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13화 (13/70)

제13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 임석영이 붕대 감은 손으로 옷자락을 고정하고 지퍼를 채우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왼손 사용이 힘든지 낑낑거렸다. 슬라이드를 막음쇠에 채우려고 할 때마다 손이 어긋났다. 툭, 툭, 자꾸 어긋나는 것이 신경 쓰인다.

그 쉬운 걸 왜 못 끼워 넣니. 왼손 사용이 영 서투르다. 그 모습을 힐끔대다가 한숨을 뱉으며 몸을 돌렸다.

“더럽게 못하네. 치워봐.”

임석영의 손을 치워내고 지퍼 손잡이를 잡았다.

“어, 대신 해주는 거야?”

슬라이드 부분을 막음쇠 부분에 끼워 넣고 손잡이를 위로 쭉 끌어 올렸다. 이가 맞물리며 지퍼가 채워진다.

끝까지 지퍼를 채우고 보니, 올라간 손이 임석영의 턱 아래에 있었다. 손을 따라 올라간 고개가 위를 향하고, 내려다보는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엇, 하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갔다. 마주 보고 선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괜히 민망해 옷에 닿아 있던 손을 떼고 빈손을 탁탁 털었다. 몸을 돌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데 임석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옳지. 이게 오른팔의 자세지.”

“…뭐래.”

엘리베이터 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문에 비친 얼굴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 미친, 왜 이래.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당겨 묶었다.

힐끔 옆을 돌아보자 거울을 보고 선 임석영이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잡고 있는 게 보인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에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야, 홍차.”

괜히 훔쳐보는 걸 들킨 것 같아 어깨를 움찔 떨며 고개를 돌렸다.

“어, 어?”

“너 사귀는 사람 있어?”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눈이 동그래졌다. 애인이 있냐는 단순한 질문인데도, 성별 자체를 거짓말하고 있는 처지라 그런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건 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던 임석영이 머리칼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거울에 등을 기댄 그가 빤히 나를 본다.

“아니, 친구가 자꾸 남자 소개해 달라고 그래서. 없으면 너 해주게.”

하마터면 아니! 이 미친놈아! 나 남자 좋아하거든! 하고 소리칠 뻔했다.

큼큼, 헛기침을 뱉으며 층수를 확인했다. 뭔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느려터졌어.

“그, 네 친구 누구냐. 남윤수랑 김찬영 해주면 되겠네.”

“안 돼. 걔들은 담배 펴서 탈락이야. 혹시 너 담배 피우냐?”

“아니!”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새어 나간다. 이게 소리까지 지를 일인가. 뒤늦게 머쓱해져 콧등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한 칸, 한 칸 내려가는 층수가 보였다.

“아, 그런데 너 대답 안 했어.”

“뭐를.”

“사귀는 사람 있는지.”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마자 후다닥 다리를 움직였다.

“야, 나 먼저 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세상에, 소개팅이라니.

괜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는데 뒤로 임석영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번호 준다?”

무시하고 갔다가는 소개팅이 성사될 것 같은 분위기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안 돼! 주면 죽는다!”

“죽기까지?”

“죽어!”

“무섭네.”

임석영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확인을 위해 주먹을 말아 올리자 임석영이 입술을 터트리며 웃는다.

“아, 알았어. 안 줘.”

주기만 해봐. 주먹 쥔 손을 내리는데 허공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가방이 날아왔다. 엉겁결에 두 손을 뻗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전학 첫날, 화장실의 풍경과 겹쳐졌다.

“번호 안 줄게. 이건 받아. 그렇게 찝찝하면 그냥 생일 선물 당겨서 받았다고 생각해.”

두 손으로 가방을 받아 든 채 말없이 임석영을 보았다. 붕대 감은 손을 허공에 휘휘 흔들어 보인 그가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임석영의 모습을 멀거니 보다가 두 손에 든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쓴 적이 없는지 지퍼 손잡이에 가격표가 달려 있다.

“생일 선물?”

기분이 이상했다. 고개를 들어 임석영이 걸어간 방향을 보았다.

어딘가로 꺾어 들어갔는지 임석영의 모습은 없고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선물이라….”

낯선 단어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상해졌다.

*

“누리야, 뭐 한다고 머리를 이렇게나 짧게 잘랐어?”

전에 함께 배달 일을 했던 오빠가 오랜만에 가게를 찾아왔다. 두 손에 음료가 든 캐리어를 들고 들어오더니 구레나룻을 다 깎아먹은 나를 보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자꾸 어색해 죽겠다고 쉬지 않고 떠들기에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펴주었다. 그러자 조용히 입을 다물더니, 다시금 이야기를 꺼낸다.

“뭐, 그냥. 샴푸도 많이 쓰고.”

“야, 그래도 그렇지. 여기 구레나룻을 뭐 한다고 다 밀어버렸어.”

“아, 진짜. 돈도 한 푼 안 보태 줬으면서 말이 많아. 구레나룻을 밀든가 말든가!”

커피를 쪽쪽 빨아 마시다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답하자 재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내민다.

“아니, 나는 그냥…. 네 머리 스타일이 확 변해서… 심경의 변화라도 있나 하고….”

기가 죽은 재민의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날 섰던 마음이 둥글해지며 가라앉는다.

“없어. 그런 거.”

“알바도 이제 평일은 안 한다며. 평일에 다른 일 해?”

그게 사실 일이라면 일이었지만,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입에 빨대를 물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뭐 하는데?”

“그냥, 뭐….”

뭐라고 할까, 머리를 굴렸다.

“대역?”

“뭐야, 그게. 보조 출연 같은 건가?”

“어, 뭐. 비슷해.”

“그럼 주말에도 그걸 하지. 오토바이 타는 거 너무 위험하잖아.”

그게 또 주말은 학교를 안 가잖아.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어 입술을 붙이고 어색하게 웃었다.

재민은 세 살 터울로 올해 스물한 살이었다. 알바를 하기에 나처럼 자기 용돈 자기가 버는 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재민의 모친이 주렁주렁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를 걸고 나타났다.

그러니까, 그게 일종의 반항이었던 거다. 집에서 오토바이를 못 사게 하니까 오토바이 탈 구실을 만드는 것. 그게 알바의 이유였다.

귀를 잡힌 채 끌려 나가더니 다음 날 알바를 그만두었다.

여기서 일했던 기억이 좋았는지 재민은 알바를 그만둔 이후로도 종종 중국집을 찾아왔다. 오늘처럼 두 손에 먹을 것을 사 들고서.

“그럼 앞으로 주말에만 와야겠다.”

“기름 냄새 나는데, 뭐 한다고 여길 자꾸 와?”

그 말에 재민이 말없이 웃는다. 생긴 건 강아지같이 생겨가지고, 웃을 때면 눈이 접혔다.

“김누리! 배달!”

주방에서 이름이 불렸다. 탁수 사장님이 래핑한 그릇을 밖으로 훅훅 밀어 보내고 있었다.

손에 든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의자 옆에 두었던 헬멧을 머리에 썼다. 철가방에 탕수육, 자장면, 단무지를 챙겨 넣고 슬라이드 뚜껑을 내려 닫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에 주방에서 천천히 다녀! 하는 사장님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재민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띵동,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 너머에서 누구세요? 하는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자장면 배달 왔습니다.”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여자가 강아지를 안은 채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하얀 몸통에 검은 털이 박힌 강아지였다. 낯선 사람이 와서 그런지 작은 입으로 우렁차게 짖어댔다.

“아, 죄송해요. 원래 순한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자연스럽게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이고 신발장 앞에 쪼그려 앉아 철가방을 내려놓았다.

“카드 결제 하셨죠?”

“네.”

뚜껑을 올리고 안에 든 접시들을 하나씩 빼서 바닥에 놓았다.

“야, 꿈꿈이 데리고 들어가 있을 테니까 네가 받아.”

계속 짖는 강아지를 안고 여자가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너머에서 멍멍, 하는 소리가 울렸다. 탕수육, 자장면 세 그릇, 단무지 그리고 군만두를 꺼내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군만두는 서비스입니다.”

뚜껑을 탁 내리고 일어서려는데 거실에 늘어져 누워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

미친, 임석영이 왜 저기에 있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보다가 잽싸게 헬멧 바이저를 내렸다.

“어?”

돌고래 인형을 베고 누워 있던 임석영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를 보았다.

“홍차?”

“마, 맛있게 드세요.”

철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손잡이를 돌려도 문이 안 열렸다. 왜 이래, 이거.

다급하게 손잡이를 잡고 위아래로 움직이는데 등 뒤로 임석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젓가락 안 줬는데.”

“아.”

손잡이를 놓고 쪼그려 앉아 철가방 뚜껑을 열었다. 미처 꺼내지 못한 젓가락 세 개가 함석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젠장.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던 임석영이 어느새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흘긋, 그의 몸통까지 눈을 올리자 앞으로 내민 손이 보인다. 젓가락 내놓으라는 듯 손바닥을 뒤집은 채로.

철가방 안에서 꺼낸 젓가락을 그의 손바닥 위에 놓으려는데, 임석영의 손이 움직였다. 위로 올라와서 시야를 가린다 싶더니 바이저 위에 닿는다.

아차, 하는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바이저가 위로 올라갔다. 어둡게 보이던 막이 걷히며 임석영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나를 바라보는 그 또렷한 눈동자까지.

픽, 임석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 너 맞네.”

잽싸게 임석영의 손을 쳐내고 바이저를 내렸다. 허? 하는 웃음이 앞에서 터지더니, 다시 바이저 위에 손을 얹고 위로 올렸다.

미친, 누가 이기나 보자.

탁, 손을 쳐내고 다시 바이저를 내렸다.

“야.”

“왜 자꾸 반말이십니까.”

최대한 목소리를 깔았다. 어차피 헬멧 바이저를 내리고 있어 소리가 울렸다. 목소리를 분간하긴 어려울 것이다.

“너 아니라고?”

“이승기도 아니고 뭐 자꾸 너라고 하시는지.”

“허?”

임석영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헛웃음 지었다.

이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 구겨진 얼굴에 들키면 죽는다는 초조함이 몰려왔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맛있게 드십시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젓가락 들고 가시게?”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던 손이 멈칫했다.

아, 미친. 되는 일 없네. 젓가락 든 손을 뻗었다. 임석영이 젓가락을 가져가더니 젓가락 끄트머리로 헬멧을 탁탁,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헬멧 잘 어울리네.”

겁 대가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진짜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어쩌자고 젓가락으로 헬멧 치면서 잘 어울린다고 반말을 하는 건지.

무례한 새끼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팔을 거뒀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데 또 문이 안 열렸다. 헬멧 안에서 얼굴이 울상으로 찌푸려진다.

덜컹덜컹, 안 열리는 문을 흔들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며 임석영이 손을 내밀었다. 움츠러든 어깨로 임석영의 옷자락이 닿았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손잡이 위의 버튼을 누른다. 띠리릭,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어깨에서부터 사선으로 내려온 임석영의 팔에, 손잡이를 잡은 채 꼴깍 침을 삼켰다. 현관문과 임석영 사이에 끼어 있는 꼴이었다.

“학교에서 보자.”

“자꾸 뭐, 뭐라고 하시는지. 저, 서, 서른인데요. 학교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어깨로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열렸던 문이 천천히 닫히고, 그 좁아진 틈 사이로 임석영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나, 이제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닫힌 문을 힐긋 돌아보았다.

공부한다고 노트까지 가져오라던 놈이, 왜 이 동네까지 와서 놀고 있는 건지. 그것도 여자 집에서.

단둘인가? 자장면은 세 개였는데. 공부도 안 하고 놀 거면서 괜히 나 엿 먹으라고 어제 노트 가져오라 시킨 거 아니야?

그 생각에 미치자 괜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알 게 뭐야.”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튼을 누르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후드 티 아래, 하얗게 드러난 맨다리가 보였다. 미친, 반바지.

그랬다. 나는 오늘 후드 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봤겠지?”

발끝에 닿은 시선을 허벅지까지 쭉 올렸다. 반바지가 짧아도 너무 짧다.

“망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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