

    뭐가 아쉽다는 건지 몰라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는 임석영을 보았다. 뒤로 젖힌 고개에 면도를 했는지 매끄러운 턱이 보인다.

    “너랑 학교 다니는 거 재밌는데.”

    의외의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너랑, 학교, 다닌다, 그 문장 안에 든 모든 말이 이상하리만치 나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임석영이 고개를 내렸다. 그의 턱을 보고 있는지라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앞뒤 다 자르고 뭐래.

    눈을 끔벅이며 그를 보았다. 어느새 마른 임석영의 머리칼이 차분했다.

    임석영이 바닥에 붙이고 있던 두 발을 내 발등 위에 겹쳐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넌 이름이 뭐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발등을 덮은 임석영의 발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발가락을 꿈틀거리며 뒤로 빼자 임석영이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다리를 벌렸다. 벌린 다리 사이에 내 다리를 넣고 무릎을 모았다. 꼼짝없이 임석영의 다리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미간을 찡그리고 허벅지에 힘을 주는데도 임석영의 다리에서 좀처럼 못 벗어났다. 임석영의 다리를 툭툭 때렸다.

    “뭐야. 치워.”

    “이름 알려주면.”

    “홍차연이라니까?”

    “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임석영이 볼을 꼬집어 잡는다.

    “수염도 안 나는 게 자꾸 까분다.”

    “아! 아! 야, 안 놔?”

    뺨을 꼬집은 손을 눈짓하자 임석영이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뭐, 알려주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집요하게 캐물을 줄 알았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뺨을 꼬집은 손을 놓고 포박했던 다리도 풀어주고 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났다.

    책상에 의자를 집어넣은 임석영이 방을 나서며 숙제하자, 하고 말했다.

    비밀로 해주는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순조로운 반응에 바짝 말랐던 입술에 침을 바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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