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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72화 (72/82)

?72화. 나랑 결혼할 거죠?

어젯밤. 식욕이 떨어졌다고 말하던 다정에게, 결국 소고기 국밥을 먹이지 못했다. 성후는 명호의 것만 포장해 와 휴게실에서 은밀히 소고기 국밥을 건넸다.

‘꼴통. 갓 만에 이쁜 짓 좀 하네.’

그러면서 한술 뜨고 캑캑거리는 명호를 보며 성후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명호는 이렇게 맛있는 국밥은 생전 처음이라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라도 기뻐해 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슴 한편엔, 씁쓸한 기분을 억누르며 방긋 웃는 다정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배달요?”

“그래.”

“…굳이?”

성후는 말 대신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우두둑- 우두둑-. 야위어 가는 연인에 대한 걱정은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음. 그 집 국밥이 그리 맛있다니, 갑자기 저도 막 먹고 싶어지는 걸요? 하하. 온 선생님 덕분에 저도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겠군요. 기뻐라. 아하하.”

연석은 입으로만 웃으며 얼른 자리를 떠났다. 위치도 애매한 곳에 있는 소박한 식당에 들러, 소고기 국밥을 포장했다. 하는 김에 2인분. 제가 먹은 것까지 3인분의 금액을 성후의 카드로 계산했다. 식당 주인이 실수로 ‘0’ 하나를 더 붙이길 바랐지만, 소망에 그쳤다.

은명 대학 병원, 정형외과 병동을 찾았다. 간호사 스테이션엔 컴퓨터에 무언가를 열심히 입력하는 부연만이 보일 뿐이었다.

똑똑.

데스크를 두드리자, 부연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올렸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인사한다.

“아,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식사하셨습니까.”

“아니요.”

“먹고 하세요.”

제 식사를 몇 번이고 챙겨주는 연석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았다. 연유 모를 그의 행동이 자꾸만 간사한 희망을 품도록 만들었다.

“제 거까지 사 온 거예요?”

그 기대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물음이었다. 연석은 짧게 생각했다. 그가 판단하는 부연은 공주과. 그래서 귀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쉽게 받아 주었다간 그 끝도 좋지 않을 거라 짐작되었다.

뇌피셜일 뿐인지 몰라도 의외로 관계를 맺는데 신중한 연석은 어려운 만남을 위한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사 오는 김에.”

연석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그래서 대충 살아봤습니까?”

“원래도 열심히 살진 않았네요….”

늘 간만 보는 남자에게 절로 토라진 말투로 말해 버렸다. 뱉고 나서 움찔했지만, 그녀는 일부러 더 당당한 척 고개를 치켜들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는 봤고요?”

“그건…”

“당신을 먼저 사랑하세요. 그리고 다른 건, 그다음입니다.”

연석이 발길을 돌리자, 부연이 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려고 하는데…!”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틀자,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부연이 조그맣게 덧붙였다.

“내가 아닌 그쪽만 보인다고요…. 어떻게 하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건지… 저 정말 모르겠어요.”

얇은 입술로 자신 없게 우물거리는 것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연석의 심장이 간질거린다.

쉽게 시작해, 나도 쉽게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신 선생님, 우리 천천히 가죠. 천천히.

* * *

“잘 먹었어요.”

다정은 퇴근하며 가뿐하게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진짜?

“네. 완전 맛집 인정. 혼자 먹으면 왠지 다른 간호사한테 미안했을 텐데, 신 선생님 것도 같이 사주셔서 마음 편하게 먹었어요. 고마워요.”

-음….

“오늘도 성후 씨가 병실을 지키시는 거죠?”

-아닙니다만?

“응?”

-연석이 두고 나왔습니다.

“어디 가세요?”

그때 빵- 하는 경적이 들렸다. 다정이 고개를 돌리자, 보조석 창문이 조용히 내려간다. 고개를 빼꼼 트는 성후가 보였다.

“탑시다. 추워요!”

살을 에는 날씨는 무섭도록 다정의 피부로 파고들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봄과 다르지 않았다. 다정은 방긋 웃으며 성후의 차에 올랐다.

“따뜻해!”

성후가 미리 시트에 열을 올려둔 덕분에 다정이 코를 찡그리며 감복했다.

“엉뜨는 누가 개발했는지, 노벨상 받아야 해요.”

그러면서 언 손을 후후 불어 비비는 그녀다. 성후는 뒷좌석으로 몸을 돌려, 작은 종이가방을 건넸다.

“열어 봐요.”

“오호… 기대되는데요?”

장난스레 가방을 열던 그녀가 검은색 포장 각을 터프하게 뜯는다. 그 속에는 하얀색 앙고라 장갑이 들어가 있었다. 손목 위를 덮는 부분엔 검은 띠가 둘려져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엔 검은 샤넬 로고가 입체적으로 달려있었다.

“흰색은… 때 많이 타는데.”

고가의 선물에 어쩔 줄 몰랐으며 성후를 바라보자,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백 개고 천 개고 다시 사줄 수 있습니다. 편하게 써요.”

다정이 부드러운 앙고라 털을 만지작거리다 제 품에 안았다.

“잘 쓸게요. 고마워요.”

찬바람 앞에 방치된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던 다정을 보면서 계속 사주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해 가슴 한구석 초조함을 지닌 채 겨울을 보내고 있었는데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건넬 수 있게 되어, 성후도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럼 출발합니다.”

다정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훈기가 서로를 감쌌다.

겪었던 것 중,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다.

집 앞에서 내린 다정이 경악했다.

“이게 다 뭐예요?”

“아 그게…”

트렁크를 열어 보인 성후가 멋쩍게 볼을 긁었다.

“장갑 하나 사려고 갔는데 딱, 정말 딱, 다정 씨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이 얼마나 많던지……”

말끝을 흐리는 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잘못한 건가? 이게 아닌가?

여자에게 선물이란 걸 처음 해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했던 선물은 연석에게 시켜 대충 보냈었다. 심지어 그 선물의 내용물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가 더 많았다.

넘치게 가지고도, 무언가를 해준다는 개념은 성후에게도 낯설었다. 그래 봤자 고작 옷가지일 뿐인데 마음을 담으니 모든 게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트렁크를 빽빽하게 채운 검은색 종이가방을 보는 다정의 턱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것도 설마 다 샤넬이에요?”

성후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짧게 대답한다.

“아마도?”

“와우….”

남다른 클래스에 다시 한번 놀라는 그녀다.

“받아, 주실 거죠?”

“안 받으면요. 환불하러 가실 거예요? 내 손 잡고? 착하게?”

다정이 묻자, 성후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환불? 그런 걸 실제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다정의 어지러워진 머리를 짚으며 대꾸했다.

“갑자기 우리 사이가 굉장히 멀게 느껴지네요.”

“아. 그렇다면 당장 버리겠습니다.”

성후가 황급히, 거칠게, 종이가방들을 낚아채자 다정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진심인 거 같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 속물인 거!”

그녀가 어색하게 외쳤다.

“하! 완전 기분 좋아! 그, 그러니까 이게 다 제 거 맞죠?!”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성후가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천진하게 웃는다.

“혼자 다 들긴 팔이 모자라는데, 같이 좀 들어주세요.”

“무, 물론 그래야죠. 내 건데! 아하, 아하하. 기분… 조오타…”

종이봉투가 두 사람을 들고…, 아니, 아니, 두 사람이 종이봉투를 들고 낑낑거리며 6층 계단을 올랐다. 그리 무겁진 않지만, 지치긴 했다.

다음엔 아무리 다정 씨에게 사주고 싶은 것이 생겨도 적당ㅎ…

성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는 명품을 짜장면처럼 배달시킬 수 있는 남자였다. 쇼핑에 돈을 쓴 게 오랜만이라 그 사실을 망각했을 뿐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가 진지한 얼굴로 제 턱을 매만졌을 때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온 다정이 샴푸 향을 풍기며 물어왔다.

“뭐가요?”

말갛고 무방비한 얼굴이 이토록 고혹적이다니. 모두 다정이 가르쳐 준 것이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성후의 눈빛이 뜨거워, 다정이 얼른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나는 주머니가 가벼워, 줄 것도 없는데. 맥주 어때요?”

“술 마시면 힘들 텐데.”

“네?”

“오래가거든요. 제가.”

“하. 하하하. 하하하하…”

다정이 어색하게 웃을 때 베토벤의 운명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다정에게 다가가던 성후가 움찔한다. 전화 따위 받고 싶지 않지만, 발신인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여보세요.”

-바쁘니?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은 선화였다. 늘 자신과 가족의 매끄러운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말씀하세요.”

입으로는 대답하면서, 눈길은 다정의 새하얀 목덜미에 머물러있다. 놀란 다정이 핑크색 잠옷 카라를 여몄다.

-다정 양이랑 중국에 한 번 들어 와.

“네…??”

-아버지가 진작 말씀하셨는데 유리랑 얘기를 끝내고 전화한다는 게 좀 늦어졌네. 유리 고집 꺾는 데 시일이 걸렸어.

“고집이라…”

-말도 마. 네가 봤어야 해.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틀 전에 집에 와서 말하더라고. 네가 누구를 만나든 관여하지 않겠다고.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만… 네가 봐줘. 다 오빠를 너무 사랑한 철없는 여동생의 질투라고 여겨줬으면 좋겠구나.

성후가 조금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사실 이틀 전 아침. 유리가 머문다는 호텔에 찾아갔었다. 처음엔 당황했던 유리가 이내 그 여자는 아니라며 악을 써댔다. 유리가 쏟아내는 말 사태에 잠자코 파묻혀 있던 성후는 재킷 주머니에 있던 칼을 꺼내 들었다.

‘그, 그거로 뭘 하려고?’

성후가 무표정하게 칼을 제 손가락 마디에 갖다 대었다. 동물 가죽을 벗길 때 쓴다던 스위스산 나이프는 역시나 예민했다. 조금만 스쳐도 피가 줄줄 나오는 것을 보며 유리가 경악하며 성후에게 쫓아왔다.

‘그만해…!’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유리야. 네가 어떻게 하면 멈출까 해서.’

‘알았어, 오빠 알았으니까…!’

‘네가 가장 사랑한다던 내가 완전히 망가지는 게 확실한 브레이크 같았거든.’

아버지도 백기를 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유리를 설득하고 있었지만, 동생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굳건하다 전해 들었었다.

유리의 수족이 성실하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유리는 그날 오후 다정의 부모를 찾아가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잔인한 협박을 늘어놓을 계획이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오빠아!!!’

실컷 오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바닥에 나이프를 던졌을 때 맥이 풀린 유리가 주저앉았다. 저를 사랑하는 마음을 볼모로 협박한 것은 조금 미안했지만, 더는 다정을 위협하지 않도록 다소 과격한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잘 지내지 못해도 좋아. 아니, 미워하는 마음 역시 네 자유니까 존중할게. 단. 다정 씨를 건드린다면 그게 너라도 용서 못 할 것 같다.’

선화와 통화를 끝낸 성후가 다정에게 말했다.

“나랑 결혼할 거죠?”

확언하는 말투에 다정이 코웃음 쳤다.

“전 아직 아무 대답도 안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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