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화 (6/70)
  • 제6화

    퍼뜩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옥상 난간 앞에 세 명의 남자애들이 있었다. 남윤수와 김찬영이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고, 그 옆에 임석영이 쪼그려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사람 있는 줄 알면 저렇게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겠냐.”

    남윤수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한쪽 귀에 남은 이어폰 줄을 확 당겨 뺐다. 그러곤 잽싸게 책상에서 내려왔다.

    “뭐, 뭐야?”

    내 말에 임석영이 시시하다는 얼굴로 핸드폰을 내렸다.

    “뭐가?”

    엄지를 움직여 액정을 몇 번 두드린 임석영이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핸드폰을 손과 함께 주머니에 밀어 넣은 그가 나를 보았다.

    “아, 아니. 옥상에 아무도 없었는데….”

    “옥상 너만 쓰냐? 올 수도 있지.”

    “그런 게 아니라….”

    망할 수치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너 노래 취향 한번 특이하다.”

    “아니, 그리고 또 노래를 잘해. 방금 겁나 고음이었어.”

    앞말은 임석영이, 뒷말은 남윤수가 했다. 얼굴이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주머니에 엠피스리를 찔러 넣고 그래, 좋은 시간 보내렴, 하고 옥상을 나섰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데 문 너머에서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는 외로워, 소리가 들리는 게, 남윤수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망할….”

    입술을 휘어 내린 얼굴이 절로 울상이 되었다. 나야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어서 아무렇지 않았지만, 분명 반주 없이 내 쌩 목소리를 듣는 건 우스웠을 것이다.

    거기다 가사도 예쁜, 나는, 이런 식이었으니. 심지어 1절을 다 부르지 않았던가.

    수치심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아흑, 하는 소리를 내며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상처 받은 비련의 주인공처럼.

    *

    수업 시간, 교과서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있는데 쪽지가 날아왔다.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석영이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운 채 턱을 괴고 나를 봤다.

    시선을 거두고 네모나게 접힌 종이를 보았다. 노트에서 찢은 듯 테두리의 결이 일정치 않았다. 형광펜을 놓고 쪽지를 폈다.

    너 번호 뭐야?

    두 손에 쪽지를 든 채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임석영이 답을 적어 보내라는 듯 눈짓을 보낸다.

    “그건 왜.”

    작은 목소리로 묻자 임석영이 홱 고개를 돌리고 교과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기, 맨 뒷자리.”

    선생이 부르는 소리에 정면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맨 뒷자리가 나인 듯 선생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수업 시간에 떠들지 말자.”

    “…네.”

    설마 왜, 라고 그 작게 낸 목소리를 들은 건가.

    지목당한 것에 괜히 주눅이 들어 고개를 낮게 숙이자 임석영이 쑥 손을 뻗어 책상 끄트머리에 쪽지를 놓았다.

    국사 쌤 귀 대박 좋아

    그러면 네가 쪽지를 안 보내면 되겠네. 접힌 자국을 따라 접은 쪽지를 교과서 옆으로 치웠다.

    형광펜을 들고 밑줄을 긋는데, 얼마 안 있어 임석영의 손이 다시 책상 끄트머리를 다녀간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돌려 흘기자 임석영이 손에 든 연필을 빙글 돌리며 턱을 들었다. 빨리 읽고 답하라는 듯. 쪽지를 폈다.

    번호 뭐냐고 핸드폰 없어?

    필통을 열고 연필을 꺼내 들었다.

    임석영 자리로 쪽지를 훅 던져 날렸다. 공기의 흐름을 잘못 탔는지 그의 자리에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임석영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허리를 숙여 쪽지를 주웠다. 그의 손이 슥슥 움직이고 재빠르게 책상을 다녀간다.

    보내줄 거 있어서 그런다. 아니 이게 그렇게 정색할 일이야…?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안 알려주고 싶은데. 저번에 대답 성의 없이 했다고 서운해하던 임석영이 아니던가. 알려주기 싫다고 하면 분명 이번에도 상처 받은 티를 낼 테다.

    저번에 보니 멱살 잡은 양아치 놈도 이기는 것 같던데. 괜히 임석영 눈 밖에 나서 좋을 일도 없을 것 같고. 망설이다가 번호를 적어 보냈다.

    쪽지를 확인한 임석영이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책상 아래에 두고 번호를 찍어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종료를 눌러 부재중을 남기려는 것 같았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내 주머니에서.

    진동으로 해놨던 것 같은데. 어째서 벨이 울리는 것인지. 빠르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종료를 눌렀다. 국사 쌤 귀 대박 좋다고 했는데, 이건 대박 좋은 게 아니어도 전부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교과서를 향해 있던 얼굴들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하고, 그것은 선생도 마찬가지고, 나를 보지 않는 사람은 옆에 앉은 임석영뿐이었다.

    나한테 전화 건 새끼.

    “가져와.”

    선생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핸드폰.”

    임석영, 개새끼야.

    *

    교무실에 들러 수업 시간 학생의 본분에 대한 선생님의 훈계를 10여 분 듣고 나서야 핸드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괜히 집에 가는 시간만 늦어졌네.

    툴툴거리며 교실로 들어가 가방을 챙겼다. 임석영은 진작 갔는지 책상이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개스끼.”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반듯하게 놓여 있는 임석영의 책상 다리를 툭 치고는 교실을 벗어났다.

    교문에서 나와 골목을 쭉 따라 내려가면 큰길이 나왔다. 2층 건물의 패스트푸드점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오락실이 하나 나왔고, 그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험상궂게 생긴 애들이 많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게 바로 뒤에 있는 오락실 때문이었다. 하필 오락실이 정류장 바로 뒤에 있을 건 뭐람.

    “집에 가냐?”

    정류장에 가만 서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팔로 목을 감으며 머리를 감쌌다. 헤드록을 걸듯 겨드랑이 사이에 머리를 끼우고 꾹 눌러왔다.

    “어어! 누구세요?”

    갑작스러운 접촉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빼려고 하자 팔을 두른 놈이 더 강한 힘으로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잡힌 채 눈을 올려 보자 저번에 셔츠 벗으라며 멱살 잡아 올리던 놈이었다. 이름이 강은호랬나.

    “어, 이거 좀 놓고….”

    두 손으로 팔을 밀어내자 강은호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놓아준다.

    “그냥 인사한 건데 질색을 하네.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하냐?”

    “아니….”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보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20분, 저거 진짜냐고. 고장 난 거 아니고, 정말 20분 뒤에 오는 거냐고. 한숨을 꾹 삼키며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렸다.

    누가 봐도 너한테 쫀 모양새잖아. 이만 했으면 그냥 가주라.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갈 생각 없어 보이는 강은호가 말을 걸어왔다.

    “나 교복 새로 샀어. 누가 더럽게 만들어 가지고.”

    험악한 분위기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입술을 꾹 말아 물고 강은호가 입고 있는 교복을 살폈다.

    누가 봐도 새 옷은 아닌데. 어디서 개구라야.

    “아, 그런데 새 교복을 사고 봤더니 조금 억울하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네가 사줘야 하는 거 같은데.”

    입은 흔적이 역력한 셔츠를 보다가 눈을 올렸다.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고 내려다보는 게 날강도가 따로 없다. 강은호한테 줄 돈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지만, 있어도 안 줬을 거다. 입술을 꿈틀대다가 입을 열었다.

    “원래 입던 거 같은데….”

    두툼한 주먹이 어깨로 꽂혔다. 주먹질에 상체가 흔들리며 걸음이 뒤로 밀렸다. 억, 소리 나게 아픈 타격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강은호를 보았다.

    “어! 왜, 왜 그래?”

    혹여 가슴팍이라도 때릴까, 잔뜩 겁먹은 얼굴로 가방을 앞으로 둘러메고 방어했다.

    “시발, 누구를 거지로 아나. 원래 입던 거? 그거 냄새나서 버렸거든?”

    “어, 아니, 그 일은 정말 미안해.”

    “남의 지갑 털어놓고, 미안하다고 입 싹 닦으면 끝이냐?”

    “지갑? 나 지갑 안 털었는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강은호가 헛웃음을 터트린다.

    “이거 순 양아치 새끼 아니야. 내가 너 때문에 교복을 새로 사 입었잖아. 왜 말을 한 번에 못 알아 처먹냐.”

    중학교 때는 남자애들이랑 키가 엇비슷하고 덩치 큰 애들 아니면 체구도 고만고만해서 이렇게 쫄 일이 없었는데, 강은호는 키가 크고 몸의 골격이 커서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됐다.

    그냥 스쳐 가는 거면 모를까, 이렇게 대놓고 험악하게 구는데, 심장이 안 쪼그라들고 버티나.

    이 모든 상황이 언짢은 듯한 강은호가 쯧, 혀를 찼다.

    “양심에 찔려서 때리겠냐고.”

    양심은 있냐. 양심 있는 새끼가 사람 때릴 생각을 하고.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강은호가 눈을 흘긴다.

    “계산은 똑바로 하자.”

    삐딱하게 선 강은호의 눈이 가방을 훑는 게 보였다. 홍차연 모친이 교복을 사주면서 함께 사준 것이 가방과 신발이었다. 아무리 홍차연 대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련님 이미지가 있는데 좋은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냐며 챙겨준 거였다.

    정확한 금액은 몰라도 아마 꽤나 값이 나갈 것이다. 그의 눈이 기분 나쁘게 번뜩인다.

    “나는 교복 값 받아야겠으니까.”

    “…….”

    “말 씹는 게 아주 습관이다?”

    “나 돈 없어.”

    “아, 없어?”

    “어. 진짜 없는데….”

    “그럼 이거라도 내놔, 새끼야.”

    강은호가 앞으로 둘러멘 가방을 툭 쳤다. 이거 사모님이 사준 건데, 홍차연 이름 생각해서. 이거, 이렇게 순순히 뺏겨도 되는 건가.

    가방끈을 꾹 잡고 안 놓자 강은호가 놔라, 하고 엄한 목소리를 뱉었다.

    홍차연 대역만 아니었으면 경찰에 신고부터 했을 텐데, 몸을 사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상황 참 거지 같네, 생각하며 끈을 놨다. 홱, 가방이 강은호의 손에 딸려 갔다.

    “돈이 없으면 알아서 내줄 생각을 해야지. 꼭 내가 이렇게 먼저 말로 해야겠냐? 눈치라는 것 좀 달고 살아라.”

    일부러 눈도 안 맞추고 강은호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신발을 툭툭 차며 건드렸다. 고개를 올려다보자 강은호가 가만히 눈을 맞추다 입을 열었다.

    “안 벗고 뭐 해?”

    *

    정류장에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강은호가 신발도 가져갔다. 도둑놈이 따로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괜히 문제 생길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난 그럼 뭐 신고 가, 하고 말하자 길에 떨어져 있는 몽쉘 박스 두 개를 발로 툭 차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신고 가면 되겠네, 하면서. 속에서 열불이 났다.

    너무 황당하고 허탈해서 눈물도 안 났다. 시발. 욕만 나올 뿐.

    버스 정류장에 앉아 몇 발자국에 더러워진 양말을 내려다보았다. 가방이 없는 건 그렇다 치는데, 신발이 없으니 다 잃은 느낌이었다. 있어야 할 게 없는 게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없는 건 익숙한데, 그걸 드러내는 건 또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내가 어려서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그랬다.

    “거지 같네.”

    잿빛이 된 양말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강은호와 마주 보고 있을 땐 눈물도 안 났는데, 엄마 생각을 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개를 떨어트리자마자 교복 바지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이 교복 바지에 스며들고, 꾹 다문 입에 목이 멘다.

    팔을 올려 눈을 꾹 눌렀다. 재킷 소매로 눈물을 훔쳐 닦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팔을 내리고 돌아보았다. 정류장 의자 끄트머리에 앉은 임석영이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해가 넘어간 어두운 풍경, 정류장엔 둘뿐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 가까워지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마주 보기만 할 뿐,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꼴이 말이 아닌지라 내가 먼저 눈을 돌렸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잿빛이 된 양말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총체적 난국이라 뭐부터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네.”

    임석영의 목소리에 왼손의 엄지손톱을 문지르던 오른손이 미끄러진다.

    “너 17번 타지?”

    시선을 떨어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말고 기다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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