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82화 (외전 완결) (82/82)

82. 외전 5화. 알고, 사랑하고, 결혼한 후- (完)

“그래서 이 머나먼 미국까지 따라왔다고?”

“완전히 온 건 아니지…. 그냥 와 본 거야. 너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고.”

체리목 테이블에 마주 앉은 다정과 부연. 고풍스러운 다이닝 룸 너머의 거실. 그 거실 통창 밖으로 성후와 연석의 등이 나란히 보였다. 연석도 성후도 심각해 보였다.

“어때, 결혼 생활.”

“음…. 밥 먹고 왔지?”

“응.”

“술 한잔, 콜?”

부연이 활짝 웃는다.

“좋지.”

간단한 술상을 준비하며, 다정은 부연이 안 본 새 갑자기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제 나이를 찾은 거겠지만 말이다. 조금 철은 없어 보여도 그런 부연이 귀여웠던 다정은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부연은 차분히 앉아 영문 소설을 읽고 있었다.

“뭐 봐?”

다정이 묻자 가방에 쏙 넣으며 하하 웃는다.

“그냥.”

저 봐. 이상해졌어.

주 안주인 마늘 베이컨 볶음에 토마토를 곁들였다.

“와인? 양주?”

다정의 물음에 부연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다.

“왜? 너 와인 좋아하지 않았어?”

부려 놓은 허세가 너무 많아 다 기억나지 않는 그녀다.

“소주는 없니?”

예상치 못한 반문이 돌아오자 다정이 키득거렸다. 이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고른 뒤 대답했다.

“아쉽게도.”

“흠흠.”

부연도 어색한 헛기침을 하더니 가방에서 소주 두 병을 꺼냈다.

“헉. 그 가방 뭐야? 도라에몽 주머니야?”

튜브 고추장만큼이나 반가운 소주를 바라보며 다정이 말했다.

“빈손으로 오기가 그래서. 네가 좀 마시잖아. 술.”

“크~. 센스 미쳤다!”

주방 상부 장을 열어보니 소주잔이 없었다. 당연하다. 산 역사가 없으니. 다음엔 꼭 사둬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제일 작은 유리 컵을 꺼냈다. 각자 앞에 두고는 말한다.

“조금씩 따라서 아껴 먹자.”

“큭큭큭.”

부연은 웃음이 났다. 정녕 재벌가에 시집간 여자가 맞는지. 일도 계속하고 있다 들었는데. 변함없는 다정이 신기했고 또 대단하게 느껴졌다. 제 중심을 똑바로 잡고 살아가는 모습이, 그래, 가장 부러웠다.

“아이 계획 물어봐도 돼?”

곳곳에 설치된 지뢰를 피하는 것처럼 부연은 매사 조심스러웠다. 다정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뭐든 하고 싶은 말 다 해!”

원래도 자존감이 낮다는 걸 알았지만 부쩍 기죽어 보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오래된 사이라 편하긴 하다.”

“그 샤랄라 원피스는 불편하지 않겠어? 옷 줄까?”

“그럼 고맙지.”

다정이 가지고 온 것은 웬 꽃무늬 원피스였다. 일명 냉장고 원단의.

“헉.”

“우리 할머니가 입으셨던 건데, 미국 오기 전에 챙겨 왔어.”

“왜…? 할머니를 추억하고 싶어서?”

“아니?”

다정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편해서.”

“아. 큭큭큭.”

“큭큭큭.”

두 여자는 마주 보며 웃었다.

“금방 갈아입고 올게.”

“나도 샤워만.”

다시 주방에 모였을 땐 다정은 핑크색 배경의 꽃무늬 원피스를, 부연은 민트색 배경의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다시 마주 보며 키들거린다. 꼭 고교 시절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만 같았다.

“다시 원점이네. 임신 계획 궁금해?”

“그냥 결혼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이.”

“우선 성후 씨가 아이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어.”

이유는 짐작되었다. 성후에게 들었던 그의 유년 시절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사랑 없이 결혼한 부모님 아래 태어난 자식의 죄 아닌 죄.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생모는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고 뒤늦게 성후를 돌봤던 부친은 사랑을 주는 법을 몰랐다.

결핍과 불만이 지층처럼 한 겹 한 겹 쌓여 사춘기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대뜸 재혼을 통보하셨다. 새 가족을 맞이하는 과정이 험난했다. 지금의 새엄마에게 해선 안 되는 모진 말들을 퍼붓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기도 했었다고. 해외를 방랑하던 학창 시절도 성격이 남달라 트러블의 연속이었다 들었다.

돌파구라면 피아노와 괴짜 스승님.

그 역시 겨우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뿐일 터다. 그래서 거기에 매달렸더랬다. 부품 하나가 빠진 것처럼 절그럭절그럭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던 미숙한 삶.

어린 시절, 딱히 행복했던 적이 없어서 섣불리 아이를 갖잔 얘기가 어려웠으리라.

꼬집어 말하자면 자신감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그래도 막, 대를 잇고 해야 하지 않나? 드라마 보면 재벌들이 더 아들에 집착하는 거 같던데. 후계자, 후계자, 하면서.”

남편의 유년 시절을 구구절절 얘기할 필욘 없다.

“근본적으로 애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기도.”

없는 말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는 거 같지 않았다.

수긍한 듯 부연이 고개를 주억이며 묻는다.

“너는?”

또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자신의 기호. 그저 성후가 원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겠다는 마음이 전부였는데.

제 마음 밑바닥까지 내려가 스스로도 몰랐던 무의식을 들여다보니 신기하게도 보였다.

“나는 애가 좋아.”

“나도 좋아해, 애는. 노력하지 않아도 귀엽잖아.”

그러고 보니 부연은 유난이 환아와 잘 지냈었다. 다정이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지만 아직 내 삶을 포기할 용기도 없는 거 같아.”

“피임해?”

배란일엔 최대한 했다. 늘상 콘돔이 찢어져 중간중간 교체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감수하고서.

“하지.”

“그렇구나.”

“넌… 연석 씨랑 만나기로 한 거야?”

유리잔을 매만지는 부연의 손길에서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

“확신이 없구나?”

발끈한 부연이 대꾸했다.

“마음은 확신해! 그러니까 여기까지 따라왔지….”

“그럼? 뭐가 문제야?”

“롱디가 자신 없는 거지, 뭐. 내 인생에 그런 대단한 사랑…, 절절한 사랑…, 거기에 나를 걸기엔 나이도 적지 않아. 이번에 삐끗하면 올드미스로 늙어야 해. 아니, 그냥 올드일지도 모르지.”

“연석 씨 마음에 대한 건?”

부연의 속에서 연석의 고백이 상기되었다.

‘당신이 좋아요. 역시나 눈에 밟혔습니다. 이제라도 괜찮다면, 시작하고 싶어요.’

곧고 깨끗한 눈빛은 진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변심에 대한 두려움이 부연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너, 미국에 올래?”

“미국?”

“영어도 해야 하고, Nclex 자격증 따는 게 좀 빡세긴 한데.”

“너는 1년 만에 땄잖아.”

다정이 입을 꾹 다물다 다시 대꾸했다.

“한국 간호사 출신이면 취득률 80%라던걸?”

“그걸 1년 만에 따는 사람은 몇 프로일까,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해. 설령 몇 년 걸리면 어때. 내가 도와줄게.”

“하숙이라도 시켜주겠다는 거니?”

부연이 픽 웃었다.

“네가 괜찮다면.”

“헉. 더는 날 뻔뻔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줘.”

말과는 반대로 두근두근. 몹쓸 기대로 부연의 가슴이 뛰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 집 말고. 연석 씨 집에. 가르니크에서 제공하는 아파트가 있거든. 거기서 같이 지내면서 공부하면 되지. 네가 필요할 때마다 내가 도와줄게. 단, 전적으로 나를 믿거나 연석 씨한테 의지하는 건 안 돼.”

“당연하지!”

“신중하게 생각해 봐. 연석 씨랑 의논도 해보고. 나도 네가 여기 오면 너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 물론, 막, 당장 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여기도 마찬가지야. 인력이 부족해. 미국이라고 처우가 훨씬 좋을 것 같았지만, 듣던 것과는 달라서 실망할 수도 있어. 인종 차별도 없다 말할 수 없고. 하지만. 모든 바닥은 녹록지 않잖아. 시작은 더욱 그렇지.”

“흐응….”

그때 거실 유리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돌아왔다. 저들은 무슨 얘기를 그토록 오래 한 걸까.

성후가 다가와 다정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허리를 낮추고서 상냥하게 말한다.

“내일 출근해야지?”

민폐를 끼쳤단 생각에 부연이 황급히 다정에게 말했다.

“맞다. 어서 들어가서 자!”

아직 잘 시간이 아닌데. 다정은 성후를 흘긋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일 또 얘기하자. 연석 씨한테 바통 터치!”

“네. 사모님.”

“아, 증말!”

‘사모님’ 소리에 질색하는 다정을 보며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부부는 침실로 들어와 나란히 누웠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서늘한 이불을 다정의 배에 덮어주는 성후다. 자궁은 따뜻해야 해. 그가 늘 하던 말이었다.

“아이… 가지고 싶어요?”

대뜸 물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음. 조그마한 녀석이 당신을 빼앗아간다 생각하면 별론데?”

‘녀석’.

“만약 딸이라면요…?”

갑자기 성후가 눈을 크게 떴다. 얼굴도 살짝 상기되어, 아내를 획 바라보았다.

“그것도 온다정을 쏙 빼닮은?”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대부분 첫 딸은 부친 쪽을 닮더랬다. 다정이 기억하는 장녀들은 주로 아빠와 붕어빵이었다. 그렇다고 100%는 아니니 성후의 기대를 꺾고 싶지 않았다.

“네. 제 주니어.”

성후가 침음을 삼킨 뒤 대답했다.

“…당장 갖고 싶어.”

단숨에 다정의 위를 지배한다.

“엇, 잠깐만. 잠깐만요!”

갑작스레 제 목으로 파고드는 성후. 다정은 그런 남편의 등을 거세게 때렸다. 찰싹찰싹. 맨등이 닿는 소리가 침실을 가득 메웠다. 그 매질에도 성후의 집중력은 흐려지지 않았다. 이번엔 목소리로 호소했다.

“여보, 날 봐요.”

침착한 다정의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으로 향하던 입술이 멈췄다. 하지만 선수는 성후가 먼저 쳤다.

“당신은 농담에 진담을 섞는 타입이 아니야.”

다정이 그 의미를 곱씹으며 성후를 직시했다.

“당신 입에서 그런 물음이 나왔다는 건, 꽤 진지하다는 말이지.”

맞다.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묻는 마음은 묵직했었다.

성후는 다정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아내를 아이 안듯 안고서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나가는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당신의 눈빛이 늘 가슴에 박혔어.”

달빛이 비치는 침실. 성후의 시선 밖으로는 수영장 물결이 반짝거렸다. 그보다 더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아내를 안은 채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작고 예쁜 것들보다 내겐 내 아내의 삶이 훨씬 중하지. 사랑해. 그래서 존중해. 당신 몸을 빌려 태어날 존재에 대해 먼저 부담 주고 싶지 않았거든.”

은근히 2세 소식을 물어오는 아버지에게 번번이, 그리고 은밀히, 쓴소리했던 성후였다.

“그렇지만…”

“모든 결정엔 걱정과 책임이 따른다는 거 알아. 변수도.”

“성후 씨….”

“걱정과 책임은 내가 짊어질게. 다정이 너는… 좋은 것만 보고 생각해. 나 믿고.”

믿는다. 언제나 믿고 믿고 또 믿는다.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고, 그와 결혼한 후- 하루가 꽉 차게 기쁘고 행복했다. 달았다. 꿀도 남편처럼 달지는 않을 터다.

“끌렸다면 덤벼들자.”

그리고 미치는 거야.

“내가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정이 환히 웃는다.

“좋아요.”

하나가 될 듯 서로의 몸에 파고들며, 부부는 다음 행복이 기다릴 미지의 섬으로 항로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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