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임석영이 보낸 주소의 동과 호수를 다시 확인했다.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던 시선을 올려 눈앞에 있는 아파트를 보았다. 임석영의 집은 홍차연의 모친이 구해준 집에서 300m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위장 전학이니 아이들과 깊게 얽혀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런데 학교 밖에서 같은 반 애를 만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임석영의 집을 찾아오게 되다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닭싸움하다가 뒤로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에코백을 베란다에 널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것이 모두 다 거짓말하는 자의 운명이니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출입문 옆에 달린 공동 현관 인터폰에 임석영 집의 호수를 누르고 호출했다.
세대 호출음이 ‘스와니 강’이다. 미 레도미레 도 도 라도, 그 음을 따라 초등학교 때 배운 가사를 자연스레 따라 불렀다. 생각지 못한 흥얼거림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 따라 부르는 버릇 진짜 고쳐야 되는데.
달칵, 호출음이 넘어가며 끊어진다. 문도 안 열리고 목소리도 안 넘어왔다.
인터폰 앞에 가만히 서서 새카만 렌즈를 바라보았다. 혼자 있다고 그랬는데, 그사이에 부모님이 오셨을 수도 있으니 대뜸 야, 문 열어! 하고 소리칠 수는 없었다.
깜박깜박, 눈을 움직이다가 입을 열었다.
“…석영이 집 맞나요?”
그 의기소침한 소리에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목소리가 넘어온다.
― 암호는?
임석영 목소리다. 그 소리에 두 눈이 절로 가늘어진다.
“열어.”
― 누가 안 열어준대? 암호.
“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그럼 문제.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은?
갑자기 무슨 인터폰 앞에 사람 세워두고 퀴즈쇼야.
“장난하지 마.”
― 지금 나한테 없는 거, 뭐냐고.
“인성.”
― 얼레?
“싸가지.”
― 어쭈.
“개념.”
― 참 많이도 없네. 올라와.
유리문이 옆으로 쭉 밀려나며 열렸다. 진작 열어줄 것이지. 성큼, 안으로 발을 들이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며 옆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본 거울 속,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한 내가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 때문에 그런가. 진짜 사내새끼 같네.”
홍차연 흉내를 낸답시고 이발하러 미용실에 갔던 날이 생각났다. 미용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새삼스레 예뻐 보였다. 검은 생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 빨간색 니트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흰색 치마를 입은 날이었다.
거울 앞에 앉아 싹둑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발기로 구레나룻을 깎을 때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아이구, 왜 울고 그래요.”
머리를 이발해주던 여자가 휴지를 챙겨줬다. 눈물의 이발식이었다.
옛 기억에 빠져 있는 것도 잠시,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층수를 확인하고 발을 내디뎠다.
“어….”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임석영의 집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었다. 임석영이 현관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왔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현관문이 활짝 열린다. 어서 와, 임석영 집은 처음이지? 그런 자막이 임석영 머리 위로 떠오르는 것만 같다.
현관 앞에 서서 노트를 내밀었다. 노트만 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여기 온 목적이 이 노트였으니, 굳이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안 들어와?”
“노트만 주고 가려고.”
“왜? 약속 있어? 피자 시켰는데.”
허기진 마음속으로 궁서체의 피자가 침투했다. 그 두 글자에 마음이 마구 흔들렸다. 피자를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더라.
“아, 아니야. 그냥 갈게.”
“뭐, 그러든가.”
임석영이 무심하게 노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배웅을 해주는 듯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섰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건가.
“들어가.”
“왜?”
“아니, 나 가는 거 안 보고 있어도 된다고.”
내 말에 임석영이 으음, 하며 눈썹을 매만졌다.
“너 보고 있는 거 아닌데.”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갑자기 귀로 청아한 유리상자의 노래가 흘러들었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그런 가사.
피자 배달원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는 유니폼을 봐버렸다. 도미노, 저것은 도미노.
“피자 시키셨죠?”
배달원이 피자 냄새를 흘리며 현관 앞에 서 있는 임석영에게로 걸어갔다.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눈을 돌려 피자 배달 완료 현장을 바라보았다. 허기진 마음속에 피자 냄새가 공격적으로 침투했다. 흔들리고 말고 할 것 없이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마음속 가운데 피자라는 깃발이 꽂혔다. 피자가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걸음을 돌려 배달원 뒤에 섰다. 배달원이 피자 박스를 놓고 돌아섰다. 임석영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뭐야, 안 갔어?”
“…….”
입술을 꾸물거리며 가만 서 있자, 임석영이 입술을 터트리며 웃는다.
“먹고 갈래?”
“…네가 원한다면. 뭐.”
픽, 입꼬리를 올린 임석영이 문을 열고 길을 내어줬다.
“들어와.”
임석영을 따라 현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없이 신발을 벗고 발을 들였다. 시원하게 트인 거실이 넓다. 거실 옆으로 부엌이 연결되어 있었다.
피자 박스를 든 임석영이 부엌으로 가지 않고 거실 탁자 위에 박스를 놓고 앉았다. 혹시 누가 있지는 않나 두리번거리자 임석영이 아무도 없어, 하며 가족의 부재를 알렸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임석영과 마주 보고 앉았다. 임석영이 피자 박스를 열었다. 나도 모르게 와아,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도우가 두툼하고 토핑이 풍부했다. 냄새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피자 한 조각을 내게 건네며 임석영이 피식 웃는다.
“너 진짜 얼굴에 뭐 못 숨기는 거 알아?”
“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고, 내 앞으로 온 피자를 덥석 받았다. 임석영이 가볍게 웃으며 아니다, 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물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부엌에서 안쪽 방으로 이어지는 벽에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조모와 부친이 의자에 앉고 그 뒤에 모친과 임석영이 서 있는 사진이었다.
“너 외동이야?”
“응.”
아하,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속에 있는 네 사람의 인물이 장난이 아니었다. 임석영과 함께 서 있는 모친의 키가 컸다. 그래서 임석영이 키가 큰 건가. 부친은 짙은 눈썹에 날렵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석영이 잘생긴 건가.
가족사진이 있다는 이유로 화목하구나, 부럽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 여기 사는데 왜 다른 정류장에서 내렸어?”
“뭐, 언제.”
“금요일. 가방 놓고 내린 날.”
“아….”
피자를 입에 물고 눈을 올리자 임석영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뭐 확인할 게 있어서.”
아, 그러냐. 고개를 끄덕였다.
피자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씹었다. 피자 한 조각이 네 입 만에 꽁다리만 남았다. 두 뺨 가득 먹을 것을 넣고 씹는데 임석영이 피클을 집어 먹으며 놀랍다는 시선을 보낸다.
“아까 분명 그냥 간다고 하지 않았냐.”
“…….”
“졸라 잘 먹네.”
치켜뜬 눈으로 쏘아보자 임석영이 소리 없이 먹어, 먹어,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또 순순히 먹는 데 열중하는 나다. 단순한 인간 같으니라고.
“오늘 뭐 해?”
“알바.”
“너 알바 해?”
피클을 집어 먹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차, 싶은 생각에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 알 바 없다고.”
더는 묻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알 필요 없다고?”
“그래.”
“내 오른팔이 뭐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야지.”
“내가 왜 네 오른팔이야?”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임석영이 음? 하며 오른손을 들었다. 진짜,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야. 악마 같은 놈.
“텔레비전 좀 켜봐.”
“뭐?”
“너무 조용하지 않아?”
임석영이 왼손으로 피자를 든 채 리모컨을 턱짓했다.
주말까지 내가 네 셔틀 노릇을 해야 하는 건가. 황당했지만 조용히 리모컨을 들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까라면 까는 운명이라니, 서글프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이며 리모컨을 내려놓자 임석영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노트 하나 들고 오는데 가방은 뭐 한다고 가져왔어?”
임석영 가방이었다. 내가 빌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가방 셔틀을 했더니 나한테 버리고 간 거나 다름없었다. 너 써, 하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덥석 받아서 쓰는 것도 이상했다.
“네가 두고 내렸으니까.”
“너 주고 내린 거라니까.”
“내가 왜 네 가방을 써.”
“아, 그 쇼핑백 보기 싫어서 그래. 종이 가방 들고 오면 다 찢어버린다.”
헐, 하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냐. 남의 소중한 가방을 왜 찢는다고 난리야?
“싫으면 다른 거 줄게. 그거 들고 가.”
“왜 자꾸 네 가방을 가져가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임석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친구가 주고 싶다는데 그냥 좀 받아주면 안 될까?”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다고. 자꾸 친구, 친구 하시는지.
“난 말했다. 쇼핑백 들고 오면 찢는다고.”
이 새끼, 진짜 완전 제멋대로네. 입술을 꾸물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싫은 소리 해봤자 안 좋은 소리만 더 듣지 싶었다. 쇼핑백이 갈기갈기 찢기는 미래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나쁜 놈.”
꾹 다문다고 다물었는데, 피자를 먹으려고 벌린 입으로 마음의 소리가 새어 나간다.
“허?”
임석영이 황당하다는 듯 입술을 터트려 웃었다. 저 스스로는 친구 돕고 욕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돕는 게 이기적이라는 것도 모르고.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채널을 돌렸다.
피자를 다 먹고 멋쩍게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응. 약속 있어서.”
“그래.”
“이건 내가 가는 길에 버리고 갈게.”
피자도 다 먹은 마당에 빈껍데기만 놓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재활용으로 들어갈 만한 것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자 텔레비전 전원을 끈 임석영이 방으로 들어가기 전, 박스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냥 둬.”
가는 길이라 버리려고 했던 건데. 집주인이 그냥 두라고 하니, 고집을 피우기도 뭣해 손에 든 것을 도로 내려놓았다. 멀뚱히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나 간다.”
방으로 들어간 임석영에게 짤막한 인사를 전한 뒤 신발장 앞에 벗어둔 운동화에 발을 꿰어 넣었다.
저 새끼, 사람 간다는데 나와 보지도 않네.
신발 앞코를 콕콕 바닥에 찍어 발뒤축을 집어넣는데 벌컥, 임석영이 들어갔던 방문이 열렸다. 입고 있던 반팔 티를 벗고 후드 티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그 위에 바람막이를 걸친 임석영이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 어깨엔 가방끈이 걸려 있다.
“아, 손 하나 못 쓰니까 옷 입기도 힘드네.”
왜 옷을 갈아입었지, 하는 순간 가까워진 임석영이 자연스레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배웅 안 나와도 돼!”
임석영이 따라 나서기에 두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남은 발 하나까지 슬리퍼로 옮겨 신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며 눈을 맞췄다.
“내가 너 배웅을 나간다고? 그렇게 생각해?”
“어?”
그럼 갑자기 왜 나오는데. 그런 생각으로 눈을 끔벅이자 임석영이 나를 지나쳐 현관문 밖으로 나간다.
“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거야. 이상한 오해를 하네?”
아, 그러니. 쓸데없이 소리를 내질렀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이 닫히기 전,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