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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74화 (74/82)
  • ?74화. 돌격! 결혼으로 (2)

    중국에 너무 늦은 시각에 도착해, 다정과 성후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성후의 본가로 향했다.

    다정이 흠칫한다.

    문짝에 섬세하게 조각된 용이 꼭 살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성후는 곁에서 태연하게 벨을 눌렸다. 평소엔 그냥 들어가지만, 오늘은 그도 다정과 손님이었다.

    -어서 와. 아들. 그리고 다정 양.

    상냥한 선화의 목소리. 이윽고 정문이 개방되었고 성후는 다정의 손을 꼭 잡고 끌었다.

    “두려워 말아요.”

    보통 때보다 더 부드럽게 말했다. 다정은 고개를 주억이며 성후의 뒤를 따랐다. 석제가 깔린 긴 산책로는 충분히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다정을 더욱 긴장케 만들었다.

    붕어가 활개 치는 커다란 연못과 아기 천사 석상이 여러 개 세워진 분수. 늘어진 원목 벤치 사이에서 바닥을 쓸며 고개를 까딱이는 정원사가 보였다. 성후는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게 걸었고 다정은 곁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성후도 그녀를 따라 묵례했다. 정원사의 얼굴이 머쓱해 보였다.

    두 사람이 현관에 다다르자, 고풍스러운 문이 둔중하게 열렸다. 얼핏 눈으로 수를 가늠할 수 없는 메이드의 고개가 일제히 숙여졌다.

    “왔니?”

    선화가 팔을 크게 벌리며 두 사람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다정 양.”

    선화는 먼저 다정을 안고 서양식 볼 키스를 했다. 영화에서만 봤던 인사지만, 경험해보니 따뜻했다. 토마토처럼 붉어진 다정을 보며 선화가 말했다.

    “이쪽으로 와요.”

    선화의 안내를 받으며 성 같은 저택 안을 누볐다. 회색 벽과 연노란색의 몰딩. 문과 계단은 모두 짙은 목제로 이루어져 있어 한층 고급스러웠다.

    거실이라 부르기엔 광활한 홀 소파에 앉자 조각난 창들을 마주 보게 되었다. 커다란 액자 크기의 창은 몰딩을 중심으로 일 층과 이 층에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햇살이 맹렬하게 쏟아져도 눈이 부시지 않은 기막힌 인테리어였다.

    “집이 좀 음산하죠?”

    “아니에요. 너무 멋져요.”

    “쿡쿡. 그럼 다행이에요. 잠깐 기다려요. 아버지가 내려… 오셨군요.”

    이 층 서재에서 내려오는 기태가 보였다. 다정은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성후는 그런 다정의 어깨를 옅게 다독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기태입니다.”

    분명 초면인데, 낯이 익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성후와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체형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해 꼭 나이 든 성후를 만나는 것만 같았다. 때문인지 어려워도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온다정이에요.”

    또렷한 눈동자. 실핏줄 하나 없는 깨끗한 흰자위.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처럼 예쁘게 올라간 광대. 환한 피부색과 꼭 어울리는 밝은 인상.

    세계를 누비며 사람 만나는 일이 일상인 기태에게, 다정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편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앉으세요.”

    “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기태의 말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아버지…!”

    다정이 성후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젓고서 대답했다.

    “네.”

    ‘아버님.’이란 호칭까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 녀석, 감당되겠습니까?”

    그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성후는 벙졌고, 선화는 침잠한 얼굴이었다.

    “음…”

    의외로 다정이 뜸 들이자, 성후의 눈이 기민하게 다정의 얼굴에 붙박였다. 아버지와는 별개로 애가 바짝 탄 표정이다. 얼른 대답하라며 눈빛으로 재촉했다.

    그때 기태가 먼저 말했다.

    “자신 없으면 물려도 좋습니다.”

    성후의 반항적인 눈빛이 아버지에게 꽂혔을 때 다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성후 씨는, 늘 제 생각보다 멀리 나가요. 거침없죠. 덕분에 자주 놀라는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 사람이 없는 제 인생이 훨씬 감당되지 않을 거예요.”

    긴장한 기색으로 수줍게 인사를 건넸던 그녀가 맞는지 기태는 속으로 놀랐다.

    시선을 똑바로 맞추는 그녀의 안광엔 확신과 총기가 어려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그럼 한 가지 더.”

    “네. 말씀하세요.”

    사내보다 뛰어난 여장군처럼, 비장하면서도 담대한 얼굴로 대답했다.

    “성후는 정착해서 산 적이 없습니다. 그게 국가든, 사람이든.”

    “국가는 따라가면 되고, 정착지는 제가 되면 됩니다.”

    또렷한 목소리에 선화가 방긋 웃었다.

    “결국, 성후가 가르니크를 계승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그림자처럼 내조하는 아내가 돼야 할 겁니다. 가능, 하시겠습니까.”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정에게 직업도, 네 삶도, 다 버리고 그를 따르란 압박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아버지. 그건 제가 정합니다. 제가 언제…”

    결국, 성후가 못 참고 나서려는데, 다정이 외쳤다.

    “성후 씨! 제가 대답할게요.”

    성후가 다정을 내려다보다 이내 피가 밸 듯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선화는 다정을 믿자는 눈으로 성후에게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남편이 큰일을 맡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보필해야겠지요.”

    “본인 삶을 포기하고도 말이죠?”

    기태가 직구를 날렸다. 그러나 다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은은하게 웃어 보였다.

    “그 또한 제 삶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을 하려는데, 분을 참지 못한 성후가 나섰다.

    “결혼이란 제도로 다정 씨를 희생시킬 마음 없습니다. 이런 고루한 얘기로 사람을 압박할 거면 저희끼리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정의 손을 끌었다. 그때 기태가 소리쳤다.

    “앉거라. 이 버릇없는 놈!”

    “됐습니다.”

    “성후 씨!”

    다정이 더 크게 소리친 뒤 이내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큰소리쳐서.”

    그리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성후의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일렁거렸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이만 나가죠.”

    “아직 드리고 싶은 말씀이 남았어요.”

    그러면서 손목을 비틀어 성후의 손을 푸는 다정이었다. 그녀는 기태를 곧게 응시하며 말했다.

    “주신 물음에 대답을 드리자면, 성후 씨의 앞길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는 아내가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그만한 수고도 기꺼이 감수하겠어요. 하지만 그사이에 성후 씨와 분리된 저만의 행복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

    “욕심이 많아서 죄송해요.”

    다정이 다시 사과하는 의미는 기태가 바라는 지고지순한 현모양처로 ‘만’ 살지 못할 것 같아 죄송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선화가 나섰다.

    “다정 양이 참 영리하군요.”

    “네?”

    “결혼이란 게 그렇더라고요. 한쪽의 희생만으로 가정이 유지되면 모두가 불행해지더라고요. 균형을 잘 맞춰야 해요. 결국, 두 사람이 결혼하려는 이유는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잖아요. 이이 말처럼 착하기만 한 아내를 자처할 필욘 없어요. 저부터가, 그런 아내가 아닌 걸요?”

    그러면서 기태를 보며 가늘게 웃는 선화다.

    가르니크완 별개의 의류사업으로 아시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는 선화였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기도 했다.

    “그럼…”

    “내가 행복해야 상대도 행복한 법이죠.”

    선화가 다정이 옳았음을 알려주었다. 기태도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식구가 된 걸 환영해요, 다정 양.”

    테스트는 최고점으로 끝이 났다.

    선화에게 입이 닳도록 다정에 대해 듣기는 했었지만, 직접 확인해야 한다 생각했다.

    테스트는 모두 가짜였다.

    사실 기태는 수동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와 맞지 않다 여겼다.

    또 자신의 거친 아들을 상대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배짱은 필수요건이었다.

    과연 다정이 신데렐라를 꿈꾸는 몽상가인지, 이 시대를 개척할 신여성인지 무례를 범하더라도 명확히 알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흡족한 합격이다.

    “모질게 굴어 미안합니다.”

    기태가 사과하자, 상황을 이해한 성후의 맥이 풀렸다.

    다정이 얼떨떨한 얼굴로 가족들을 바라보자 모두가 따뜻하게 웃어주어 울컥했다. 손에 얼굴을 묻고 감격으로 떨다 곧 깊게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결혼 승낙이 떨어지고 저택을 나서려는데, 선화가 한사코 두 사람을 붙잡았다.

    “자고 가래도. 남는 방도 많은데 뭐 하러 나가서 자.”

    기태는 급한 전화를 받고 서재로 올라간 뒤였다.

    “여기는 너무 외진 곳이잖아요. 다정 씨가 중국은 처음이라 해서, 맛있는 거 사주려고요.”

    “그런 거라면 우리 주방장이…!”

    “데이트도 할 겸.”

    성후의 말에 다정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녀도 성후의 뜻을 따르고 싶은 거였다. 가장 큰 산은 넘었지만,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아 이 집에선 물 한 모금 마실 자신이 없었다.

    “붙잡을 방법이 없겠네, 그건.”

    선화가 아쉽다는 듯 웃었다.

    “유리는요?”

    선화의 눈이 본 저택 옆쪽에 보이는 별채를 가리켰다.

    “화실에.”

    “아. 잠시 들렀다 갈게요.”

    “으음…”

    유리가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한 선화의 미간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다정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성후면 몰라도, 이런 점에선 다정에게 더 신뢰가 갔다.

    “그래, 그럼 잘 만나고 가. 엄마는 들어가야겠다.”

    얇은 카디건 하나만 걸친 선화를 성후가 폭 안아주며 말했다.

    “감사해요. 늘 믿어주셔서.”

    “내가 네 엄마라는 게 늘 자랑스러워. 행복해.”

    선화도 작은 손으로 성후의 등을 토닥였다.

    “그럼 조심해서 가. 다정 양도요!”

    “네. 어머님, 들어가셔요!”

    정원이 너무 넓어 괜히 바람이 더 많이 고인 것처럼 느껴졌다. 성후가 다정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잠깐 인사만 하고 갑시다.”

    “아무렴요.”

    똑똑. 엔틱풍의 하얀색 문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마세요!”

    대상을 가리지 않은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나야.”

    “…….”

    잠깐의 침묵 이후 유리가 동그란 쇠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손님 있어.”

    그러면서 문을 활짝 여는 유리다. 화실 안에는 반나체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성후가 놀라 두 눈을 깜빡이자, 유리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델이야.”

    남자의 눈빛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성후와 다정에게 짧게 묵례했다. 성후의 눈이 험악하게 빛난다.

    “마유리, 너…!”

    “성후 씨. 이만 가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정이 먼저 인사한 다음, 젖 먹던 힘을 다해 성후를 잡아끌었다.

    “그럼 잘 가요. 새언니.”

    유리는 서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쾅 닫힌 문을 보며 성후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물어왔다.

    “왜 말렸습니까? 딱 봐도 모델이 아닌데.”

    “그래서요? 그게 문제가 돼요?”

    “되죠. 여기는 부모님이 계신 집이고, 유리는…”

    다정이 까치발을 들어 성후에게 키스했다. 정원사의 시선을 달고서 입술을 열어 그의 혀를 깊게도 빨았다. 츱- 소리와 함께 멀어진 뒤, 다정이 결투를 마친 사람처럼 성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문제 돼요?”

    성인인 여동생을 과보호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건!”

    “한마디만 더 하면 내로남불로 간주하겠어요!”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그럼 인사만 하고 옵시다.”

    “어허. 어허! 그건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요. 가요, 빨리요!”

    다정이 커다란 예비 신랑을 끙끙거리며 밖으로 끌었다.

    * * *

    그 시각 한국. 호스피스 병동. 거동이 힘들어진 명호는 이제 타인의 도움으로도 화장실까지 가기가 힘들어졌다. 연석은 능숙하게 커튼을 치고 휴대용 소변기를 가져와 그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화장실에서 소변기를 비우고 오니, 명호가 미안한 듯 웃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그러면서 기침을 터트렸다. 연석은 재빨리 손수건을 건넸고, 이번엔 고분고분 손수건으로 입을 훔치는 명호다.

    “아닙니다.”

    “쿨하게 떠나고 싶은데, 마성후 그놈이 발목을 잡아.”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괜찮긴. 어서 서두르라고 해. 내 새끼 결혼식 하는 거 꼭… 보고 가고 싶으니까.”

    날씨가 풀려가자, 급속도로 쇠약해진 명호를 연석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명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올해 겨울이 마지막일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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