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8화 (8/70)
  • 제8화

    수업과 쉬는 시간이 반복되었고 청소 시간이 되었다. 수업은 열심히 안 들어도 청소만은 열심히 했다.

    교실 뒤쪽에 있던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하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드르륵, 창문이 열렸다. 남윤수가 불쑥 머리를 들이민다.

    “우리 반 소지품 검사한대. 와씨, 교무실 청소 아니었으면 100프로 걸렸다. 맡아주라.”

    휙휙, 주위를 두리번거린 남윤수가 빠르게 담뱃갑을 날리고 사라졌다. 임석영의 책상 위에 남윤수가 던지고 간 담뱃갑이 덩그러니 놓이고, 교실 앞문이 열렸다.

    담임이 저벅저벅 옆구리에 기다란 나무 주걱을 끼고 들어왔다. 담임이 들고 다니는 나무 주걱, 저건 사랑의 매였다. 주걱 손잡이에 검은 매직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궁서체로. 사랑의 매, 라고.

    사랑의 매는 길이가 대략 50cm로 가마솥 밥을 뒤적일 때 쓰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왜 학생들 손바닥 때리는 데 사용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담임이 왔는데 임석영은 담뱃갑 치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남윤수가 사라진 복도만 보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네 책상 위에 그거 치워.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담임과 임석영을 번갈아 살폈다. 교탁에 다다른 담임이 몸을 틀었다.

    홱! 임석영의 책상 위로 손을 뻗어 담뱃갑을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에코백 안에 쑤셔 넣었다.

    탕탕, 담임이 주걱으로 교탁을 두드렸다. 그제야 임석영이 복도로 던지던 시선을 돌렸다. 음? 하는 임석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책상을 훑다가 바닥을 둘러보더니 나를 본다.

    반응 참 빠르다.

    “네가 가져갔어?”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쳐다보지 않자 임석영이 음, 이상하네, 하며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친구가 담뱃갑을 창문으로 던져 날렸는데, 바로 안 줍는 네가 더 이상하다.

    에휴, 하고 숨을 뱉으며 가방 걸이에 걸어둔 에코백을 보았다. 담배를 품은 햄토리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처연해 보였다.

    미안, 햄토리야. 담임 가고 나면 돌려줘야지.

    돌려줘야지. 분명 거기까지 생각했었는데. 집에 와서 탈탈 턴 가방 속에서 담뱃갑이 섞여 나왔다. 홍차연 모친이 구해준 집이 아파트라는 점에 감동하고 있을 때였다.

    미친, 방이 두 개나 있어! 하며 구린 화질로 사진도 팡팡 찍고 난 후였다. 감상을 끝내고 가방을 정리하는데 글쎄, 말보로 라이트가 나올 건 뭐람.

    담뱃갑 뚜껑을 열어보았다. 몇 개비 안 남은 담뱃갑 안에 라이터가 쏙 들어가 있었다.

    “와…. 이걸 어쩐담.”

    난감했다. 이걸 돌려주겠다고 학교에 가져가는 것도 문제고, 그렇다고 남의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저기, 윤수야, 안녕? 너에게 돌려줄 게 있어.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지 않을래?

    그것도 영 이상했다.

    가만히 뚜껑 열린 담뱃갑을 내려다보다가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킁킁, 그러다 얼굴을 찌푸렸다. 마른 나무 냄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한 냄새가 났다.

    뚜껑을 닫은 뒤 목재로 된 TV 장식장 서랍 안에 넣었다. 뒤에서 핸드폰이 짧게 울었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잡았다.

    [임석영: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임석영의 이름이 뜨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 물건 없어진 걸 이제야 알아차린 건가?

    메시지를 열었다. 이렇다 저렇다 내용 없이 동영상 한 개가 들어와 있었다.

    “뭐지.”

    왠지 모를 불길함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초반에 화면이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고정됐다. 고정된 동시에 내 표정이 굳는다. 화면 안에서 내 발이 까닥거리고 있었다.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가관이다.

    “이 새끼. 뭘 찍은 거야, 도대체?”

    도저히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재생을 멈췄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답장도 못 하고 있는데 말풍선 하나가 대화창으로 쏙 올라온다.

    [옥상가왕]

    일순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내줄 거 있어서 그런다. 아니 이게 그렇게 정색할 일이야…?

    임석영이 국사 시간에 보냈던 쪽지가 생각났다.

    “그게 이거였어?”

    손가락을 움직여 짤막하게 답을 적어 전송했다.

    [지워라]

    임석영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지게 지고 오면]

    “뭐지? 또라이인가?”

    허, 하는 헛숨만 내뱉다가 ‘지게나 사주고 말해.’라는 답장을 적어 보내자 임석영에게서 ‘접수’라는 답장이 왔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대화창을 그대로 껐다. 임석영이라면 왠지 진짜 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그런 걸 파나, 하는 생각에 인터넷에 들어가 ‘지게’ 두 글자를 검색했다. 국내 생산 알루미늄 지게가 4만 5천 원에 판매 중이었다.

    알루미늄 지게를 등에 이고 교문을 지나는 내가 그려졌다. 학생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학주는 애를 잡아야 돼, 말아야 돼, 하는 얼굴로 나를 보겠지.

    그리고 임석영은 운동장 어딘가에서 그런 나를 핸드폰으로 찍으며 재미있다고 깔깔 웃을 것이다.

    “번호 괜히 알려줬다.”

    뒤늦게 후회가 되는 부분이었다.

    *

    전에 살던 곳은 옥탑이었다. 그 전에 살던 곳은 홍차연네 집이었다. 할머니 반대를 무릅쓰고 얻은 옥탑은 홍차연의 공부방보다도 작았다. 그 작은 방에 부엌, 화장실이 모두 들어가 있는 거였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심지어 여름엔 온수를 안 틀어도 뜨뜻한 물이 나왔는데 겨울엔 온수를 틀어도 물이 안 나왔다. 수도관이 얼어서 그런 거였다. 탁 트인 풍경 빼고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물론 내 집 아니고, 월세 내고 사는 남의 집이었지만.

    반면 홍차연 흉내를 내며 잠깐 지내게 된 이 집은 떠나기 싫을 만큼 좋았다.

    남장하는 거 들키면 나도 홍차연도 뭐 되는 거다, 그런 생각에 심장 쫄려 빨리 이 대역 생활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오늘 이 집에 두 발을 들이고 나니 홍차연이 1년 내내 병상에 누워 있었으면 싶었다. 눈이 멀어버린 건가.

    끼익, 끼익, 그네의 쇠줄이 앞뒤로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아파트라서 그런가, 동 건물 사이에 놀이터가 있었다.

    “좋네.”

    놀이터를 은은하게 밝히는 가로등 빛마저 좋아 보였다. 고개를 올려 드문드문 불이 켜진 아파트 베란다 창을 보았다.

    옥탑에 살 때는 사람 사는 냄새가 역겹게 났다. 그러니까, 지상으로 지저분하게 얽혀 있는 전선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 밤이면 밤마다 이 집 저 집에서 터지던 비명들. 그런 것에 숨이 턱턱 막혔다.

    나뿐만 아니라 이 동네 모든 사람들이 마지못해 사는 느낌이었다. 바로 옆 동네가 부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도가 달랐다.

    쓱쓱, 모래 위를 끄는 발짓에 슬리퍼 안으로 모래가 들어온다.

    아파트 단지 안이 조용했다. 많은 세대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모습이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왜 마음이 편안한 걸까. 편안하면서도 이따금씩 코끝이 아렸다.

    몇 달만 머물다가 떠날 집이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밀고 들어왔다.

    그네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샀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어서 아르바이트생이 하는 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

    자연스레 박자를 탔다. 박자를 안 탈 수 없는 리듬이었다. 끄덕끄덕, 고개가 움직였다.

    나는 비닐봉투를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아르바이트생이 금액을 추가해 계산하고 아이스크림을 비닐봉투에 담아준 걸 보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봉투 드릴까요?

    손목에 건 검은 비닐봉투가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냈다. 슬리퍼를 끌며 집으로 향하는데 샛길에서 누군가 툭 튀어나왔다.

    샛길 앞에 가로등이 우뚝 박혀 있었고, 가로등 빛이 튀어나온 사람의 얼굴을 밝혔다. 드러난 얼굴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친, 임석영이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단이 길게 이어진 곳이라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나무 뒤에 숨어? 하며 화단을 살피는데 임석영의 걸음이 이쪽으로 향했다.

    편한 차림으로 집에서 나왔다. 압박 붕대를 했을 리도 없고 교복을 입었을 리도 없다. 나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후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임석영을 마주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여자인 걸 들키는 거다. 뒤돌아 달리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 석영!”

    남윤수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세상에. 90도로 몸을 틀었다.

    오른쪽 길에서 임석영이, 왼쪽 길에서 남윤수가 걸어왔다. 머리를 굴릴 틈이 없었다.

    탁, 손목에 건 비닐봉투를 재빨리 빼내 뒤집었다. 봉투를 뒤집어 안에 든 아이스크림 세 개를 바닥으로 다 떨어트리고 머리에 뒤집어썼다.

    검은색 비닐봉투를. 그러자 세상이 암전된다.

    “…….”

    봉투를 쓰고 고개를 숙였다. 임석영과 남윤수가 지나가면 아이스크림을 주워서 달려가자.

    두 주먹을 쥐고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한 열까지 세고 나면 가고 없지 않을까.

    1… 2… 3… 4… 5….

    그렇게 느리게 숫자를 세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예감이 좋지 않다.

    “저기요.”

    임석영 목소리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래로 내리고 있던 손을 들어 허공을 휘휘 밀어냈다.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 가라는 듯.

    “이거 떨어졌는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벌어진 봉투 틈으로 임석영의 손이 보였다. 그의 손에 아이스크림 세 개가 있었다.

    “여기요.”

    바닥에 아이스크림을 심어둔 겁니다. 다시 놓고 가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안 받으세요?”

    왠지 받을 때까지 안 갈 것 같아 두 손을 내밀었다.

    휘이잉,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봉투가 팔랑 날아가려고 해 급하게 손을 올려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됐다. 눈을 내리깔아도 아무것도 안 보였다.

    아, 젠장. 망했다, 하고 생각하며. 그냥 발을 내디뎠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고 보자며 걸음을 뗐는데 높이가 있는 턱을 밟았는지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어!”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가고, 그대로 쓰러지는 줄 알았으나 중심을 잡았다. 두 팔을 쫙 벌린 채였다. 한쪽 팔에 낯선 사람의 손이 감겨 있었다.

    홱, 팔을 잡아 빼자 임석영이 저기요, 하고 불렀다.

    “내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변조해서 내뱉었다.

    “예?”

    “그 아이스크림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쪽 봉투에서 쏟아지는 거 봤는데 무슨 소리세요.”

    “그, 아무튼, 아닙니다. 땅에 기부했으니 먹든지 버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라고 말하려는데 팔이 잡혔다. 움찔 몸을 떨자 바닥에 이렇게 막 버리시면 안 되죠, 하고 임석영이 말했다.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했다.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큼지막한 손이 손목을 휘감아 잡았다. 손가락 끝 마디는 차고 바닥은 따뜻한 이상한 온기가 손목으로 옮겨 왔다.

    임석영이 손목을 잡아 올리더니 손바닥 위에 아이스크림을 하나하나 올려주었다. 쓸데없이 친절했다. 차마 목소리는 낼 수 없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버리는 사람,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거 아니잖아요. 먹든 버리든 그건 가져오신 분이 알아서 하세요. 불법 투기 하지 마시고.”

    두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비닐봉투가 바스락거렸다.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뱉었다. 입 밖으로 흘러간 숨에 비닐봉투가 팔랑팔랑 흔들린다.

    “그냥 반상회에도 나가지 그러냐? 자기 사는 아파트라고 아끼는 거 봐.”

    저만치서 남윤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봉투 안에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이스크림 세 개를 손에 든 채 얼었다.

    자기 사는 아파트? 임석영, 이 아파트 살아?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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