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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71화 (71/82)
  • ?71화. 결국, 돌아올 곳

    너무했다는 듯 웃는 다정이다. 연석도 정수리를 문지르며 은밀히 성후를 노려보았다.

    “눈 깔아라?”

    “…칫.”

    주먹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눈빛도 아프냐며 따지고 싶지만, 연석은 능숙하게 불만을 삼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차피 교대시간. 성후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딘가. 회사로 치면, 근래 외근이 잦아 진상 상사 얼굴을 거의 보지 않아도 되는 격이다.

    연석의 시선이 명호에게 잠깐 머무른다.

    …물론, 진상 상사를 자주 봐도 좋으니 스승님이 건강하길 바라지만.

    “연석이 고생 많았다.”

    명호가 말했다. 그의 곁을 매일 지키다 보니, 더욱 정이 든 연석도 괜히 울컥해졌다.

    “네. 선생님. 내일 뵙겠습니다.”

    “전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다정이 말했다.

    “같이 갑시다.”

    성후가 동행을 자처하자,

    “윽.”

    연석이 진심을 짧게 내뱉어버렸다. 다시 무시무시한 눈길이 연석에게 닿았다.

    “그럼 오붓한 비상구 데이트 되십시오.”

    그 여느 때보다 깍듯하게 인사한 뒤 재빨리 나가버리는 연석이다.

    “올라오는 거 힘들어요. 여기 있어요.”

    “그래, 네 놈은 여기 있어.”

    명호가 말했다.

    “왜요?”

    그가 삐딱하게 묻자, 명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할 말 있으니까!”

    “음. 그럼 다정 씨 밖에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나갈게요.”

    명호에게 대답하는 대신, 다정에게 친절히 웃어 보이는 성후다.

    “쿡쿡. 네.”

    병동 바로 옆 방은 휴게실이었다. 여느 병동과 비슷한 휴게실에서 유일하게 다른 건, 안마 의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안마 의자가 뻗치는 유혹은 강렬했지만, 다정은 애써 외면했다. 언제 말기 암 환자가 올지 모르는데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바로 옆 방, 그러니까 명호의 방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어?!! 내 말이 틀렸냐, 이놈아!! 정신이 있어, 없어?!”

    “알겠으니까, 선생님 목소리 좀 낮추시라고요!”

    성후가 난처한 목소리로 명호를 만류하는 소리가 들린다.

    “낮추긴 뭘 낮춰!! 왜!! 온 선생이 들을까 걱정되냐?! 꼴에 고추 달고 나온 놈이라고 제 여자 앞에서는 부끄럽다 이거냐?!”

    “선생님…!”

    바닥이 진동으로 울릴 만큼 쿵쾅쿵쾅 빠른 뜀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병동 문이 쾅 닫혔다. 그럼에도 고함이 새어 나왔다. 불분명해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지만, 명호가 성후를 호되게 훈계하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쿡쿡쿡…”

    저렇게 덩치 큰 다 자란 남자도 쩔쩔맬 때가 있다는 게 우스웠다. 한편으론 가슴이 뻐근해졌다. 막역하게 대해주는 존재에 대한 고마움. 그 몇 안 되는 소중한 존재 중 한 분을, 성후는 떠나보내야 하니까 말이다.

    언제쯤 그가 나오려나, 신경 쓰여 병실 앞으로 다가왔다. 곧 슬그머니 문이 열리고 헉헉 숨을 고르는 성후와 눈이 딱 마주쳤다. 턱 끝에 맺힌 땀을 훔치며 그가 웃었다. 마치 농구 코트에서 경기를 끝내고 막 나온 유망한 선수 같았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병실 문에서 가장 자리가 멀었던 명호의 병상. 그럼에도 그가 내지르는 소리는 우렁찼다.

    “아무래도 오진이 틀림없습니다.”

    성후가 흐트러진 셔츠 깃을 추스르며 덧붙였다.

    “철도 씹어 드실 것 같지 않습니까.”

    발꿈치를 든 다정이 산만해진 성후의 머리칼도 슥슥 정리해주었다. 꼭 덩치는 크지만 순해 빠진 충견이 된 것만 같았다. 덩달아, 아름다운 주인에게 사랑받는 느낌도 근사했다.

    그때였다.

    “내 말 듣고 있냐?! 미루지 말라고, 하라고!! 결혼!!!”

    “음?”

    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들으셨죠?”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들어버렸네요.”

    다정이 혀를 날름 내밀며 웃었다.

    “오늘은 데려다주겠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혼자 계셔야 하잖아요.”

    “올라간 혈압을 낮추려면, 잠시 저를 안 보시는 편이 나을 것 같거든요. 어떠신가요. 전문가의 의견은.”

    진지함을 가장한 성후의 물음에 다정이 위엄 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의해요.”

    두 사람은 눈을 맞춰 웃었다.

    “식사는 했습니까.”

    성후의 차에 올라, 그가 다정의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말했다.

    “네… 니오?”

    그가 픽 웃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사실은 생각 없이 굶고 와서…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이라도 사 먹을까 했었거든요.”

    “그럼 배고프다 말을 하지.”

    “굳이 신경 쓰시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굳이 신경 쓰는 게 남친이고, 연애입니다.”

    “음… 병동에 누워계시는 분 중 식사를 못 하시는 분이 더 많은데 밥 타령하기가….”

    성후 혹은 명호만을 신경 썼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다정에게 성후는 오늘도 감탄했다. 늘 자신만, 자기 앞길만 보던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른 여자였다. 어째서 사람의 영혼이 이리도 맑을 수 있을까. 색깔로 치자면 다정은 투명이다.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괜찮아요. 집에 가서 간단히 먹으면 돼요.”

    “싫습니다.”

    성후가 페달을 밟았다.

    “살찌는 거 먹일 겁니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그가 물어왔다.

    “빠졌죠, 살?”

    “아니요!”

    “빠졌는데. 한…”

    성후의 시선이 빠르게 다정을 훑는다.

    “3kg?”

    정확하다. 홀딱 벗겨진 기분에 다정은 코트 깃을 여미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성후가 낮게 키들거렸다.

    “웃지 마요….”

    3kg 차이가 뭐라고. 풀 컵 브래지어 윗부분이 살짝 비는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거울을 볼 때마다 안 돼, 이건 아니야, 여자는 볼륨이라구! 하면서 절규했던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별 뜻 없는 웃음이란 건 알겠는데, 꼭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들킨 것처럼 잘생긴 성후의 입꼬리가 미워졌다.

    “노려보지 맙시다.”

    다정을 보지도 않고 다정에게 말하는 성후다. 그녀는 보란 듯이 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성후가 다정에게 손을 뻗더니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급정거 되며 몸이 쏠렸고 성후의 단단한 손에 다정의 몸이 받쳐졌다.

    “여차하면 여기서 잡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그걸, 바랍니까?”

    원하는 게 그거라면 언제든지 들어주겠다는 눈빛이었다. 다정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성후가 다시 큭큭 웃으며 신호를 쳐다보았다.

    신호는 여전히 빨간 불.

    다정에게 다가온 성후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다정이 슬쩍 성후의 가슴팍을 밀었지만, 그는 백 년 된 고목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연쇄적으로 들렸을 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겨우 멀어졌다.

    두근두근.

    밤이 내려앉은 도시의 소음이 뛰는 심장 소리에 묻혀 적요해졌다. 고요했던 세상이 소리를 찾았을 땐, 성후의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시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좁은 골목을 몇 번 꺾자 숨어있던 식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간판은 화려하지만, 촌스러웠다.

    “여기가…?”

    “아.”

    성후는 명호와 나란히 텔레비전을 보던 장면을 떠올렸다. 병실 안에서 보기엔 눈치가 보여, 휴게실에 앉아 보던 먹방 프로그램은 명호와 성후의 눈을 벌겋게 만들었다.

    ‘채널 돌릴까요?’

    맘껏 먹지 못하는 명호가 걱정되어 물었었다.

    ‘놔둬 봐. 눈으로 먹고 있잖아.’

    ‘하….’

    조붓한 식당 안에 다닥다닥 앉아 있는 손님들 만면에 퍼진 행복의 기운. 음식도 음식이지만, 저리도 좋을까 싶어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곳이 바로 여기 소고기 국밥집이었다.

    ‘저거 먹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

    무식한 짓인 줄 알지만, 단 한술이라도 명호에게 바치고 싶었다. 또 다정에겐, 맛있는 음식이 주는 행복을 선물하고 싶었다.

    “와-”

    다정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 크. 미쳤어요.”

    그래 그 미소. 성후도 덩달아 기분 좋게 웃는데, 샷시 문을 밀고 나오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우석이었다.

    동행은 없었다. 그제야 다정이 떠오르는 한 가지. 이곳은 우석이 사는 동네였다. 어쩐지, 방금 거닐었던 골목도 낯설지가 않았었다.

    “우석아…”

    우석은 고개를 획 돌렸다. 완전히 남인 것처럼 등을 돌린 채 곧장 걸어가는 뒷모습이 눈에 박혔다. 다정의 마음에 차가운 한기가 든다. 그녀가 흐린 얼굴로 성후를 올려다보자,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정은 그대로 달렸다.

    “우석아!”

    벌써 저만치 멀어진 친구를 붙잡기 위해 심장이 터지라 속도를 높였다. 인기척을 들은 우석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우뚝 멈췄다. 다정이 흐트러진 숨을 고른 뒤 사그라들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우석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뭐가.”

    “안녕이라고… 말해서 미안하다고.”

    “됐어.”

    우석이 느리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다 돌리지 않고 비스듬히 서서 말했다.

    “나도 이제 너… 친구로 볼 자신 없으니까.”

    “친구로 보지 마.”

    “뭐?”

    “너는 나 여자로 보고, 나는 그냥 너, 기우석으로 볼게. 남자로 봐주진 못해도 친구 하자며 네 마음 후벼 파는 짓은 하지 않을게. 그냥… 너라는 사람을 평생 못 보고 산다고 생각하니…”

    정신없는 일상 속에 문득문득 떠올라 다정의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던 상대. 우린 친구도 연인도 될 수 없으니까, 참아야지, 참아야지, '참을 인' 자만 무식하게 새겨보던 어느 날 깨달은 한 가지.

    왜 참아야 하지? 어차피 아플 거 보면서 아프면 안 될까? 꼭 원수라도 진 것처럼 우리가 정말… 절연해야 맞는 걸까?

    “…괴로웠어. 무진장.”

    “하.”

    “나쁜 년이라고 욕해도 좋아. 네가 싫다면 물론, 그냥 괴롭고 말 거야. 하지만 말이라도 해보려고. 간단한 인사 한마디에 헤어지기엔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너무 길잖아.”

    다정은 젖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 목소리 끝도 희미하게 떨리며 나왔다. 우석이 완전히 몸을 돌려 낮게 말했다.

    “돌아가. 기다리잖아. 네… 남자친구.”

    우석의 눈에 성후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곧 있으면 그가 완전히 다다를 것이다.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아니다. 결국 저 자에게 다정을 보내야만 하는 공허가 우석의 가슴을 아프게 도려냈다. 그 뻔한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정해져 있는 결론 앞에 이제는 홀로 다치고 싶지가 않다.

    “…가.”

    “생각해 봐. 일 년… 아니, 십 년, 이 십 년. 평생을 걸쳐서라도. 난 언제나 네 사람으로 남을 준비가 돼 있어.”

    다정과 우석의 대화를 들으며 걸어왔던 성후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예전처럼 안달 난 자의 초조함이나 가진 자의 건방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테면 비가 내린 뒤 땅이 굳어진 것처럼, 그는 단단해 보였다.

    그만큼 굳건해졌구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참패다.

    “다정아.”

    우석은 긴말하지 않고 짧게 말했다.

    “행복해.”

    너저분한 마음속 유일하게 깨끗한 진심을 꺼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는 함께 있는 게 당연한, 너무도 잘 어울리는 커플을 두고서 우석은 멀어져갔다.

    마치 방금 본 우석의 모습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양, 멀어져 가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다정이다.

    그런 그녀에게 성후가 다가왔다.

    “…어찌합니까.”

    성후도 많이 자랐다. 이 순간 질투를 뛰어넘은 그는, 오롯이- 소중한 친구와 멀어져 상실했을 다정의 슬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녀가 울먹거리며 말한다.

    “성후 씨한테도 미안해요. 이런 모습 보이는 게 아닌데.”

    성후가 허리를 굽혀 다정과 시선을 맞췄다. 방울방울 맺혀져 있는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그가 하나하나 주워주었다. 그러면서 느긋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당신의 집이니까.”

    방랑해봤자 돌아올 곳은 결국, ‘여기’라고 그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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