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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76화 (76/82)
  • ?76화. Marry You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초호화 호텔의 탑 층 펜트하우스. 평수만 200평이 넘는 이곳에서 오늘, 다정과 성후의 결혼식이 진행된다.

    일찍부터 시작된 결혼식 준비에 초대장을 받은 하객이 하나둘 입장하고 있었다. 친인척을 제외한 직계 가족이나 지인들의 모습은 충분히 낯이 익었다.

    벌써 봄이 스며든 듯한 널찍한 테라스 소파에, 두터운 사이끼리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그럼 스크린에서 네 얼굴 볼 수 있는 거야?”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승주가 묻자, 여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드러냈다.

    “그렇지. 무려 조연이라고!”

    “너무 잘난 척하지 마라. 모름지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는 기라.”

    기봉이 짐짓 근엄하게 덧붙였다. 그러자 여진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익으려면 멀었거든?”

    “큭큭큭. 그건 여진이 말이 맞네, 맞아.”

    승주가 허벅지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니는 요새 또 연애질 한다미.”

    이번엔 승주에게 화살이 꽂혔다. 승주는 능글맞게 웃으며 반문했다.

    “부럽냐?”

    기봉은 여진의 눈치를 힐끔 본 뒤, 대답한다.

    “부럽긴 하지. 촌구석에는 딸아가 없으가… 이대로 밭만 갈다 늙어 뒈지겠다야.”

    “다 좋은데…”

    승주가 기봉의 위아래를 훑었다.

    볼록 솟은 배 때문에 힘겹게 여며진 셔츠 단추는 가여워 보였고, 흡사 90년대 조폭을 방불케 하는 미상의 재킷은 어째서인지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살을 좀 빼. 요즘은 남자도 비주얼이라고.”

    “지랄. 결혼은 경제력이거든? 그게 현실이다, 문디야.”

    “아니.”

    여진이 고개를 저었다.

    “둘 다야.”

    촌철살인이었다. 뜨끔한 두 남자는 이번엔 묵묵히 앉아 있는 우석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우석이 니는. 연애 안 하나.”

    아직 본식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셔츠가 갑갑하다는 듯 카라 단추를 풀며 그가 대답했다.

    “생각 없어.”

    마침 불어 닥친 바람에 카라가 펄럭였다. 그 사이로 단단한 가슴이 얼핏 보이자 여진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래도 장가는 가야지.”

    기봉이 한 번 더 몰아붙이자, 우석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인연이 있으면 나도 언젠가…”

    우석의 눈이 펜트하우스 속,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다정에게로 향한다.

    “하겠지. 결혼.”

    다정은 연신 성후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성후는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에 기댄 채 샴페인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다정이 고개를 젓는다.

    “안 돼요. 식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요.”

    “한 잔은 혈액순환에 그렇게 좋다던데.”

    “자자. 박수쳐요. 박수.”

    성후의 손에 들려 있던 샴페인 잔을 빼앗아,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녀는 엄한 얼굴로 딱딱하게 박수를 쳤다. 꼭 호랑이 선생님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몹시 귀여웠다.

    짝- 짝- 짝- 짝- 손뼉이 부딪히는 걸 보며 성후가 가늘게 웃었다.

    묘하게 휘어지는 눈가를 보자,

    “아. 안 돼요.”

    제 입술을 턱 막는 다정이다. 그녀는 그의 정욕 앞에선 촉이 빨랐다. 성후는 대답 대신 입술을 핥았다.

    턱시도 차림에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성후는 누가 봐도 새신랑이었다.

    그러나 야릇한 표정과 불량스럽게 풀어헤친 재킷 때문인지, 때와 어울리지 않게 관능적으로 보였다. 그를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새하얀 드레스가 찢어발기는 상상이 다정을 덮쳤다.

    …꿀꺽.

    상기된 얼굴로 손 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

    “다 오신 거 같습니다.”

    다가온 진행 요원이 말했다.

    청첩장엔 정확한 시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일시 : 29일 점심시간’.

    초대받은 특별한 하객들은 단 한 명도 12시를 넘기지 않고 참석했다.

    “그럼.”

    성후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웨딩송은, 열 손가락을 다 사용하지 않아도 되게끔 가볍게 편곡했다.

    마치 동요처럼 최소한의 음계로만 연주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의 햇살을 재현한 듯 섬세한 아름다움이 빛을 발했다.

    저 멀리서 첫 대면의 어색함을 나누고 있던 양가 어른들 사이로 선후의 피아노 선율이 파고들자, 모두의 얼굴이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특히. 성후 가족들의 복잡한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피아노를 치는 아들을 보게 될 줄이야. 그랜드 피아노를 보고 설마설마했지만, 감히 묻지 못했던 것을 귀로 확인하는 순간 선화는 눈물을 훔쳤다.

    이 웨딩송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연주를 마친 성후가 고개를 끄덕하자, 가장자리에 작게 설치된 단상 위로 사회를 맡은 유명 아나운서가 올라왔다.

    그가 유머러스하게 착석 멘트를 읊자 디귿자 형태의 초대형 식탁에 하객들이 착석한다. 6인 식탁을 이어 붙인 식탁은 새하얀 식탁보에 가려져 세상에서 가장 큰 식탁처럼 보였다.

    복층 구조로 되어있는 2층에도 하객이 꽉 찼다.

    아나운서는 식순과 함께 신랑 신부 소개의 운을 띄었다.

    “하하.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보통은 사회자 멘트 이후 신랑, 신부님이 등장하시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급하신지 벌! 써! 나와 계시군요!”

    그러자 하객들 사이에서 폭죽 같은 웃음이 터졌다.

    “그럼 신랑 신부님의 셀프 소개를 들어볼까요?”

    사회자가 오두방정을 떨며 성후에게 손짓했다.

    스탠드 마이크는 최대치로 높여도 성후에게는 낮아, 등을 굽혀 마이크를 쥐었다.

    다음으론 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느리게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성후입니다.”

    그리고 다정에게 마이크를 기울이자, 그녀도 따라 인사했다.

    “온다정이에요.”

    다시 마이크를 제 입에 갖다 댄 성후가 뻔한 감사 인사를 읊는가 싶더니 이어 말했다.

    “지루한 결혼식은 사양입니다. 즐거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을 들면서 결혼 파티를 즐겨주세요. 대신 마음으로 열렬히 저희 부부 앞길을 응원해주시길 바랍니다. 덕담도 좋으나, 적당히 해주십시오. 오늘은 천사 같은…”

    성후의 눈이 다정에게 머문다.

    “신부 얼굴 보기도 바빠서 말입니다.”

    저런 뻔뻔한 말을 잘도 한다. 다정은 코웃음을 치다 이내 부끄러운 척 양 볼을 감쌌다. 그녀의 재치있는 행동에 다시 웃음소리가 펜트하우스를 가득 채웠다.

    개중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연석이다. 느끼한 멘트는 질색이라는 듯 미간을 모으자. 곁에 있던 부연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는다.

    그때 성후가 다정의 손을 꼭 쥐며 잠깐 침묵했다. 그러자 하객도 웃음을 그치고 두 사람을 주목했다. 왠지 긴장감이 감돈다. 성후는 무겁게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성후의 시선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명호에게 머문다.

    명호는 모처럼 근사한 양장차림에 빨간색 띠가 둘린 검정 중절모를 썼다. 제 몸 하나 가누기 버거운 처지지만, 눈빛만큼은 생명력이 넘쳐난다.

    성후에게 기억될 스승의 마지막 나들이.

    힘을 실어주듯, 명호가 성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포컬디스토니아라는 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현대 의학으론 아직 완치가 어려운 병이죠.”

    홀 안이 술렁 했다. 언론에도 공개된 적 없는 내용이어서 가까운 친인척들이 특히나 놀라 수군거렸다.

    “근래 제가 연주했던 것을 영상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매끄럽지 않은 연주는 연출이 아닌 현재 제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후의 말을 들은 유리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달려나갔다. 수군거리는 말소리도 점점 잦아졌고 모두가 무거운 분위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손을 꽉 잡는 다정의 아귀힘이 느껴졌다. 그러자 성후가 소년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 병이 밉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니 다들 표정 푸세요.”

    성후의 눈이 다정의 눈동자에 붙박인다.

    “제게 아내를 보내준 병인데, 어찌 원망만 하겠습니까. 해서.”

    다시 하객들을 응시한다.

    “지금의 마성후 모습 그대로를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성후는 다정의 이마에 키스한 뒤, 무대에서 폴짝 내려갔다. 그리고 엔틱 풍 의자를 가져와 피아노 곁에 두고서 다정에게 권했다. 식순에 없던 진행 방식에 당황한 행사 요원들이 다가오자 성후가 눈짓으로 물렸다.

    성후는 감질난다는 듯 마이크 대에서 마이크를 분리한 뒤 손에 쥐었다.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후가 손가락을 풀더니,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어려서부터 수천 번을 더 쳐봤던 <라 캄파렐라>를 치는데 심리 통제가 필요했다.

    호수를 떠올렸다. 산 정상에 드넓게 고인 둥근 호수. 그 이미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한 성후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맑은 첫 음과 함께 이내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 열흘간 연습실에 틀어박혀, 경련이 이는 손가락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습을 했더랬다.

    “호오…”

    하객들은 그가 해괴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완벽하긴 힘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음 이탈이 간간이 들렸는데 성후는 개의치 않고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모두가 감동한 가운데 다정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 가까이에 있는 만큼 실낱같은 동요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중에 성후의 연주를 가장 음미한 사람은 명호였다. 창가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그는 눈을 감고 따뜻한 햇볕과 성후가 선물하는 곡에 귀를 기울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꼭 천국으로 인도하는 종소리 같아서 당장이라도 등에 날개가 돋칠 것만 같았다.

    연주가 끝나갈 때쯤 명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머릿속으로 음악을 그리며 연주에 푹 빠진 성후의 얼굴이 보였다.

    성후가 연주로 쾌감을 느낄 때마다 꿈틀거리는 짙은 눈썹이 명호의 망막에 촘촘히 박혔다.

    성후야. 누구보다 피아노를 즐기는 너는 이미 승리자다. 좌절할 것 없다. 사는 동안 부디…

    명호의 눈이 이번엔 긴 머리를 뒤로 곱게 땋은 다정에게 닿는다.

    오늘만 보고 살아라. 모두 부질없다. 그저 네 곁에 있는 이를 소중히 여기고 날마다 행복하거라.

    “포, 포… 무슨 병인지 모르겠지만, 이토록 화려한 연주는 처음 들어 놀랐는데요…”

    사회자 말을 들으며 성후가 거칠게 나비넥타이를 뜯었다. 그것을 다정에게 건네고 셔츠 단추를 풀어헤칠 때, 다정은 급히 그에게 생수를 내밀었다.

    꿀꺽. 꿀꺽. 물이 넘어갈 때마다 일렁이는 울대가 크게도 도드라졌다. 4분 21초의 연주가 그의 몸을 흠뻑 젖게 만들어, 드러난 목선이 땀으로 반질거렸다.

    성후는 생수 한 병을 시원하게 비운 뒤 사회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회자가 침묵했고, 성후가 다시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곁에 앉아 있던 다정이 깜짝 놀란다. 분명 힘들 텐데, 또 연주를?

    걱정으로 흐려진 다정의 얼굴을 성후가 빤히 응시하며 미소를 띠었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길 시작한다.

    “어…?”

    다정의 심장이 음악에 맞춰 살랑거리다 이내 또 다른 악기라도 된 듯 큰 소리로 뛰었다.

    Burno Mars의 .

    단 한 곡의 노래가 지금 이 순간을 영화로 만든다.

    그의 연주는 항상 짐승 냄새가 짙게 났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그저 밝고 사랑스러운 음악은 천진하게 유혹적이다.

    성후가 다시 다정을 보고 웃는다. 그 미소가 세상을 다 가진 남자처럼 해사했다.

    리듬에 맞춰 경쾌하게 들썩이는 어깨와 까딱이는 고개.

    천재라 불리던 남자의 뜨문뜨문 어긋나는 연주. 그러므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사랑 고백.

    다정의 가슴 속으로 핑크색 물결이 스며든다. 뜨거워진 눈가를 찍어 누르는데 제게만 보이도록 시선을 맞춘 성후가 입 모양으로만 말한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나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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