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14화 (14/70)

제14화

대망의 월요일. 안 떨어지는 발을 어떻게 움직이고 움직여서 교문은 넘었는데 계단에서 말썽이었다.

2층에 다다르니 발이 안 움직였다. 엄지손톱만 잘근잘근 물었다. 마지막 한 계단만 올라서 복도로 진입하면 바로 교실이 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긴장감은 흡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무대 끝내고 심사 평 기다리는 참가자와 같았다.

‘홍차연을 흉내 내는 김누리 씨?’

‘당신은, 우리와 함께, 중간고사 기간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교복을 벗고 학교를 나가주세요.’

취이이이익! 바람이 쏟아져 나오고, 머리가 날리고, 갑자기 불길이 솟아오르고, 나는 그 속으로 가라앉고.

벗은 교복을 책상 위에 두고 나가면서 아, 찍지 마세요, 찍지 말라니까요? 찍지 마시라고요! 하며 중지를 펴는.

중지는 왜 펴.

고개를 저었다.

“뭐야, 너 왜 오늘도 손이 그 모양이냐?”

“아프니까 그렇지.”

“웃기네. 네 성격에 하루 감고 있는 것도 용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짝 계단에 붙어 섰다. 고개를 내밀자 복도에 서 있는 임석영과 남윤수가 보인다.

“왜 안 풀어?”

“아프다고.”

“어디서 약을 팔아. 어느 안전이라고.”

임석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엉덩이를 쭉 빼고 그 둘의 모습을 훔쳐봤다. 계단을 오르는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오른손인데 안 불편하냐?”

“응. 뭐, 딱히.”

“하긴. 너 양손잡이지.”

네?

네??

네에에??

남윤수가 말했다. 귀를 의심했다. 양손 뭐라고요?

이명처럼 남윤수의 마지막 말이 귀를 울렸다. 하긴, 너 양손잡이지… 양손이지… 이지….

하마터면 복도로 튀어나갈 뻔했다. 양손잡이라니. 누가. 임석영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른손을 못 쓴다는 이유로 숟가락 위에 반찬 올려주고, 필기해주고, 심지어 가방도 들어줬는데?

“야, 석영아.”

“어?”

“나는 다 이해한다. 네 짱친이잖아.”

“갑자기 뭐래.”

남윤수가 임석영 옆에 바싹 붙어 서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너 혹시 남자 좋아하냐?”

갑자기 이건 또 뭔 소리야. 들으면 안 될 이야기를 엿들은 것만 같아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날까, 그만 엿들을까, 고민하는데 임석영이 오른손으로 남윤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프다더니. 붕대 감은 그 손으로 옆구리를 잘도 가격했다. 표정 변화 없이.

“여자 좋아해.”

“아닌데. 냄새가 나는데.”

남윤수가 옆구리를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해?”

가까운 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뭐 하긴. 쟤들 훔쳐보고 있지.

그러다가 펄쩍 뛰며 몸을 돌렸다.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바로 뒤에 김찬영이 서 있었다. 지금 막 등교했는지, 가방을 멘 채 나를 내려다본다.

그 언짢은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김찬영은 쌍꺼풀 없이 처진 눈매로 순한 인상을 주었는데, 어째 나를 볼 때면 냉기가 도는 게 표정으로 사람을 팼다. 지금도 그런다. 표정으로 지금 한 열 대는 맞았으려나.

“아…. 교실 가고 있었는데?”

엉거주춤 굽히고 있는 허리를 펴고 복도로 나갔다. 임석영과 남윤수가 교실로 들어간 뒤에 나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진입이었다.

복도로 진입하자 창가에 서 있던 임석영과 남윤수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오!”

남윤수가 한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아, 안녕.”

뭐 저렇게 반갑게 맞아주지, 생각하며 어색하게 인사를 뱉는데.

“늦게 온다, 김찬영?”

나한테 한 인사가 아니었다. 뒤에서 걸어오던 김찬영이 버스 놓쳤어, 하고 답했다.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

창문에 어깨를 기대고 선 임석영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신이시여….

수치심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꼭 얼굴도 붉어지던데. 곧바로 눈을 내리깔고 교실로 직진했다.

“홍차.”

얼굴이 울상이 됐다. 가방끈을 잡고서 돌아보았다. 임석영이 다가오더니 상체를 낮게 숙이고 속삭인다.

“잘 어울린다.”

무슨 소리지 싶어 임석영의 얼굴이 멀어졌을 때 시선을 올렸다. 임석영이 웃는 얼굴로 가방을 툭툭 건드렸다.

“귀여워 죽겠네.”

뭐가. 네가 준 가방이?

임석영이 교실 뒷문으로 들어갔다. 남윤수는 김찬영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4반으로 걸어갔다. 나만 복도에 가방끈을 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눈만 끔벅거리면서.

뭐야. 방금 뭔가가 좀 이상했는데.

조회 시간이 되자 각 반의 담임들이 하나둘 복도로 나타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 임석영의 오른팔 셔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줬다.

남윤수와 김찬영은 햄버거 할인 쿠폰을 쓸 거라며 몰래 학교를 나갔다. 그 때문에 임석영과 단둘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마주 보고 앉은 임석영이 왼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어설프게 밥을 뜨면 그 위에 내가 반찬을 올려주는 식이었다.

“제육볶음 주세요.”

임석영용 젓가락을 들고 그의 식판에 있는 제육볶음을 집어 숟가락 위에 올렸다. 제육볶음이 올라간 숟가락이 임석영의 입으로 들어간다.

깔끔하게 숟가락을 긁은 임석영이 붕대 감은 오른손을 식판 위에 떡하니 내려놓고 씩 웃는다. 얄밉게.

“홍차야.”

“왜.”

“어제 뭐 했어?”

젓가락질을 하다가 흠칫 동작을 멈추고 눈을 올렸다.

“나, 어제, 어, 동물농장 봤어.”

“동물농장?”

“일요일엔 동물농장이지.”

“아아.”

임석영이 숟가락을 내민다.

“멸치볶음 부탁합니다.”

눈을 치켜뜨자 임석영이 싱긋 웃는다. 이래라저래라, 사람 부려먹는 주제에 사람 좋은 웃음은 왜 흘려.

입술을 비죽이며 임석영 젓가락을 들었다. 그의 식판에 있는 멸치볶음을 집어 숟가락 위에 올렸다.

“야…. 넌 불편하지도 않냐. 이렇게 밥 먹는 거.”

“하나도.”

임석영이 밥을 뜨며 고개를 젓는다.

너 양손잡이라며. 왜 왼손으로 숟가락 잡는 것도 버거운 것처럼 어설프게 구는 건데.

“밥 먹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원래 밥은 꼭꼭 오래 씹어야 된다고 그랬어.”

“그거 언제 푸는데.”

“이거?”

임석영이 오른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음, 하며 고개를 기울인다.

“그러게.”

그러게? 이 황당한 놈을 봤나.

손에 들고 있던 임석영용 젓가락을 놓고 내 숟가락을 들었다.

남은 밥 빨리 쓸어 먹고 임석영 밥이나 먹여야지. 젓가락을 들었다가 놓고 들었다가 놓고 하는 것도 일이었다. 밥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입에 넣고 반찬을 입에 욱여넣었다.

활짝 열린 급식실 출구로 내내 안 들어오던 햇빛이 새어들었다. 느리게 밥을 먹고 있어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운동장에선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한산해진 급식실에 잔잔한 소음이 돌았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남아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의 말소리.

“야, 홍차.”

전투적인 자세로 숟가락을 들고 눈을 올렸다. 늘 바람막이나 후드 집업을 입고 오던 임석영이었는데 오늘은 교복 셔츠에 니트 조끼 차림이었다. 부쩍 날이 따뜻해진 탓이리라.

옷이 얇아져서 그런지 넓고 다부진 어깨가 도드라졌다. 사람을 불러놓고 아무런 말이 없는 그를 빤히 보았다.

“뭐, 왜. 말해.”

햇살과 소음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말없이 가만 보고만 있던 임석영이 숟가락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 우리 집 와.”

불규칙적인 소음이 아득해지는 듯 멀어졌다. 가까운 곳에서 임석영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일까.

눈을 깜박거리다가 물음표를 띄웠다.

“왜?”

임석영이 내 앞에 있는 젓가락을 가져가 왼손에 쥐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한 솜씨로 내 식판에 있는 멸치볶음을 집어 내 숟가락 위에 올린다.

“조별 숙제 해야지.”

그런 게 있었나.

“너랑 나랑 조잖아.”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겠는데, 조는 또 언제 정했어.

임석영이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을 끼운 채 턱을 괬다.

“설마 몰랐던 거 아니지?”

그러곤 도망갈 생각 말라는 듯 묻는다.

사용하는 데 전혀 불편함 없어 보이는 임석영의 왼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젓가락이 아주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간 숟가락 들기도 버겁다며 손을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야, 너 왼손….”

“응?”

“완전 잘 쓰네.”

“…….”

“새끼야….”

*

주말. 그러니까,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거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맞느냐고.

평일 내내 임석영에게 시달렸다. 양손잡이인 것도 들킨 주제에 자꾸 붕대를 풀지 않은 오른손을 들먹이며 주말에 같이 숙제할 것을 강요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까지는 아, 나 오른손 못 쓴다고, 아프다고, 조별 숙제인데 혼자 하라고? 양심 없네, 하던 놈이 목요일이 되자 나 내신 망치면 너 때문이야, 그땐 어떻게 책임질 건데, 하며 협박하더니 금요일이 되자 미끼를 던졌다.

오기만 해, 내가 다 할게, 넌 그냥 와서 피자나 먹어, 아무리 그래도 조원이 자리는 지켜야지, 하고.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입을 크게 벌려 덥석 물었다.

탁수 사장님에게 전화해 토요일 알바를 뺐다. 이유를 물을 만도 한데 내 목소리가 우울해 보였는지 흔쾌히 알았다! 하며 빼줬다.

달칵, 인터폰 소리가 넘어간다.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지도 않고, 누구냐고 묻는 소리도 안 넘어왔다. 새끼가, 또 장난질인가.

“장난하지 말고 열어라.”

― 누구세요?

여자였다. 아, 세상에. 곧바로 자세를 고치고 인터폰 렌즈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 석영이 친구인데요.”

― 아, 어서 와요.

유리문이 옆으로 부드럽게 밀려나며 열렸다.

망했네. 임석영, 내 올라가서 너를 처단하리라.

한 칸, 한 칸, 부드럽게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굳게 닫힌 현관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그러자 1분이 채 되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가족사진에서 보았던 임석영의 모친이었다. 바로 허리가 굽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사람 좋게 웃는다.

“들어와요.”

“네.”

들어선 집 안에서 임석영의 모습이 안 보였다. 신발을 벗고 멋쩍게 서 있자 그녀가 임석영의 방문을 열어준다.

“석영이는 지금 씻고 있어요.”

“아, 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임석영의 방으로 들어서면서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꼭 자동차에 달아놓는, 계속 고개만 끄덕이는 인형 같았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그녀가 소리 없이 웃는다. 내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모습이었다.

“기다리면 곧 나올 거예요. 숙제 한다고 했죠?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데,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어서.”

“아! 괜찮아요. 조금만 있다가 갈 거예요.”

거창하게 숙제를 할 생각도 없었다. 내 성적도 아니고 홍차연 성적이다. 홍차연 모친도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저 출석만 신경 써주면 된다고 했다. 어차피 내가 공부를 해봤자 홍차연보다 점수가 잘 나올 리가 만무하다. 그는 전교 10등 안에서 석차가 오르내리곤 했으니.

“그럼, 공부 열심히 해요.”

그녀가 웃으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꾸벅, 인사를 한 뒤 멀뚱히 서 있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난다.

“…예쁘시다.”

괜스레 마음이 심란해졌다. 넓은 집, 친절한 엄마. 처음으로 임석영이 조금 부러웠다.

들썩들썩, 엉덩이를 움직였다. 엉덩이를 포근하게 감싸는 게, 침대마저 좋았다. 스프링 매트리스가 아닌지 꺼졌다가 올라오는 느낌이 달랐다. 쓸데없이 푹신하네. 괜히 할 일 없이 침대보를 쓸었다.

임석영의 방을 둘러봤다. 옷장 하나,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게 다였다. 벽에 앉은 모기를 잡은 적도 없는지 흰색 벽지가 자국 없이 깨끗하다.

침대와 옷장, 책상은 모두 목제였다. 이불은 탁한 남색이었고 흰색 실선이 바둑판무늬로 얇게 들어가 있다. 장식용인지 뭔지 바닥에는 아령 두 개가 있고.

임석영 팔이 단단했던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시선을 옮겼다.

책장에는 문제집과 참고서, 세계문학전집이 빽빽하게 꽂혀 있고 책상 위에는 연필꽂이와 붕대, 노트북이 있다. 한입 베어 문 사과가 노트북 중앙에 하얗게 박혀 있다.

“좋은 거 쓰네.”

침대에 앉아 방을 훑고 있을 때, 벌컥 방문이 열렸다. 왼쪽으로 잔뜩 돌아가 있던 고개가 정면으로 향했다.

“이제 오….”

냐, 라고 하려던 뒷말이 잘렸다.

문 앞에 임석영이 있었다. 벗은 채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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