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하는 것 없이 시간표가 잘도 넘어갔다. 교과서를 폈다가 덮고, 폈다가 덮으니 어느새 오후가 됐다. 그리고 어김없이 쉬는 시간이 되면 닭들이 교복 바지를 걷어 올리며 교실 뒤쪽으로 모였다.
매번 같은 장면이지만, 지금 뭔가 다른 게 있다면, 교실 뒤에 내가 서 있다는 거다.
“원조 종이 인형 대, 신규 종이 인형의 대결!”
머리를 빡빡 깎은 애가 노트를 돌돌 말아 주둥이에 대고 소리쳤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어느새 교실 뒤에 커다란 원이 생기고, 그 가운데 나와 김윤환이 있었다. 오른발을 굽어 올려 잡은 채로.
그러니까 체육 시간, 키순으로 줄줄이 섰는데 김윤환이 내 뒤에 섰다.
그 모습을 본 누군가가 “야, 아무리 봐도 네가 차연이 앞에 서야 하는 거 같은데.” 하고 말하자 김윤환이 발끈했고, “내가 전학생보다 크거든?” 하며 갑자기 발뒤축을 맞붙이고 서서 키를 쟀다.
아이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키 차이를 살피다가, 어우, 눈 시리네, 하며 우위 가리는 것을 포기했다.
원조 종이 인형 김윤환이 내가 더 크다고! 나는 이제 종이 인형 직을 전학생에게 넘겨줬다고! 하고 바락바락 우겼다. 그 모습에 그의 친구들이 대결을 제안했다.
“야, 이참에 전학생이랑 닭싸움해서 종이 인형 최강자를 가려.”
그렇게 해서 체육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판이 벌어진 것이다. 2학년 1반의 종이 인형 최강자를 가리기 위해서. 키 작고 마른 애들 서러워서 살겠나.
두 손으로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콩콩 뛰었다.
김윤환의 눈이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린다. 어떻게 해서든 이 닭싸움에서 이겨 종이 인형이라는 오명을 탈피하고 싶은 것 같다.
“야, 전학생! 여기서 지면 깔끔하게 우리 반 공식 인형 하는 거야!”
공식 인형씩이나 되어야 하는 거라면, 져줄 수 없지. 최선을 다해 싸워야지.
승부욕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시작! 하는 소리가 터졌다.
김윤환이 성급하게 콩콩, 바닥을 내려찍으며 다가온다. 달려들어서 날려 버리겠다, 그런 심산인 것 같았다.
발목을 힘주어 잡고 김윤환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콩, 콩, 콩, 그가 가까워지고, 가까워진 만큼 콩, 콩, 콩, 뒤로 물러났다.
“비겁하다!”
김윤환이 소리치고, 내가 씩 웃었다.
“닭싸움에서는 방어가 중요하지. 지금 너처럼 뛰었다가는 체력이 금방 소진되고 말 것이다.”
꽤나 비장한 내 말투에 애들이 소리 내 웃었다.
“미친, 내가 너 한 방에 날려버린다.”
김윤환이 콩콩 뛰어왔다. 가만 기다리다가 가까워졌다 싶을 때 뒤로 물러났다. 김윤환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른다.
“아! 미친! 정정당당하게 대결하자고!”
“전략이다.”
“아, 벌써 힘드네.”
그거 조금 한 발로 뛰었다고 숨이 거칠어진 김윤환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가 마지막 한 방이라는 듯 전력으로 뛰어온다. 빠른 속도로.
가만 서 있다가는 부딪칠 것 같아 뒤로 물러나는데 발뒤축이 문턱에 걸렸다.
“어?”
중심 잃은 몸이 뒤로 기우는데, 눈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린 김윤환이 털썩 주저앉았다.
“김윤환 패!”
그 소리와 동시에 몸이 훅, 뒤로 넘어갔다. 아아, 나는 좋은 닭이었습니다, 하며 안전한 착지를 준비하는데 누군가의 손이 등을 받쳐 올렸다.
중심이 무너지면서 뒤에서 등을 받친 사람과 함께 복도로 넘어갔다. 누군가의 손이 내 허리를 감아 안는 동시에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
머리 위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에 서 있던 사람의 몸 위로 떨어진 탓에 나는 정작 부닥친 곳이 없었다.
“엇, 미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누군가 한 팔로 내 몸을 감은 채 뒤로 뻗은 상체를 일으켰다.
“나이스 캐치.”
체육복 상의를 벗어 어깨에 두른 임석영이 맑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
임석영이 연필을 들었다가 힘없이 떨어트린다.
“아, 진짜 안 잡혀.”
책상 위에서 도르르 굴러가는 연필을 쳐다보았다. 아까 교실 문 앞에서 내 등을 받쳐 구해준 뒤부터 손가락이 아프다고 저러는 중이었다.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다가 떨어트리고, 연필을 들다가 떨어트리고,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며 신음했다.
“야, 홍차. 이거 보라니까. 진짜 연필 못 들어.”
“…….”
“손가락이 안 구부러져.”
“장난하지 마.”
“아니, 진짜라니까?”
임석영이 책상 위를 구르다 멈춘 연필을 다시 들었다. 연필을 손가락 사이에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떨어트렸다. 도르르, 연필 구르는 소리가 압박처럼 느껴졌다.
“아파. 아무리 생각해도 아프단 말이지.”
꼭 나 들으라는 소리 같아서 연필을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럼 보건실을 가보든가.”
“보건실? 갔는데 진짜 다친 거면.”
임석영이 힘을 잔뜩 뺀 손목을 들어 올리고 꺾인 손을 덜렁덜렁 흔든다.
“다친 거면 너 때문에 다친 거잖아.”
“뭐, 그래서 어쩌라고.”
“네가 내 수발들어야지.”
수발 같은 소리 하네, 수발 놈이, 하고 생각했지만 눈만 흘기다가 시선을 거뒀다.
선생의 부재로 자습이 한창이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임석영이 의자를 뒤로 밀고 몸을 돌린다.
“야, 나 보건실 갔다 온다.”
그러더니 쪼그리고 앉아 교실 뒷문을 빠져나갔다. 사사삭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진짜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교실 뒷문에 향해 있던 시선을 책상 위로 옮겨 오는데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 보였다. 임석영의 책상 위를 굴러다니다가 추락한 연필이었다.
바닥에 놓인 연필을 가만 보다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웠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연필심이 부러졌는지 나무 위가 댕강 잘려 있었다. 그냥 자리에 둘까 하다가 분화구처럼 파인 모양새가 보기 싫어 필통에서 커터 칼을 꺼냈다.
노트를 아래에 놓고 연필을 쥐었다. 오른손에 커터 칼을 들고 칼날을 쭉 밀어 올렸다. 칼날을 나무에 대고 칼등에 엄지를 붙여 나무를 얇게 벗겨냈다.
끝이 뭉툭하게 부러진 연필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칼날로 그 끝을 뾰족하게 깎아냈다. 칼날에 갈린 연필심이 가루가 되어 노트 위에 쌓인다.
“완전 조각이네.”
빼주름히 깎은 연필로 노트에 글자를 적어보았다.
[임석영]
그렇게 세 글자를 적고 뒤늦게 왜 이 새끼 이름을 적었지 싶어 얼굴을 굳혔다.
왜긴. 임석영 연필이라 그런 거지. 암, 그렇고말고. 칼날을 집어넣고 다 깎은 연필을 임석영 책상 위에 놓았다.
자습 시간에 나간 임석영은 쉬는 시간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교실로 돌아왔다. 한 손에 붕대를 감고서. 그걸 보는 내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야, 너, 너, 손 왜 그래?”
임석영이 손을 허공에 띄운 채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왜겠어.”
“어?”
“너 때문이지.”
헐,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이 벌어진다.
임석영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서랍을 눈짓했다.
“다음 수업 교과서 좀 꺼내주라.”
“너 다른 손은 멀쩡하잖아.”
“아, 그렇지?”
임석영이 상체를 뒤로 빼고 왼손을 움직여 교과서를 잡아 꺼냈다. 어설픈 동작으로 교과서를 펼치더니, 요란하게 필통을 뒤적인다. 그러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연필을 발견하곤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살벌하게도 깎았네. 네가 했어?”
무표정한 얼굴로 임석영의 얼굴을 보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책상 위에 잘만 있는 연필을 가져가 깎았다고 생각할까 봐 서둘러 답했다. 잘만 있는 연필을 깎아다 바친 것처럼 보이면, 그건 영락없는 임석영 꼬봉이잖아, 싶어서.
그가 연필심이 뾰족하게 드러난 연필을 한 바퀴 돌려 보더니 내려놓았다.
“그런데 어떡해.”
“뭘.”
“나 오른손잡이잖아.”
“대부분 다 오른손잡이지.”
책상에 붙어 있던 손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그러고는 보라는 듯 흔든다.
뭐 어쩌라고 갑자기 로봇 팔 흉내지. 무표정한 얼굴로 흔들리는 손을 보다가, 그 손이 오른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썹이 꿈틀거리며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임석영이 히, 소리를 내며 웃는다.
“이거 누구 때문?”
“…….”
“홍차 때문.”
“…야.”
“손이 어떻게 됐다?”
“…그건 좀.”
“삐어서 못 쓰게 됐다.”
“…억울한데.”
“필기 한다 못 한다?”
“…….”
“못 한다.”
아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네.
임석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대사에 심취한 듯 홍차 때문이지, 홍차, 하며 이름을 반복해서 뱉었다.
내가 야, 그건 사고잖아, 누가 나 잡아주래, 그냥 넘어지게 놔두지, 하고 말했지만 듣는 척도 안 했다. 지금의 임석영은 마치 벽 같았다. 내가 뱉은 말은 모조리 튕겨 나가고, 청산유수 같은 그의 말만 가득한 벽.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벽을 노려보았다. 내 이름 아니긴 하지만, 지금 내가 빌려 쓰고 있는 그 이름을 입에 그만 올려줄래? 하는 표정으로.
혼자서 중얼중얼 떠들던 임석영이 입을 싹 다물고 몸을 돌려 눈을 맞췄다. 장난스럽게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가 싹 거둔 얼굴이 왠지 모르게 냉했다.
“그래서, 내 필기는 누가 해?”
임석영이 노트를 건네며 빤한 시선을 던졌다. 가만히 뜨고 있는 눈이었는데, 그 눈이 괜히 사납게 보여 시선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악마 같은 놈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노트를 잡았다. 당겨 가져가려는데, 임석영이 노트를 잡고 안 놨다. 왜, 또 뭐가 문제인데.
“왜.”
“대답을 해야지.”
시바, 내가 개냐.
“내 필기 누가 한다?”
“내가 한다.”
임석영이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늘여 웃으며 손을 놓았다.
모나게 떠지는 눈으로 임석영을 흘기고는 그의 노트를 책상 위에 두고 펼쳤다.
공부도 더럽게 안 하게 생겼는데 필기는 개뿔, 생각하며 넘겨본 노트에 귀여운 필체로 빼곡하게 수업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임석영, 여러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자기 노트 돌려서 필기 시키는 거 아니야?
슥, 슥, 종이를 넘기는데 한 장을 넘겨도, 세 장을 넘겨도, 계속 같은 필체가 이어졌다. 검은색, 파란색, 빨간색, 펜을 바꿔가며 쓸 법도 한데 모든 글씨가 검은색이었다. 종이 테두리에 그 흔한 배고파, 언제 끝나, 잠 온다, 같은 낙서 하나가 없다.
공부도 안 하게 생겼다, 하는 것이 편견이었던 듯 수업 참여도가 좋아 보였다.
이거 진짜 임석영 글씨체인가.
그간 봐온 지렁이같이 휘갈겨 쓴 다른 애들의 필체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깨끗하고 깔끔한 필체였는데 이응을 크게 말아 쓰는 게 귀여웠다.
이렇게 매 시간마다 정리를 안 빼먹고 한 거 보면, 진짜 오른손을 못 써서 나한테 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옆자리이기도 하고, 쟤가 나 때문에 다친 건 맞으니까. 모나게 각이 지던 마음이 조금 둥글해진다.
그래. 이왕 하는 거 좋은 마음으로 하자.
와다다, 와다다, 와다다다다.
아마 지금 내 모습을 소리로 나타내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오른손이 쉬지 않고 노트 위에서 움직였다.
좋은 마음으로 하자고 했지, 최선을 다하자고는 안 했는데. 나 지금 왜 땀까지 흘려가며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있냐.
내 노트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필기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옆에서 하도 눈빛을 쏘아대는 통에 펜을 쥔 중지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분노의 노트 정리를 했다. 필기를 한 줄 정도 빼먹는다 싶으면 임석영이 손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느리다, 느려, 했기 때문이다.
고개가 쉴 새 없이 칠판과 노트를 오갔다. 선생님이 칠판에 휘갈겨 적은 메모 하나 빼먹지 않고 노트에 빼곡하게 옮겼다.
그렇게 노트 필기를 끝으로 빚을 삭감한 줄 알았으나,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경기도 오산 아니고 진짜 오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