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80화 (80/82)

80. 외전 3화. 그 부부의 절륜한 사생활 (1)

다정은 부기장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기분이 상했지만, 기분과 상황은 별개였다.

“비켜주세요. 지금 이 환자 급해요.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그러나 다정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그쪽이 책임질 겁니까?”

당황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부기장은 다정이 승객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따라서 친절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가 이대로 죽기라도 한다면….

야속한 말에 이목이 쏠렸다.

“그럼 말해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결국 이분이 위독해지면 그 책임도 그쪽이 지실 건지.”

이럴 때는 세게 나가야 했다. 친절하게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그건…!”

경험 없는 부기장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도와드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성후가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유명 피아니스트에 쏠렸다.

그러자, 그와 결혼했다던 간호사를 뒤늦게 알아본 눈치다. 상대하는 부부가 유명 인사라는 것을 깨달은 부기장이 침음을 삼켰다. 이 또한 어찌 헤쳐나가야 하는지 막막한 눈치다.

“응급 처치라도 사고가 난다면 그에 관한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쪽은 숨은 책임자 부릅시다.”

비행기가 정해진 루트 위에서 자동으로 운행된다는 걸, 요즘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기장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부기장을 이곳에 던져둔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정은 재빨리 사내를 앉혔다.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턱을 밀어 올리고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입에서 점액과 피가 흘러나왔다. 성후가 제 손수건을 내밀자, 다정이 노련하게 목과 주변에 범람한 애액과 피를 닦았다. 망설임 없이 노련하게.

다음으로 어깨를 강하게 쾅 쳤다.

남자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단숨에 얼굴색이 돌아왔다. 덩달아 안절부절못하던 승객들도 크게 환호했다. 승무원들은 안도의 눈물을 지으면서도 흥분한 승객들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역시 당신은….”

성후는 피와 타액으로 젖은 다정의 블라우스 위로 자신의 재킷을 덮어주며 말했다.

“멋있어.”

*

서쪽에서부터 해가 기울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서서히 깔리는 노을의 빨간 그림자.

미국에 도착한 것이 실감 났다.

주택가이긴 하지만 입구 경비가 살벌한 편이었다. 유명 배우나 정계 인사, 성공한 사업가 등이 모여 사는 단지였으니 그럴 만했다.

짧게 잘 다듬어진 초록색 잔디가 깔린 집들 사이로 부부가 탄 택시가 진입했다. 기사는 멋진 곳에 사는 군요, 같은 말을 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Thank you.”

두둑한 팁도 잊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가 섭섭했는데…, 막상 오니까 좋네요. 집이라는 건.”

담벼락은 따로 없는 집이었다. 정문이라는 것을 겨우 구분해주는 석재 기둥 사이에 서서 다정이 말했다.

짧은 정원을 따라 노란색 전구가 켜져 있어 쓸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현관에 도착하자 커다란 체구의 경호원이 짧게 묵례했다.

“안녕하세요?”

상대는 백인의 피가 조금 섞인 흑인이었다. 그래선지 아주 새까맣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을 땐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한국어를 하진 못했다.

그런데도 다정은 늘 꿋꿋하게 한국말로 인사했다.

경비가 삼엄한 주택 단지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러므로 침입하려는 자들도 많을 거라며 성후가 고용한 자였다.

못마땅해하는 다정에게 경호원이 아닌 집사라고 말했다. 당연히 의심했지만, 이 덩치 좋은 호남형 ‘집사’는 잔디를 깎거나 뒷마당 수영장 청소도 도맡아 해주었다. 진짜 집사처럼. 열심히도 했다.

우습게도 그런 그가 가장 과민하게 반응할 때는 옆집 개 잭이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낼 때지만 말이다.

“아녕하세여?”

며칠 만에 본 경호원…, 아니, 집사가 어눌한 발음으로 화답했다. 다정은 기뻐하며 집사에게 하이파이브했다. 짧은 영어로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순간 성후의 팔에 목덜미가 감겼다.

“그만.”

그리고 집안으로 끌려가며 집사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주었다. 집사가 큭큭 웃는다.

“다음에는 한국에 좀 더 오래 머물다 오고 싶어요.”

“동감이야.”

“그런데 성후 씨는.”

“응?”

성후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며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괜히 그윽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말이 짧아졌죠?”

“아.”

손목시계를 선반에 올리며 다정에게 다가오는 성후다. 다정이 발을 뒤로 물리며 손을 올렸다. 제지의 수신호다.

“거기 서서 말해요.”

“음.”

우뚝 자리에 선 채로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원래는 할 때가 시작이었지. 그 순간만큼은 명확하고 명료하게 의사 전달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성후가 아내와 눈을 맞추며 생글 웃었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섹스할 때가 더 많아지니까, 어느새 이렇게 되더라고. 아.”

그의 시선이 자신의 두툼해진 바지 앞섶으로 향했다.

“또 서버렸네.”

다정의 머리가 핑글 돌았다.

“괜한 걸 물어봤어요.”

“당신도 해.”

“네??”

세울 것도 없는데 세우란 뜻일까.

다정의 동공이 무수하게 흔들리자 성후가 낮게 키들거리며 주어를 말해주었다.

“반말. 하라고.”

“싫어요.”

다정이 고개를 돌렸다.

“왜?”

절대로 말해주지 않겠다는 듯,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하는 그녀다. 성후가 부드럽게 정곡을 찔렀다.

“계속 섹스하게 될까 봐?”

졌다.

“…네.”

“음.”

그는 제 턱을 매만지며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당신이 반말하는 건 나한테 너무 자극적이긴 해. 당장….”

“오~, 그만.”

다정이 미국식 리액션을 하며 귀를 막았다.

“큭큭큭.”

“먼저 씻어요.”

“같이 씻지?”

“저는… 밖에서 씻을게요.”

욕실은 세 개였다. 하나는 침실 옆에. 하나는 거실 맞은편에. 하나는 수영장 옆 찜질방을 겸한 욕실이 있었다.

“밖?”

“거실 욕실요.”

“흐응….”

성후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자, 다정이 직언한다.

“만약에 제게 고추가 있었다면 절대로 서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그럴 리가. 고추는 그렇게 신사적인 놈이 아니야.”

마치 또 다른 생명체를 말하듯 진지하게 되받아치는 성후의 목소리에 다정은 기가 막혔다.

“의지대로 되는 놈은 더더욱 아니지.”

“일단, 씻고 올게요…! 다 씻고 거실에서 만나요!”

“어째서지?”

바지 버클을 풀고 있는 성후에게서 도망치며 다정이 외쳤다.

“외식하고 싶어서요…!!!”

“큭큭….”

성후의 어깨가 들썩였다.

“크크큭, 크크크큭…. 하하하.”

저 귀여운 아내를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성후는 입술을 핥는 것으로 요동치는 감정을 억제했다. 물론 샤워기 물줄기 앞에서도, 불룩한 그곳은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냈지만 말이다.

집을 나서려는데 다정이 집사에게 물었다.

“마크 씨, 밥은?”

참 꿋꿋하기도 하다.

“I’m not hungry.”

마크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웃으면 특히나 순해 보였다.

“오는 길에 맛있는 거 사 올게요!”

먹는 시늉을 곁들인 다정의 한국말을 눈치챈 마크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저었다.

이미 그녀는 남편의 품에 안긴 채 멀어져가고 있었지만.

“두 밤만 자면 출근이에요.”

마을 안 소박한 식당에 앉아 다정이 말했다. 성후는 훈연 브리스킷을 특별히 잘하는 곳으로 아내를 데려가려 했지만, 다정이 거부했다.

고기보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말엔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대 휴식 취하자.”

“그래야죠. 간호사가 아프면 곤란하니까.”

부부는 치킨 누들 수프로 간단히 허기를 채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경호원에게 포장한 수프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후가 잠깐 연석과 통화하는 사이에 다정은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빡빡한 일정과 오랜 비행에 지친 건 성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아내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곁에 있어야 할 다정은 없었고 암막 커튼만 꼼꼼하게 쳐져 있었다.

“헉.”

시간을 확인한 성후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점심때였다. 거실로 나가자 집안은 고요했다. 긴 창밖으론 잔디를 깎고 있는 근육질 경호원이 보였다. 그에게 다정의 행방을 물으려는 찰나, 첨벙첨벙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음?”

뒷마당으로 나갔다.

초여름 햇살이 쨍- 하는 소리를 낼 것처럼 눈이 부셨다. 성후는 눈썹을 찡그리며 투명한 물속에 잠긴 아내를 바라보았다. 인어처럼 헤엄을 치다 물 밖으로 푸하, 하고 나오자 긴 머리카락이 반원을 그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림 같았다.

쪼그려 앉아 저를 보고 있는 성후를 발견하고서 다정이 씩 웃는다.

“굿모닝?”

“수영복 샀어?”

특별한 무늬가 없는 로열 블루 비키니는, 그래서 더 속옷처럼 보였다.

“싼 거 샀어요.”

남편을 원망의 눈빛으로 노려보고는 다시 헤엄을 치기 시작하는 그녀다.

성후와는 반대편 수영장 끝 밖으로 팔을 걸쳐 매달린다. 다정의 시선이 수영장 너머의 숲에 붙박였다.

이 마을은 숲 사이에 만들어진 주택 단지였다.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만든 이곳은 특권 계층에게 허락된 요새와 같았다.

특히 주민들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대자연이 압권이었다. 푸르르고 광활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웠다.

집이 호화스러운 게 아니라, 자연이 호화스러운 곳인 셈이다.

분양 당시 경쟁률도 굉장히 치열했는데 그 어마어마한 싸움에서 성후는 승리를 거뒀다.

시골에서 자란 아내가 유난히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여느 때보다 필사적이었다.

그와 그녀가 바라는 그림 속에 그와 그녀가 있었다.

풍덩-!

다정이 고개를 획 돌리자, 어느새 나체로 다이빙을 한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헉…!”

물을 부리는 신처럼, 깨끗한 폼으로 날렵하게 헤엄치며 어느새 다정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다.

“여보…!”

다정이 눈치를 살피듯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성후가 여유롭게 웃었다.

“특이한 마을이야. 앞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담이 없으면서, 뒷담은 성벽처럼 높으니.”

“하고 싶어요?”

다정의 물음에 성후가 키득거렸다.

“난 언제나 하고 싶지. 아니, 당신 속에서 분리되고 싶지 않아.”

“침대로 가요. 부력이 방해하잖아요.”

사실은 소리가 새어나가는 게 신경 쓰였다. 마침 옆집 개인 잭이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들었겠다.”

성후가 과거형으로 말했다. 그렇다. 부부는 이곳에서 하루 이틀 관계를 가진 게 아니었다.

특히 작년. 처음 이 집에 입주했을 때가 마침 여름이었다. 다정이 비싼 수영복을 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찌나 찢어발기는지, 결국 그녀도 예쁜 수영복은 포기하게 되었다.

“우리 하는 소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정이 성후를 쏘아보며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빨리 와요. 맨날 섹스 한다고 광고할 거 아니면.”

그러면서 물살을 갈랐다. 등에 붙은 그의 시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난 광고하고 싶은데.”

낮게 읊조리는 남편의 목소리. 설마. 설마!

성후가 그대로 다정을 뒤에서 껴안자 수온 사이에 뜨겁게 선 성기가 다정의 허벅지 사이로 꽂혔다.

“내 거라는 거.”

동네 개미 한 마리조차,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다.

“그러니.”

갑자기 물의 점도가 끈적끈적해진 것만 같았다.

“마음껏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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