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78화 (외전) (78/82)

78. 외전 1화. 달콤한 귀국

봄 햇살이 망상해수욕장에 비쳤다. 빛을 머금은 동해는 투명한 민트색에 가까워, 꼭 해외 어딘가의 근사한 휴양지 같았다.

성후는 묵묵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이곳은 일 년 전. 명호의 뼛가루가 뿌려진 곳이었다. 생전 자리싸움을 치열하게 한 것이 몹시 피곤했다며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자리에 자신을 가둬두지 말라는 것이, 명호의 유언이었다.

그래서 어디가 좋으시냐 되물었더니, 명호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해. 내 고향.’

절대로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한 시선은- 소멸에 관한 공포보다 안식을 고대하는 기대가 출렁이고 있었다. 정말로 영영 떠나버릴 것 같은 눈빛 앞에 울컥한 성후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은 두렵지도 않습니까.’

마치 내일 당장 떠날 사람이 저인 것처럼, 입술을 까득까득 씹으면서. 그래선 안 되었는데, 커다란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명호는 지친 얼굴이지만 눈빛만은 힘있게 반짝이며 웃었다.

‘바보 같은 놈. 내가 너무 멋지게 살았던 터라, 일찍 졸업하는 거야.’

졸업.

이승과의 결별을, 그는 졸업이라 말했다. 자기만의 철학이 언제나 확고했던 스승다운 발언이었다.

죽기 하루 전날, 눈꺼풀을 내리거나 입도 다물지 못한 명호를 보며 성후가 결국 오열했을 때, 다정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었다.

‘귀는 열려있어요. 인사해주세요.’

말대꾸할 때는 막힘 없는 말들이 쏟아졌는데,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목만 멨을 뿐,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선생님, 아니, 스승님, 스승님. 명호의 손을 꼭 쥐고 애타게 불렀을 뿐이었다.

그때 명호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이던 걸, 성후는 목격했다.

눈도 입도 닫지 못하는 스승의 필사적 몸짓이었다.

그를 보내고 1년 뒤.

성후는 다정과 깍지 손을 낀 채로 명호의 고향이라던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앞에 서 있다.

“괜찮아요?”

의외로 덤덤해 보이는 남편에게 다정이 물어왔다. 완전히 벗어났다 말할 순 없지만, 희미한 미소에 초연을 가장한 회안이 어렸다.

다정의 마음이 바싹 마른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씩 웃자, 성후가 그 미간에 키스하며 말했다.

“괜찮아질 거야.”

“…응.”

잊어야만 괜찮아지는 건 아니다. 어떤 건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도, 따뜻한 것들만 복기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특히나 가족과의 이별이 그러했다.

통증이 시간과 희석되면, 언젠가 명호를 회상하는 성후를 진짜로 환히 웃게 해줄 것이다.

두 남자가 나눴던 교감은 ‘사제지간’이라 규정하기엔 매정했다. 피보다 진한 유대감이 서로를 묶고 있었던 까닭에 가족 그 이상이었다.

“내년에 또 오겠습니다.”

성후의 말에 명호를 품은 바다가 고요하게 출렁였다. 격렬한 너울이었다면- 스승님이구나, 했을 텐데.

아쉬움을 모래에 묻고 발길을 돌렸다.

“역시 바다는 동해 바다예요.”

“다시 한국에 살고 싶은 거야?”

성후와 다정은 결혼 후 바로 미국행을 택했고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다정이 해안 도로를 따라 느리게 움직이는 차의 품에 안겨 눈을 꼭 감았다.

해풍을 머금은 아내의 옆모습이 몹시도 사랑스러워 성후는 잠깐 차를 세웠다. 마침 갓길도 넓었다.

쪽.

성후가 다정의 보드라운 볼에 키스하자, 그녀가 눈을 뜨지 않고 히쭉 웃었다.

다시 쪽.

이번엔 웃지 않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자 성후가 다정의 턱을 부드럽게 그러쥐고 돌려 핑크색 립스틱을 모조리 빨아먹었다.

휴게소마다마다 들려 느릿느릿 서울에 도착했을 땐,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연석 씨는요?”

친정으로 향하며 다정이 물었다. 성후는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다정이 만류를 위해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는 성후의 손가락이 더 빨랐다.

“너 어디야.”

-저도 연애 좀 합시다. 총각 귀신으로 늙어 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

“연애?”

성후의 오른쪽 눈썹이 삐딱해지자 다정이 그의 눈썹을 콕콕 두드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여주었다. 성후는 다정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만지며- 그 만지는 것이, 애무와 비슷한 뉘앙스를 띈 채 연석에게 말했다.

“그래서… 언제 올 건데?”

-돌아가는 일정에 차질 없이 맞추겠습니다. 또….

반항적인 목소리가 멈추었다. 끝맺지 못한 연석의 속내가 유추되었다. 그러나 구태여 아는 체하지 않는 성후다.

그는 가볍게 웃었지만 수화기 너머론 절대 웃음을 흘리지 않으며 명했다.

“연애 사업 끝나면 보고해.”

-무슨 보고 말입니까?

냉정을 잃은 연석의 목소리가 조금 뒤집혔다. 성후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은 뒤,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 금, 하, 니, 까.”

전화를 끊고 다정이 성후의 어깨를 퍽 때렸다.

“하여간 짓궂어요.”

“당신이 몰라서 그래. 연석이 놀리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못 말려, 아무튼.”

그렇게 말하며 다정이 색이 바랜 회색 초인종을 꾹 눌렀다. 온종일 기다렸던 엄마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고 다정이 대답했다.

“우리 왔어요!”

* * *

6개월 내내 맞선을 봤다. 연석이 미국으로 떠난 뒤, 처음 6개월은 그를 기다렸다. 확신도 약속도 없이 떠난 그였지만 쉽사리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서. 희망 고문하듯 그와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붙들고서 말이다.

원래도 인내심이 길진 않았다. 따라서 부연은 지쳤다. 그것이 오늘날 익숙한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있게 만든 연유였다.

선을 늘 이곳에서 본 건 아니지만, 몇몇 직원은 줄기차게 맞선을 보는 저를 기억하리라 장담했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언젠가부터 타인의 눈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보단, 자신의 현재 상황에 집중하는 힘이 생긴 것이었다. 그 역시 매몰찬 연석의 선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간호사 일, 힘드시겠어요.”

상대편 남자는 오랜만에 멀쩡한 이였다. 촌스럽지만 외모는 꽤 준수했다. 성품도 착해 보였다.

“먹고 사는 일이 그렇죠.”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부연이 말했다.

“사실 부연 씨가 간호사라는 얘길 듣고, 간호사 관련 서적을 찾아보았어요. 대부분이 환자의 입장만 되어 보아서, 환자의 입장만 생각했지, 의료진의 열악한 환경이나 노고 등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더라고요. 짠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어요. 가령….”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지나치게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긴장으로 말이 많아진 건지, 원래 많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부연의 타입은 아니었다.

진득한 연애는 못 해봤다. 하지만 인스턴트 같던 연애 속에서도 말 많은 파트너의 역할은 언제나 부연의 것이었다.

“네….”

남자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으며 감격했는지 일일이 열거했다. 열정만큼은 인정한다. 안타깝게도 매력을 느낄 수 없었을 뿐.

매력이 밥 먹여 주냐. 부연이 속으로 스스로를 타박했다.

“또 나이팅게일은….”

남자의 말은 골짜기에서부터 흐르는 냇물처럼 천천히 꼴꼴꼴, 그러나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부모님은 약국을 운영하시고 남자는 회계사라고 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자면 자신의 조건보단 나았다.

부연의 무심한 표정을 읽은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너무 과몰입해서 읽은 나머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부연 씨가 무슨 얘길 하시든, 무지하지는 않을 거예요.”

확실히. 착했다. 부연은 예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책에 기록된 간호사처럼…, 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못 되는걸요?”

솔직한 발언이었다. 부연은 요즘 오랫동안 자신을 감싸왔던 싸구려 포장지를 찢는 연습을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에이, 겸손은.”

남자가 조금 더 세련된 포장지로 부연을 포장했다. 순진한 남자와 머리로는 잘해보고 싶다가도, 완벽하게 실망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이런 나라도 그렇게 상기된 표정으로 봐 줄 수 있겠어요?

실험이라도 할 것처럼.

단단히 꼬인 자신을 다시 한 번 마주하며 피식 웃는 부연이다.

모자란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연석이 떠올랐다. 꼭 연석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나 아직 많이 멀었어요. 언제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 날 사랑해 줄 수 있을까요.

부연이 시선을 들어 상대방 남자를 바라보았다. 타협하고자 하면 나쁘지 않은 상대를.

서른둘. 그래. 타협할 때가 되었다.

“식사 끝나고 술 한잔 어떠세요?”

남자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의 말에 나쁜 진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부연도 노력해보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머리 위에서 웬 말소리가 날아들었다.

“잘 지냈습니까.”

획. 고개를 돌리자, 연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냉엄한 눈빛 앞에 짜증은 허물어지고 아이처럼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부연도 자존심은 있었다.

“여긴, 어떻게….”

바보처럼 울먹이며 말했지만 말이다.

“좀 늦었습니다.”

거기에 당신을 외롭게 만들었다는 시인이 짙게 묻어났다. 부연이 그리 추측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연석의 눈동자가 무수하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저를 향한 감정.

그것을 목격하자, 그에게 향했던 원망은 한낱 미망이 되어버렸다.

* * *

“잠깐. 안 돼요.”

다정은 아래층 주방이 신경 쓰였다. 부모님이 잠들고 텅 비었을 시각이지만, 조금만 쿵쿵거려도 천장에 매달린 식탁 등이 울렁울렁 춤을 출 것이다.

다락방 같은 다정의 조붓한 방. 성후는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올 수 있는 이곳은 다정의 여고 시절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초콜릿처럼 조각난 창문 밖에서 은은한 달빛이 스며들어왔다.

그 달빛이 비치는 아내의 얼굴을 읽으며, 성후가 악마처럼 웃었다.

“이 작은 침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

갈라져 나오는 저음이 달큼하다.

“정확히는…”

다정이 입술을 여는데, 성후가 그녀의 섹시하지 않은 잠옷 단추를 툭툭 풀어헤쳤다. 그 느림엔 느긋함과 동시에 강인함이 배어 나왔다.

“열네 살 때부터…”

고요한 성후의 눈이 계속 말하라며 눈짓한다.

“몇 년…”

말끝이 흐려지는 다정의 입술에 짧게 쪽, 키스한 뒤 속삭였다.

“그럼 이 방에서 추억은 많지 않겠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투였다.

“없지도 않아요, 대학 다닐 때도 여기서 보냈으니까.”

시험 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술로 보낸 터라 네 발로 계단을 올라왔던 기억이 가장 많았다.

“새로운 추억을 하나 남겨둬야겠어.”

“아하하. 나는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성후가 다정의 브래지어 앞 후크를 툭 하고 풀었다. 봉긋한 가슴이 완연히 드러났고 정해진 수순인 듯 그가 크게 베어 물었다.

“흐읏…”

“참아 봐.”

안 그래도 그럴 마음이었다. 물론 마음처럼 되지 않겠지만.

아니, 분명 실패할 테다.

“흐응….”

달빛 아래 부끄러움도 잊고 태초의 모습이 되었을 때 성후가 다정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하윽…!”

마성후의 아내로 산다는 건, 체면을 차릴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벌거벗은 밤.

커다란 품에 갇혀 짐승으로 전락한 신세.

해일처럼 몰려오는 거대한 흥분.

그것을 타고 고도로 치솟는 쾌감.

“아하, 으읏….”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꼬았다. 곧 다정의 몸 위로 올라온 성후가 친절하게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정염의 불길이 다정에게까지 번졌고, 살점 하나 남기지 않을 것처럼 두 사람을 활활 태워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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