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돌격! 결혼으로 (3)
“시간이 될까요?”
성후의 정기 검진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다정이 물었다.
“돌아올 땐 전용기를 타고 올 겁니다. 직항이라 늦지 않을 거예요.”
다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오늘따라 베토벤의 운명 벨소리가 유난히 웅장하게 들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성후를 보며 언젠가 꼭 저 벨소리를 바꿔 달라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급하게 전화를 끊은 성후가 다정의 손을 잡고 설명 없이 이끌었다.
“서, 성후 씨?!”
“죄송하지만, 내려야겠습니다.”
“아 지금은…”
승무원이 난처해 하자, 성후가 정중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행기를 잘 못 탔습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아버지 얼굴을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심각성을 읽은 승무원과 다정. 승무원은 급하게 기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성후를 위해 이륙을 1분 지연해주었다. 기장의 배려로 성후와 다정은 한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선생님… 많이 안 좋으시대요?”
전용기는커녕, 급히 탄 비행기는 비즈니스석 자리도 없어 성후가 큰 몸을 이코노미석에 욱여넣으며 대답했다.
“당장 위독하신 건 아니랍니다. 하지만… 제가 여유 부릴 시간은 없다는 게, 지금 제 판단입니다.”
다정의 마음이 아려왔다. 치료를 위한 발걸음도 ‘여유’로 치부할 만큼, 성후는 지금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다. 이해는 간다. 저라도 그럴 테다. 그러나 성후의 삶에 얼마나 많은 변수가 빼곡하게 차 있을까. 그만큼 자신은 방치되고 있다는 얘기다.
“결혼식은… 하는 게 맞을까요?”
그가 온전히 스스로를 축복할 진짜 여유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봤는데 말입니다…”
꿀꺽. 그의 말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선생님이 가시기 전에… 진행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온전히 주인공 기분을 느끼게 해주지 못해서.”
다정이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아버지시잖아요.”
성후가 고맙다는 듯 작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지쳐 보여 다정의 마음이 시큰거렸다.
“결혼식은 약소하게 진행하고 싶습니다.”
성후의 말은 의외였다. 특별히 ‘최고급’만 지향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숨 쉬듯 자연스럽게 먹고 입고 쓰는 것들이 모두 ‘최고급’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자기를 위한 배려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고맙고 미안했다. 그의 수준에 못 미치는 여자가 되었단 못난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고, 또… 절 배려해주시는 건가요?”
그래도 묻고 넘어가고 싶었다.
“시간이 촉박한 건 사실이지만, 따로 다정 씨를 배려한 건 아닙니다. 어떤 배려가 필요합니까? 제가 놓친 게 있었다면 말해주세요.”
성후의 눈빛은 진지했다.
“어…, 그럼 왜 약소한 결혼식을 하자고.”
“기억에서도 흐릿한 사람들이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우리의 날을 사교 모임으로 이용하도록 두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진짜 이유가 뭘까요.”
다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날만큼은 적어도… 당신에게 집중하고 싶어서요. 무의미한 하객, 화려한 조명, 말 많은 주례사, 웅장한 음악, 정신을 쏙 빼놓는 맛있는 음식. 모두, 필요 없습니다.”
다정은 성후의 순수한 사랑 앞에 부끄러워졌다. 어쩌면 아무 계산 없이 이토록 사랑만 생각할 수 있을까. 주변을 보는데 탁월한 다정이어서, 그런 그에게 더욱 경외심이 일었다.
그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사랑을 음미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 그게 서로에게 향한 것이든. 저에게 향한 것이든. 그건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거라고.
“당신은 사랑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근사한 남자예요.”
“모두 당신에게 배웠습니다.”
그 공을 다정에게 넘기는 것까지. 다정은 웃음이 났다. 이보다 완벽한 남자는 세상에 없을 거라 확신하면서.
*
“성후야….”
밤이 내려앉은 시간.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 기운을 내뿜던 스승의 쇠약해진 모습 앞에 성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정을 집에 데려다주고 난 다음이라 다행이었다.
이런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네. 선생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아직 유언은 이릅니다. 듣지 않겠습니다.”
성후가 말하자, 명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이놈 새끼…. 쥐어박을 힘도 없는 사람한테, 농담은.”
성후는 진담이었지만, 말을 아꼈다.
“라 캄파넬라.”
“선생님.”
성후의 얼굴이 아연했다.
종이 울리는 것처럼 경쾌한 느낌을 주는 <라 캄파넬라>는 청중에겐 듣는 기쁨을 주지만 연주자에겐 고난도 기교가 요구되는 곡으로 세계 3대 난곡으로 뽑히기도 했다.
한때 성후도 그 곡에 미쳤을 때가 있었다. 제대로 연주하는 이보단 흉내에 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가 되기 위해 독하게 매달렸던 때가.
성후의 실력을 가늠해보고자, 명호가 성후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날. 그때 들었던 곡도 <라 캄파넬라>였다. 그때의 전율이 아직도 명호의 속에서 생생하다.
이 아이는 천재다. 반드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고. 되고도 남는다고 예견했었고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허나 지금의 성후는 열다섯 성후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게 듣고 싶어.”
성후는 잠시간 침묵했다. 엉망일 게 분명한 연주를 죽음을 곁에 둔 스승이 듣고 싶다니. 그의 속눈썹이 고뇌로 파르르 떨렸다. 명호는 숨을 가늘게 쌕쌕거리며 이어 말했다.
“네 결혼식장에서.”
아직 구체적인 윤곽이 나오지 않은 결혼. 망가진 손가락. 부탁을 가장한 스승의 마지막 소원.
성후는 강단 있는 얼굴로 명호에게 말했다.
“선생이 누구인지 몰라도 아주 개판이란 소리를 들을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씩 웃는다. 결정한 눈치다. 명호도 가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날 받아 놓은 사람이 무엇이 두려울까.”
“좋습니다. 악착같이 버텨만 주세요.”
성후는 다음 날, 다정을 만나 사정을 설명했다. 자신은 연습실에 틀어박혀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결혼식은 어머님과 의논하고 연석을 부리며 준비해달라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 결혼에 관한 소신과 필요한 리스트를 적은 종이를 건넸는데 꽤 구체적이고 꼼꼼했다.
걱정하지 말라며 팔 알통을 만들어 보이는 다정을 성후가 끌어안고서 말했다.
“당신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 * *
“대체 이런 주먹구구식 결혼 준비가 어디 있니?”
명정이 원단 시장을 돌아다니며 투덜거렸다.
“아니, 무슨 상견례도 없고 말이야. 혹시 사돈댁이 아직 반대하니? 아니면 우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다정이 명호와의 얘기를 모두 설명했지만, 엄마는 쉬이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 말해. 부모님들은 너무 바쁘시고, 전적으로 우리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
“그래도 전달 사항이나, 전화라든지… 아무튼 뭐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왜 성후 씨네 집에서 그래야 하는 건데? 아쉬운 엄마가 먼저 연락하지그래. 전화를 하든. 메일을 보내든. 필요하면 알아봐 줄 테니까.”
다정이 따끔하게 말하자, 명정이 입술을 까뒤집으며 노려본다.
“못된 계집애. 벌써 그 집 귀신이라 이거니? 아주 효부 났네, 났어.”
그때 원단 가게 주인이 보드라운 원단을 가져와서 말했다.
“이게 모달이라는 건데요…”
깃털처럼 부드러운 원단임에도, 명정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런 거 말고 최상급, 여기서 공수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최상급으로 보여주세요. 모달은 흔하잖아요.”
명정은 없는 형편이지만 성의를 다해야 한다며 직접 이불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다정의 만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아 온종일 원단 가게를 전전하던 중이었다.
“후, 잠깐만요.”
까다로운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주인은 핸드폰을 들었다. 몇 분간의 통화 끝에 주인이 제안했다.
“호주산 천연 양모 정도면 괜찮을까요?”
“샘플은요.”
“두 시간 뒤에 가지고 온답니다. 일단 사진으로 보여드릴게요.”
“좋아요!”
결혼식 준비는 나름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단 열흘 만에 꼭 필요한 인원만 수용할 펜트하우스를 예약하고, 예비 시댁의 힘으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쉐프가 출장 뷔페를 맡았다. 급한 만큼 예물 예단은 생략하기로 했었는데 명정의 집으로 초호화 드레스와 한복, 정장을 비롯한 보석과 봉채비를 보내왔다. 봉채비는 빌딩 하나를 사고도 남을 금액이어서 놀라 까무러친 명정이 손을 덜덜 떨었더랬다.
“이거… 이불로는 안 되겠는데… 집을 팔아야 하나.”
명정의 앞으로 온 다이아몬드 세트 안에는 양초로 가공한 봉투가 들어가 있었다. 독특한 질감을 열어보자, 벨기에 제품의 크리레이드 페이퍼에 유리펜으로 새겨진 글이 보였다.
봉투, 편지지, 펜까지. 보내는 이의 정성이 묻어나는 이 편지는 필체마저 고아한 선화가 보낸 것이었다.
「사부인께.
안녕하세요. 다정 양의 시어머니가 될 선화라고 합니다. 먼저, 대면 없이 서신으로 찾아뵙게 된 것을 깊게 사죄드립니다. 서로가 경황이 없다는 이유로 새 식구를 맞이하는데 도리를 다하지 못해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또 믿고 귀한 여식을 보내주셔 심심한 감사를 전합니다.
부디 저희 집안과 고귀한 인연을 맺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약소한 선물로 마음을 대신하는 것을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결혼식 당일 날 뵙겠습니다.
-성후 모친 공선화 드림.」
“다정아…”
명정이 울먹이며 다정을 쳐다보았다. 다정도 감격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주억였다.
“음… 예비 시어머니가 정말 멋진 분이시긴 해.”
“내가 오해했다… 어쩌니.”
“괜찮아요. 내가 전하지 않았으니까.”
“이불 거의 다 만들었거든. 내일부터 꽃무늬 자수를 넣겠어.”
“엄마.”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어. 말릴 생각 마!”
명정이 열의로 눈빛을 활활 태웠다. 마침 퇴근한 경환이 쌓여 있는 선물 꾸러미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다 뭐니?”
다정은 경량 패딩을 급하게 입으며 아빠에게 윙크했다.
“이 밤에 넌 어디 가고?”
“성후 씨 보러! 집 앞에 왔대!”
탁구공처럼 집에서 뛰쳐나온 다정이 성후의 차를 발견하고 환히 웃었다. 차 문을 당기자 조금 수척한 얼굴의 성후가 보였다.
“괜찮아요?”
“괜찮으려고 왔습니다. 보고 힘내려고.”
짠했다.
“이리 와봐요.”
다정은 성후를 끌어안고 그의 등을 쓸었다. 성후는 다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이내 속삭였다.
“내일이군요. 드디어.”
그러면서 다정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다정이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부는 한 몸! 힘들 땐 도와야죠!”
두 주먹을 꽉 말아쥐며 열혈 투사처럼 구는 다정의 행동에, 성후가 픽 웃었다.
“내일은… 당신 생에 가장 멋진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정이 성후의 입에 짧게 입맞춤하며 말했다.
“성후 씨 생에도요.”
서로를 담은 예비부부 눈동자에 행복이 범람한다. 또 다른 시작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