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불가항력적 연(緣)
“이 화상.”
연석과 얘기하던 명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마성후 그놈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대체 내가 죽는 거랑 지 놈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결혼을 미뤄, 미루길. 허!”
명호는 성후의 행동이 자신의 존엄을 방해한다 여겼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지막 가는 길에 제 마음을 이리 무겁게 할 순 없을 것이다.
“고정하세요.”
“너도 똑같은 놈이야!”
갑자기 불똥이 연석에게 튀었다. 연석이 무고한 눈빛으로 명호를 바라보자, 그가 버럭 소리쳤다.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
“형님 마음이 이해가 되어서…”
죽음에 다가가는 스승을 두고, 차마 행복할 자신이 없다는 성후의 말에 깊이 공감했던 연석이었다.
“에라이! 퉤! 딱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저주하듯 검지로 연석을 가리키는 명호다. 연석은 연유를 몰라 입매를 굳힌 채 고개를 갸웃했다. 험한 말을 듣는 건 일상다반사여서,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내키지 않을 뿐이었다.
마성후 나물의 밥이 되고 싶진 않아서였다.
“내가 곧 죽는다면, 결혼을 미룰 것이 아니라, 결혼을 서둘러야지!”
콜록콜록. 격앙된 그가 기침을 연발하자, 피가 섞인 가래가 튀어나왔다. 연석은 깜짝 놀라 손수건을 건넸다.
“선생님!”
명호는 연석이 건넨 손수건을 단박에 내팽개치고 티슈를 뽑아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여차하면 한 성깔 하는 것이 과연 성후의 스승이었다.
기침을 그친 그가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별안간 벼락처럼 소리쳤다.
“곧 뒈지는 노친네는, 살아생전 제 새끼 결혼식 볼 자격도 없다는 거냐?! 내가 죽어, 마성후 그놈 장가가는 꼴을 하늘에서 봐야 직성이 풀리겠느냐고!”
* * *
성후가 떠난 자리엔, 고뇌가 짙게 깔렸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결재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태다. 하얀 종이 위에 울렁이는 활자들을 보다 못한 그가 결재 서류를 신문지처럼 구겼다.
똑똑.
예민해질 때로 예민해져, 날 선 시선이 문가에 닿는다. 둔탁한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부드러운 얼굴의 선화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원목 트레이가, 트레이 위에는 청명 다기 세트가 들려 있었다.
“차 한잔 어때요?”
평소와 다름없는 선화를 보자 골치 아팠던 문제가 잠시간 잊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지.”
기태는 소파 상석에 앉았고, 선화는 그 대각선 자리에 앉아 하얀 꽃무늬가 들어간 도자기 잔에 우린 꽃차를 적당히 부어주었다. 기태가 그것을 들었을 때, 선화가 말했다.
“성후. 다녀갔다면서요?”
“콜록, 콜록…!”
성후의 ‘성’자만 들어도 치명적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선화는 그런 남편을 이해한다는 듯 그의 등을 쓸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 아이들을 존중해주는 게 어때요. 우리도 뜨겁게 사랑해서 이룬 가정이니, 누구보다 아이들을 이해해줄 수 있잖아요.”
“이해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야. 어쨌든 여러모로 기분 나쁜 일들에 휘말린 것도 사실이고. 또. 눈에 차지 않는 여자를 데리고 왔으면 정색하고 덤벼들 일이 아니라 설득을 해야지! 자세가 틀렸잖아!”
“그러는 당신은. 아버님 살아계실 때, 설득하셨어요?”
태연하게 방긋 웃는 선화. 마냥 상냥한 사람 같다가도 정곡을 찌를 땐 그 방법이 무척 세련됐다.
“아니잖아요. 그토록 반대했던 분을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렵게 이룬 가정이잖아요.”
“여보.”
기태가 미안한 눈을 하자, 선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리도 당신도 생각이 너무 지나쳐요. 저한테 다정 양은, 환한 전구처럼 눈부셔 반짝반짝 예쁘고 특별하기만 하다고요.”
“특별?”
선화는 어린 다정과 만났었던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다.
“얼음장처럼 냉랭하게 굴었던 성후를 단숨에 바뀌게 한 소녀가 바로 다정 양이었어요. 성후가 처음으로 절 받아 들여준 날 또한 그날이었죠. 그러니 제게 다정 양은 불운의 아이콘이 아니라, 행운의 아이콘이에요.”
“…그런 일이 있었군.”
“당신도 알잖아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요. 우리가 그 경험자라는 사실을 부디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화와 기태는 어릴 적 첫사랑이었다.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기태의 집은 어려서부터 부유했다. 막 부동산 붐이 일어나던 시기에 맨몸으로 집안을 일으킨 기태의 아버지는 혹독했던 가난이 싫어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던 인물이었다. 바꿔 말하면 욕심이 많았다.
그런 사람에게 선화는 자신의 운전기사 딸일 뿐, 아들의 처 자리로 용납될 리 없었다. 모자라도 백번 천번 더 모자랐다.
그러던 와중, 아버지가 결혼 상대로 밀어붙인 정계인사의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성후의 모친이었다. 당시 극악한 협박에 시달리던 선화가 기태에게 이별을 선고했고 기태는 망연한 심정으로 연경과 결혼을 했더랬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이었다.
성후가 태어났지만,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일과 술이 기태의 삶을 지탱했고 연경은 우울증으로 하루하루 말라 갔다.
성후의 말문이 트일 무렵. 가정에 충실하고자 마음먹었을 땐 이미 늦었다.
요양차 미국으로 건너가던 연경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고 그녀는… 화염에 휩싸여 그대로 즉사했다.
따라 죽고 싶었다.
연경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죄책감으로 질식하기 전에 먼저 목숨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똘망똘망한 성후의 눈빛 앞에 기태는 죽을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악착같이 살았다.
선화는 당시 여성 편력이 심각한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서기를 시작할 때였다. 그녀의 소식을 건너건너 듣고는 있었지만, 결단코 찾아가진 않았다. 비열한 기회주의자나 무책임한 아버지가 되고 싶진 않아서였다.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뒤 사업차 떠났던 프랑스에서 우연히 재회했을 때, 꾸역꾸역 흘려보낸 세월이 무의미할 정도로 두 사람은 멈출 수 없었다.
“여보….”
선화가 다시 애달프게 남편을 불렀다. 아들을 통해, 그때의 뜨거웠던 기억이 속에서 되살아났다.
기태는 스스로 연경에게도, 선화에게도 부족하고 죄 많은 남편이라 생각했다. 그건 성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당신 말대로 하지.”
기태의 말에 선화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화사해졌다.
“정말요??”
부부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성후와 다정의 이야기를 이어 했다. 정확히는 선화 혼자 신난 아이처럼 기쁘게 떠들었다. 선화의 들뜬 목소리에서 다정이란 아이를 향한 애정이 묻어났다.
오랜만이었다.
아이들 얘기를 이토록 오랫동안 한 것은. 기태는 그물그물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같이 들어오라고 해.”
이런. 눈이 완전히 감겨버렸다.
“네, 그럴게요.”
보지 않아도 아내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태의 입꼬리도 희미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유리는 어째서… 그리 기분 나빠하는 거지?”
“심각한 브라더 콤플렉스잖아요. 주변에 친구가 없어서 더 하죠.”
“흐음.”
“유리도 언젠가 제 짝을 만나면, 달라질 거예요.”
* * *
며칠째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바람 잘 날 일 없는 연애도 그랬지만, 일터마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가 과하게 다정의 눈치를 살핀 탓이었다. 그녀는 꼭, 자신이 성후가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다시 한번 느낀다.
마성후라는 방패 앞에 모든 역경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이후 남은 재를 처리하는 건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 안전만을 추구하다간 ‘인간 온다정’은 사라지고, ‘마성후의 여자’만 남을 것 같은 씁쓸한 예감이 들었다.
앞으론 더 조심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다정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부연이었다.
“잠깐 이리 와 봐.”
다정이 희미하게 미간을 모으자, 답답하다는 듯 작게 소리치는 부연이다.
“아 얼른!”
두 사람은 텅 빈 주사실로 향했다. 부연이 눈치를 보면서도 따지듯 물어왔다.
“성후 씨 비서님 말이야. 요즘 어디서 어떻게 지내? 응?”
다정은 픽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 병동에서 유일하게 저를 막역하게 대해주는 이가 있음에.
“아 왜 웃어. 빨리 말해. 나 처방 떨어진 거 처리하러 가야 해.”
부연은 조급해 보였다.
“글쎄. 나도 잘.”
“진짜? 진짜 몰라??”
사실은 안다. 연석은 성후와 교대로 명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부연에게 이런 사적인 영역까지 얘기해줄 순 없었다.
“모르지. 그분과는 거의 말도 섞어본 적이 없어서. 성후 씨한테 물어봐 줘?”
부연이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아니! 거기까지 바란 건 아니야! 그럼 나 간다??”
후다닥,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정이 큭 웃었다. 부연 덕분에 기분이 환기되었다. 퇴근 후 비누 공방에 들려 천연 비누를 구매했다. 갓난아기보다 연약한 피부를 가진 명호를 위해서였다.
호스피스 병동에 도착하자, 오늘은 연석이 명호의 곁을 지키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개의치 않고 명호에게 발걸음했다.
“온 선생!”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처럼, 명호가 다정을 환하게 반겼다. 다정이 방긋 웃는다.
“히터가 좀 답답하시죠? 그래도 창문은 열어두지 말아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큰일은. 더 살아봐야 며칠인데.”
다정이 비누를 협탁 위에 올려두며 말한다.
“아주 소중한 며칠이죠.”
능숙하게 명호를 상대하는 다정을 보는 연석의 눈동자에 경외심이 어렸다.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아 점점 붓기 시작하는 명호의 다리를 지극 정성으로 안마하고, 피곤한 그를 대신해 성경 구절을 읽어 주며, 적신 손수건으로 마른 얼굴과 입술을 닦아주었건만, 결혼을 미뤘다는 성후의 문제를 어째서인지 연석에게 연대하여 책임을 묻고 있었다. 틈만 나면 쏘아대는 통에, 아픈 환자를 상대로 대꾸할 말이 곤궁해 연석은 홀로 끙끙 앓았더랬다.
시선을 느낀 다정이 연석을 바라보며 짧게 웃는다.
“참. 연석 씨.”
“네?”
“신부연 간호사 알죠?”
“네.”
“안부 묻던데. 두 사람 원래 친했어요?”
부연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최근 들어 혼이 나간 듯 실수가 잦아진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다정은 이미 눈치챘더랬다. 물론 그 상대까지 짐작할 순 없었는데 오늘로써 명확해졌다.
깨끗한 이목구비에 시종일관 무감한 태도를 유지하는 바로 이 비서님이 바로 부연의 ‘그’라는 것을 말이다.
“오호라.”
명호도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연석은 웃을 듯 말 듯 한 기괴한 표정만 지을 뿐, 그 어떤 대답도 돌려주진 않았다.
그의 반응으로 보아, 쌍방 감정 교환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연석의 마음은 뭘까.
부연과 다른 걸까.
“그러지 말고 얘기해주세요.”
다정이 부드럽게 애원하자, 연석이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요.”
모처럼 타인의 연애사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을 때 어느새 다가온 그림자가 연석의 정수리를 아프게 콩 찧어 박았다.
“윽…!”
가녀린 여인과 같은 표정으로, 연석이 고개를 획 돌리자 성후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 보았다.
“…웃어?”
눈으로 사람을 찍어 눌릴 기세다.
“감히 내 여자한테… 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