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돌격! 결혼으로 (1)
“안 되는데. 난 해야겠는데. 결혼.”
그가 무슨 짓까지 하고서 저를 가지려 드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다정의 얼굴은 티끌 없이 맑았다.
“으음.”
그러다 눈썹을 오묘하게 꿈틀거린다. 갑자기 잡생각이 그녀를 잠식한 게 틀림없었다. 그럴 필요 없다.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지켜줄 테니까.
“나한테 던져요. 다정 씨 인생.”
“던지기 식이나?”
“확실하게 받겠습니다.”
“그렇담 해요.”
성후가 다정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그 진지한 눈에 그녀가 시선을 맞추며 반복해 말했다.
“하자고요, 결혼.”
두 번의 확답을 듣고서야 성후가 환히 웃는다.
“좋습니다. 부인.”
태양을 닮은 남자가 밤을 품고서 다정에게 다가왔다.
“…헉!”
아침이 드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 * *
오랜만에 미용실 문을 닫은 명정의 아침은 분주했다. 시집을 보내겠다고 혈안이 되어있을 땐 언제고 막상 다정이 결혼할 남자를 데리고 온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세계적인 재벌가 아들을….
“쉬엄쉬엄하지그래.”
신문을 보고 있던 경환이 말했다. 사실 그의 눈에도 조그마한 활자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럴 수 없어요.”
“내가 뭐 좀 도와줄까?”
“정신 사나워요.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시는 거랍니다~”
상냥한 듯 날카로운 대답이었다. 4인 식탁에 준비한 음식들을 차례대로 늘어놓자, 명정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왜?”
경환의 물음에 명정이 울상을 짓는다.
“식탁이 너무 좁아요.”
“그거야… 우리 가족이 세 명이니 그렇지.”
“성후 씨 체구도 보통이 아닌데… 넷이 앉으면 좁아터지겠어요.”
“으흠…”
“이참에 6인 식탁으로 바꿔요.”
경환이 턱을 굳히며 대답했다.
“사치야.”
“다정이 결혼하면, 곧 애도 낳을 거고… 그럼 애들이 편히 식사도 못 할 텐데. 친정에 오고 싶겠어요?”
명정의 생각은 멀리도 나갔지만, 꽤 구체적이었다. 결혼에 손주라. 경환의 고개도 끄덕여진다. 하지만 당장 수용하긴 어렵다.
“다정이 시집 보내고… 생각해 보지.”
식탁값 아낀다고, 가르니크가의 수준을 맞출 순 없겠지만. 당장은 한 푼이라도 쉽게 여길 수 없었다. 경환의 마음을 읽은 명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순간 벨이 울렸다. 늘 듣던 초인종 소리임에도 명정이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경환은 태연한 얼굴로 일어나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해괴한 걸음을 보여주었다.
현관문을 열자, 상앗빛 투피스를 입은 천사 같은 딸과 깔끔한 슈트 차림의 성후가 보였다. 누구 딸인지, 누구 예비 사위인지, 연예인도 울고 갈 비주얼이었다.
“큼…”
그런 마음을, 잠긴 목과 함께 풀면서 경환이 말했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장인어른.”
‘장인어른’ 소리가 꽤 자연스러워 다정도 경환도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뻔뻔하게 씩 웃었다. 다 가진 자의 미소였다.
“어머, 그건 뭐예요?”
화장은 완벽하게 했지만, 앞치마 차림의 명정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말입니다. 소소하지만, 받아 주세요.”
성후가 내민 건 한우 세트였다. 이것도 말이 많았다.
성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준비해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다정이 극구 반대했다.
저에게 했듯, 명품 로고가 박힌 종이봉투를 주렁주렁 내밀면 부모님이 놀라 쓰러질지도 몰랐다. 엄마는 내심 기뻐할지 몰라도 아버지는 확실히 다를 터였다. 부유한 사위가 괜히 더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런 걸 다…! 내친김에 지금 구울까?”
다정이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엄마가 고생하는 건 딱 싫어서였다.
“이미 상다리가 휘어지겠어.”
“그런가.”
헤헤, 웃어 보이는 엄마의 얼굴이 소녀 같았다. 긴장하면서도 기분 좋아 보이는 부모님을 보자 다정의 마음도 괜스레 뭉클해졌다.
각자의 앞에 숟가락이 다 놓이자마자, 성후가 말했다.
“딸을 주십시오. 결혼하고 싶습니다.”
모두 깜짝 놀란 가운데, 의외로 명정이 차분하게 반문했다.
“손가락은 어때요?”
“아직… 치료가 필요합니다.”
“치료는 미국에서 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결혼하면 해외에 가서 살 생각인가요?”
외동딸을 멀리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 역시 이미 해봤던 명정이었다.
성후와 다정도 그러한 얘기를 나눠봤지만, 아직 결론이 나와서 명확하게 돌려줄 답은 없었다.
다정이 먼저 솔직하게 말했다.
“고민 중이에요.”
“흐응…”
경환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했다.
“제가 만약 외국에 나가서 산다면…, 이 결혼 반대하실 거예요?”
다정이 익살스러운 얼굴로 긴장을 감추면서 물었다.
“그럴 리가! 단지…”
명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조금 섭섭할 뿐이야. 바늘 가는 데 실 가야지. 그게 결혼이지.”
“아빠 생각도 같아. 가족끼리 떨어져 사는 건… 아니야. 절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저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살피면서 심사숙고하겠습니다.”
그러자 명정이 조금은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섭섭은 하지만, 최대한 두 사람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병은 빨리 고치는 게 맞아요. 그러니까, 마 서방… 치료에 전념하는 쪽에 의견을 보탤게요.”
경환도 고개를 주억였다. 동시에 식탁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입안이 씁쓸했다.
“자. 결혼은 당연히 오케이! 당신은요?”
가족들에겐 상냥한 경환이지만, 예비 사위는 아직 어색했다. 그런 그가 용기 내어 말했다.
“자네를 위해서 장모가 새벽같이 준비한 음식이니, 맛있게 들어주면 좋겠네.”
결혼이란 대사에 한 걸음 전진한 순간이었다.
*
“후….”
“긴장됩니까?”
부모님 집에서 나왔을 때 하늘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완전요.”
다정이 기운 없이 말했다. 성후의 성미는 불도저 같아서, 결정을 내리면 거침없이 돌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 순간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 닥쳤다. 갖춰 입느라 따뜻하게 입지 못한 다정이 부르르 몸을 떠는 순간 성후가 커다란 코트 안으로 그녀를 쏙 집어넣었다.
“작기도 해라.”
“성후 씨가 지나치게 큰 거예요.”
대한민국 평균 키에 속하는 그녀를, 어린아이 보듯 성후가 내려보았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죠.”
“이 남자가 정말…!”
그때 다정의 집 앞으로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세워졌다. 운전석엔 연석이 앉아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가 짧게 묵례한 뒤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타시죠. 사모님.”
“사, 사모?”
다정의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 쳤다.
“그러지 말아요, 제발.”
“사모님이 되셨으니까, 사모님이라고 한 건데, 사모님이란 단어에 무슨 나쁜 트라우마라도? 그런 것이 없다면 저는 원칙대로 사모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만. 도저히 듣기가 어렵겠습니까, 사모님?”
속사포로 말하는 연석의 농에 성후가 낮게 큭 웃었다. 다정은 ‘사모님’ 파도에 밀려 얼른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성후도 그녀의 곁에 앉아 연석에게 말했다.
“어떻게 온 거지?”
그가 부른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귀한 걸음 하시는데, 중국까진 모셔다드리지 못해도 공항까지는 편히 모시고자 왔습니다.”
“오.”
성후가 기특하다는 듯 눈을 번쩍 뜨자, 연석이 재빨리 덧붙였다.
“사모님을요.”
다정에게 향하는 호의는 모든 다 좋았다. 성후가 검지로 연석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그 자세 칭찬해. 보상으로 보너스를 주지.”
“주신다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거절하겠다면 네 뜻을 존중하지.”
“이런. 대놓고 말하겠습니다. 물질적인 보상은 언제나 오예입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연석의 재미있는 대답에 다정이 큭큭 웃었다. 그녀가 웃으니 성후와 연석의 마음도 조금 편안해졌다.
연석이 다정을 불렀다.
“사모님?”
“아, 네, 비서님!”
다정도 ‘님’자를 붙여 돌려주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전혀 걱정할 거 없으니 편하게 다녀오세요.”
연석이 룸미러로 힐끔, 성후의 눈을 보았다. 성후가 잘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럴까요.”
다정이 자신 없는 투로 대답하자, 이번엔 연석이 목소리에 힘을 줘 말했다.
“모두가 사모님을 반길 겁니다.”
곁에 있는 무시무시한 남자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둔 상태거든요. 다음 말을 삼키고 눈으로만 싱긋 웃는 연석이다. 다정도 용기를 얻어 고개를 주억였다.
“고마워요.”
급하게 오느라 전용기 이용이 어려워졌다. 다정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무관한 소음에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탑승구로 가는 동안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비즈니스석은 텅텅 비어있었다.
“전세… 냈어요?”
“네, 편히 갔으면 해서 말입니다.”
성후의 부유한 배려에 다정이 그를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그거 고맙군요.”
덕분에 고요한 좌석에서 적대감 잔뜩 실린 유리를 떠올리는 데 무척이나 도움 되었다.
성후는 어두운 얼굴의 다정이 신경 쓰여 물었다.
“뭐가 제일 걱정 됩니까?”
짐작은 됐다.
“마유리 씨요.”
다정이 솔직하게 말했다.
“유리가 왜요?”
성후가 능청을 떨었다. 다정은 고민 없이 다른 말을 늘어놓았다.
“각별한 남매 사이라고 들어서요.”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성후가 다정을 떠보자, 그녀가 제법 뻔뻔한 얼굴로 거짓을 말했다.
“네.”
“으흥…”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다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차피 제 손바닥에 있는 그녀지만, 까딱하다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과도 같아서, 그도 말을 아꼈다.
대신 유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리는, 부모님이 재혼하셔서 만난 동생입니다.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네.”
“부모님의 재혼을 받아들이고도 그 아이와 잘 지낼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후가 유리와 있었던 여러 가지 일화를 풀어 놓았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절. 툭 하면 집 안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던 성후로 인해 당시 겁이 많았던 유리가 피해를 많이 봤다고 전했다.
같은 재단의 학교에 다니면서도 외면했던 동생이었는데, 저로 인해 다시 이혼하면 안 되겠느냐며 선화에게 매달리던 유리를 봤던 날.
성후는 새 가족의 균열에 대해 가책을 느꼈다.
유리는 미국에 적응하지 못했다. 동급생들의 조롱도 심했고 영리한 아이였지만, 늦게 배운 외국어로 인해 수업을 따라가기도 힘들어했었다. 거기에 집안까지 시끄러우니 어린 소녀가 버거워 우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성후가 제일 먼저 한 건 유리를 괴롭히던 흑인 꼬마를 흠씬 패주는 것이었다. 또 그녀를 무시하던 다른 친구들이나 방관하던 선생님에게까지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설을 퍼부어주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날 이후 유리가 성후에게 조금씩 다가왔다.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다가 필요시 공모자나 방패를 자처하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제일 친한 친구인 거군요. 두 사람.”
남매의 이야기를 들은 다정은, 저부터 먼저 마음을 달리 먹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닙니다.”
성후가 딱 잘라 말한다.
“가족입니다.”
“아.”
“실컷 떠들고 나니 벌써 도착했군요.”
성후의 시선이 조그마한 창문으로 향했고, 그 시선을 다정도 따랐을 때였다.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고 곧이어 항공로를 관통하던 동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속도가 저하되는 것을 느끼며 다정이 침음을 삼켰다.
활주로를 달리는 소음과 진동이 꼭 다정의 심장 소리 같았다. 그래도 괜찮다.
“갑시다. 부인.”
든든한 예비 남편이 곁에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