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7화 (7/70)

제7화

아까 확인한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은 5분이었다. 곧 올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그와 동시에 임석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쑥 높아진 그의 얼굴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임석영이 의자에 둔 가방을 내 쪽으로 밀며 눈을 맞췄다.

“먼저 가면 죽는다.”

가방을 두고 정류장을 벗어나는 임석영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길을 꺾어 들어가며 모습을 감출 때까지.

정면을 응시하며 임석영을 기다렸다. 17번 버스는 아무도 태우지 않고 정류장을 떠났다.

반대편 정류장에 정차했다가 떠나가는 버스를 멍하니 보다가 옆에 덩그러니 놓인 임석영의 가방을 보았다. 괜히 이대로 뒀다가 또 누가 가져갈까 싶어 조심스레 가방끈을 한 손에 쥐었다.

“버스 갔어?”

몇 분 후 임석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슬리퍼를 손에 들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배차 간격 긴데.”

투덜거리며 정류장으로 들어온 임석영이 내 발 옆으로 슬리퍼를 놓고 의자에 앉았다.

“왜 너 자리에 슬리퍼가 없냐.”

육안으로 봐도 사이즈가 컸다. 발 옆에 나란히 놓인 슬리퍼를 보는데 임석영이 묻는다.

“너 설마 슬리퍼 사물함에 넣고 다녀?”

“응.”

“왜?”

“누가 훔쳐 갈까 봐.”

그 소리에 임석영이 황당하다는 듯 싱겁게 웃었다.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물건을 자주 도둑맞았다. 몇 날 며칠을 울고 보채서 엄마가 사준 자전거는 누가 자물쇠를 절단기로 끊어 훔쳐 갔다. 엄마가 어디서 얻어 온 새 운동화도 등교하면서 신발장에 넣어둔 것이 하교할 때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종종 의자에 걸어놓은 체육복도 누가 말없이 가져간 뒤 돌려주지 않았고, 책도 그랬다. 그렇게 해서 도둑맞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부재가 되고 부채가 됐다. 필요한 것은 다시 사야 했고, 살 수 없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그 결과 물건 간수를 잘하게 됐다. 될 수 있으면 다 몸에 지니고 다녔다. 몸에 지닐 수 없는 건 사물함에 넣고 다니고. 오늘은 몸에 지니고 있던 것도 뺏겼지만.

내 거 내가 챙긴다는데, 그 모습을 유난스럽게 보는 애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어쩌라고, 로 응했다. 어쩌라고. 잃어버리면 네가 사줄 거야?

익숙한 흐름에 미리 대답을 장전했다. 어쩌라고, 임석영 네가 사줄 거야?

“불안하면 앞으로 내 자리에 놓고 다녀.”

예상외의 말이 튀어나온다. 말없이 쳐다보자 임석영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춘다.

“그럼 아무도 안 훔쳐 가.”

아이고, 좋겠다. 너 건드는 애들 없어서.

“그래.”

속마음은 삐뚤어졌지만, 말은 착하게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있자 임석영이 발을 뻗어 슬리퍼를 툭툭 밀었다.

“안 신어?”

슬리퍼 등에 임석영의 이름이 써져 있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가져온 것 같았는데, 남의 슬리퍼를 신기에는 내 양말이 너무 더러웠다.

“양말이 더러워서.”

“뭐, 그럼 그러고 가게?”

그의 시선이 내 발을 향한다.

“신어, 그냥.”

양말이 잿빛이어도 너무 잿빛이었다. 이 더러운 양말로 남의 슬리퍼를 신는 게 괜히 미안해 망설인 건데, 본인이 신으라고 하니.

“고마워.”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일 돌려줄게.”

“안 줘도 돼.”

“왜, 그럼 너 내일….”

“새로 사면 돼.”

“왜 사? 빡빡 닦아서 줄게.”

임석영이 조용히 내 발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얼굴을 굳히고 진지한 투로 말한다.

“가져오면 죽을 줄 알아라.”

“…응.”

괜히 민망해져 발가락을 오므리고 버스가 오는 방향을 살폈다.

정류장에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어색한데, 같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진땀이 흘렀다.

학교에서 늦게 나온 탓에 우르르 버스에 올라탈 아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나란히 앉아서 가지는 않겠지, 하며 민망한 상황을 상상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머니에서 꺼내본 핸드폰에 할무니, 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힐긋, 임석영의 눈치를 살피고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어, 할머니.”

― 어묵 먹었어?

다짜고짜 어묵의 안부를 물으시는 건가요.

“응. 어제 먹었어.”

― 다 먹었으면 또 가져가. 너무 조금 준 거 같아서 마음에 걸려.

조금이라니요. 김밥 세 줄이 들어가고도 남는 용기였는데요.

“할머니, 많이 줬어. 그것도 충분히 많아.”

― 그게 많아? 누리, 너도 요즘 다이어트인가 뭔가, 그런 거 하는 겨?

“할머니, 내가 언제 그런 거 하는 거 봤어?”

― 그러니까! 너 누리 맞냐? 그게 많다니. 이해가 안 간다. 예전에는 부침개도 앉은 자리에서 열 장씩 먹던 애가.

“내가 언제 앉은 자리에서 부침개를 열 장씩 먹었어. 다섯 장 먹었겠지.”

―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같아. 두 배나 차이 나는데.”

― 그래. 들어가.

뚝, 전화가 끊겼다. 아무리 내 할머니라지만 황당했다. 할 말 끝났다 이건가.

멍하니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 액정을 보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괜히 멋쩍어져 목을 가다듬고 힐긋 눈을 돌렸다. 임석영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랑 친한가 보다.”

불쑥, 옆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아.”

할머니랑 살아서, 라고 하려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보기 좋다.”

“아…. 고마워.”

보기 좋다니. 뭔가 따뜻한 말에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져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버스는 왜 안 와, 하는 말을 작게 구시렁거리며.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알람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석영보다 먼저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너 뭐 누구한테 원수졌냐?”

도로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전거 안장 도둑맞은 애들은 봤어도 신발 도둑맞은 애는 처음 봐서.”

“아, 그게….”

가방을 챙겨 든 임석영이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누군데?”

임석영의 기다란 눈이 흐트러진 매무새를 훑고 지나간다. 말없이 눈만 끔벅이자 임석영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도둑질한 새끼 누군지 몰라?”

마음 같아서는 강은호! 그 새끼가 가방도 뺏어 가고 신발도 뺏어 갔다! 가서 죽여주라!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이 일이 커질 것 같았다.

혹여 임석영이 강은호한테 야, 너 전학생 가방 뺏었냐? 라고 말이라도 하면 강은호는 또 나를 찾아와 시비를 걸겠지. 생각만으로도 암담했다. 최대한 조용히 다니는 게 여러모로 안전하다.

“응. 알면 진작 신고해서 콩밥 먹였지.”

임석영이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다 치자.”

그 말이 왠지 다음번엔 그렇게 안 쳐준다는 말처럼 들려 고개가 기울어졌다.

*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교복을 손빨래했다. 셔츠에 빨랫비누를 묻혀 빡빡 힘주어 비볐다. 찬물에 손이 빨갛게 얼었다. 졸졸졸 흘러간 비눗물이 수채통에 회오리치듯 빨려 들어간다.

꽈배기처럼 꼰 세탁물을 비틀어 짠 뒤 반듯하게 펴서 탈탈 털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탁물에 남은 물기를 최소화하고자 인간 탈수기처럼 세탁물을 사정없이 흔들어 털었다.

건조대에 세탁한 교복을 하나하나 널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책가방은 중고나라에 팔았다. 가지고 있는 가방이라고는 여기저기 이사 다닐 때 썼던 이민 가방과 탁수반점 사장님이 여행 갔다가 사 온 중저가 브랜드의 미니 크로스백, 나의 데일리 백인 에코백이 전부였다.

“나 내일 뭐 메고 가지.”

천장을 바라보는데 먹구름이 드리우는 듯 어둡기만 했다. 그러다 불쑥 천장으로 임석영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정류장에 앉아서 울고 있자 교실로 돌아가서 슬리퍼를 가져오던 모습.

“같은 반 친구라고 챙겨주는 거 보면 착한 놈 같은데.”

화장실에서나 옥상에서 마주친 모습을 보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임석영.”

멀뚱히 천장을 쳐다보며 헷갈리는 미지의 인물에 대해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컨버스화를 신고 에코백을 들었다. 가방은 백팩이 없는 관계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민 가방을 끌고 갈 수는 없잖아.

이제 내가 가진 홍차연의 것이라고는 교복이 전부였다. 사모님이 생활비에 쓰라며 봉투를 주긴 했지만 그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을 생각으로 서랍에 넣어두었다. 왠지 이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봉투에 손을 대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털레털레 길을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상가 유리에 비친 모습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머리까지 이렇게 자르니 영락없는 차연이야.”

홍차연 모친이 나를 보고 한 말이었다.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럴싸하긴 했다. 생김새나 키, 머리 스타일 같은 게.

그런데 홍차연 특유의 귀티가 전혀 없었다. 그건 내가 홍차연이 아니니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꼬질꼬질한 신발이며 햄스터가 그려진 에코백. 이건 홍차연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절대 몸에 걸칠 일 없을 것들이었다. 홍차연이 내가 자기 흉내를 내면서 이런 꼴로 다니는 걸 알게 된다면, 날 죽이려고 들겠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징,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머니에서 꺼내 본 핸드폰 액정에 홍차연의 모친이 보낸 메시지가 떴다. 모르는 주소가 들어와 있었다. 도로명 주소를 보아하니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 같았다. 어디지, 생각할 무렵 메시지가 뒤이어 도착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렴. 현관문 비밀번호는 네 핸드폰 뒷자리로 했다.]

학교 근처로 구해준다는 집을 드디어 구한 모양이었다. 새 집이라니, 당분간 사는 것인데도 괜히 설레었다. 그러다가 남의 흉내나 내고 있는데 설레었다는 사실에 빠른 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학교나 가자.”

바람에 흐트러지는 앞머리를 꾹 눌러 붙이며 걸음을 옮겼다.

*

“너 왜 가방이 없어?”

임석영이 턱을 괴고 물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에코백을 눈짓했다. 여기 가방 안 보이냐는 듯. 그러자 임석영의 얼굴이 굳는다.

“오늘 그거 들고 왔다고?”

“응.”

의자를 뒤로 빼고 앉았다. 턱을 괸 임석영이 어깨까지 틀고 앉아 햄토리가 그려진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 왜. 이건 가방 아니냐. 여기 안에 필통, 노트 다 들었는데.

“교문에서 안 걸렸어?”

“안 잡던데.”

심드렁하게 답하고 가방에서 필통을 꺼냈다.

“내일은 백팩 메고 와. 안 그럼 너 교문에서 잡힌다.”

…그런 거 없는데요.

책 넣으면 그게 책가방이지. 에코백 들고 왔다고 교문에서 잡히면 그건 좀 억울한 거라고.

인중을 쓱쓱 긁다가 걸려 있는 가방을 들었다. 에코백의 끈을 벌려 잡고 각 끈을 한 팔에 하나씩 끼워 넣었다. 내가 하는 짓을 말없이 보던 임석영의 눈썹이 점점 일그러진다.

“너 뭐 하냐?”

에코백을 등에 메고 임석영을 보았다.

“어때. 이러면 좀 백팩 같을까.”

임석영이 손으로 입을 턱 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뭐 그런 표정인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아 엷게 미소했다.

임석영이 일어나더니 구부린 가운뎃손가락을 튕겨내며 내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아! 왜 때려?”

이마를 문지르며 인상을 쓰고 쏘아보자 임석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왜? 그냥 아예 지게를 지고 오지.”

“지게?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인 줄 아나.”

내 말에 임석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야, 에코백 이렇게 메는 건 지금 시대에 가능하고?”

“안 될 건 뭐야.”

내 말에 임석영이 고개를 숙이더니 이마를 문질렀다.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웃고 있는 낯이 보였다. 머리를 쓸어 올린 임석영이 얼굴에 어린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그럼 내일 그러고 학교 오든가. 잘하면 인터넷에 네 사진 올라올 수도 있겠다. 올라오면 내가 추천 정도는 눌러줄게.”

안 된다는 말을 참 거창하게도 하네.

양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끈을 내렸다. 벌어진 끈을 붙여 잡고 가방 걸이에 걸었다.

어차피 홍차연 대역이 끝나면 백팩 같은 건 쓸 일이 없다. 학교만 잘 나오면 되지,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머리를 굴리며 계속 고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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