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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69화 (69/82)

?69화. 협박 VS 협박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채, 다정이 말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있었어.”

성후의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당신, 내 거잖아요. 난 누가 내 거에 흠집 내는 거 싫습니다.”

“저 이만한 일에 흠집 안 나요.”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천천히 다정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그녀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일하면서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줄 아세요? 이런 일에 흠집날 것 같으면 진작 관뒀어요.”

사실은 아니다. 당할 때마다 며칠을 앓았다. 두려울 때도 있었고 사표를 던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살벌한 보호자의 등장으로 그간 지층처럼 쌓였던 상처들이 단박에 상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보잘것없는 화답을 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다고.

그러나 성후는 동요 없이 입매를 굳혔다. 아프지 않게 다정의 이마를 제 이마로 콩 찧으며 말했다.

“안 속습니다. 그런 거짓말.”

머쓱해진 다정이 괜히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래도 기분은 풀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성후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역시나 기특합니다.”

내가 안 반할 수가 없어요. 온다정 당신은.

“…뭐가요?”

“비밀.”

언제나 상대방 마음을 헤아리는 그 점이 말입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 배려심이 더 짙어지는 건, 사양이거든요.

*

CCTV를 나란히 보던 병원장이 몹시 속상하다는 듯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기조실장은 은밀히 혀끝을 찼다. 몰상식한 보호자라며 들으라는 듯 크게 혼잣말도 덧붙이며.

사실 두 사람은 오전에 이미 해당 사건을 보고 받았었다. 병원 내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 CCTV를 들고 마성후가 들이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기조실장님. 지금 욕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후가 물었다.

“네??”

기조실장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자, 병원장이 콕 집어 말했다.

“애초에 담당의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나. 그렇죠, 온 선생? 온 선생이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다.”

단둘이 있을 때와는 달리 몹시 상냥하게 구는 병원장의 태도 앞에 다정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제 사람을 대신해, 제가 묻겠습니다.”

‘제 사람’.

그 단어엔, 다정이 가르니크의 사람이 될 거란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이런 일이 터지면, 늘 방관하셨습니까.”

성후의 묵직한 물음이 날아들자 병원장이 사색이 되어 변명에 나섰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러면서 힐끔, 기조실장을 쳐다본다. 폭탄을 넘기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데 선수인 기조실장도 바짝 주눅이 든 탓에 뇌가 단단히 굳어진 상태였다. 눈만 끔뻑거리자, 병원장이 못마땅하다는 듯 은밀하게 기조실장을 노려보았다.

“대책을 마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강요가 아니라 부탁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성후의 얼굴이 애달파 보였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보단, 간곡히 부탁하고 싶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그도 안다. VVIP 병실료를 얼마나 지급했든, 후원을 얼마나 했든, 어차피 자신은 외부인이란 사실을.

“…알겠습니다.”

진심이 전해졌길 바라는 성후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한 가지 더. 해결할 것이 남았기에.

“이제 선생님 뵈러 가시죠?”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신경 쓰인다면 안 그러셔도 돼요.”

그런 다정을 내려다보며 성후가 싱긋 웃는다.

“괜찮다면서요. 뭐. 괜찮아도 보이고.”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다정이 밉지 않게 그를 노려보자 성후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하며 속삭였다.

“오늘은 집에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평범한 얘기를 쓸데없이 달콤하게 한다는 생각을 하며, 다정이 얼굴을 붉혔다.

“아.”

“다정 씨는요?”

“음, 저도… 집에 일이 생겨서.”

그러면서 생글 웃는 다정이다. 서로의 속에 숨은 속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가 모른 척하는 형국이다.

“집에 잘 다녀오세요.”

“성후 씨도요.”

* * *

-그만하고 빨리 들어 와.

“일이 남았어요.”

그때. 유리의 수족이 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유리는 조심스레 봉투를 개봉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서류 속 정보들을 망막에 새길 듯 꼼꼼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때문에 엄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하. 유리야.

선화가 꾹 눌린 음성으로 딸을 불렀다. 유리는 보던 종이를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잠한 시선이 호텔 밖 풍경에 가 닿았다. 매서운 밤바람이 손으로도 만져질 듯, 서울을 뒤덮은 공기가 얼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꽁꽁 언 것은 제 마음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엄마도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어. 정말… 그러고 싶니?

그때였다. 호텔 벨이 울렸고 유리가 선화에게 말했다.

“손님 왔어요. 끊을게요.”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족이 둔중한 호텔 문을 부드럽게 열어주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새하얀 롱패딩을 입은 다정이 보였다. 코는 얼어 벌겠고 그녀의 주변엔 찬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들어 와요.”

한 시간 전. 다정에게 전화가 왔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제일 먼저 온 전화는 어제였다. 황당하게 파손한 공동 현관값 얘기를 하길래, 건물주와 만나 돈으로 간단히 협상을 끝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걸려 왔으니, 이번엔 웃기지도 않은 통유리 값을 얘기하기 위해 걸었던 전화가 아닐 것이다.

‘할 얘기가 있어요. 만날 수 있을까요?’

우선 본론부터 꺼내는 화법은 마음에 들었다. 다시 쓰는 높임말도 말이다.

‘그랜드 호텔 807호. 기다리고 있을게요.’

방으로 들어온 다정에게 유리가 눈으로 소파를 권했다. 다정은 다소곳이 앉아 그런 유리를 공정하게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찾아온 배포는 마음에 들었지만, 저 눈빛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결백을 주장하는 것처럼 또렷하고, 한 번도 상처받아 본 적 없는 것처럼 맑았으며, 그러면서 다 안다는 듯 애잔한.

“할 얘기가 뭐예요? 그날 돌아서는 모습은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는데.”

차분하게 말했지만, 곱지 않은 말투였다.

“일단 어제 날카롭게 말해서 죄송해요.”

진심인 듯하나 비굴과는 거리가 먼 사과에 유리가 픽 웃었다.

“사과가 무척 빠르시네요. 좀 경솔한 타입이신가 봐요.”

그러면서 다시 조그맣게 웃는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명호에게 얼핏 들었었다. 그녀가 성후의 친여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남매는 피가 섞인 진짜 남매보다 각별하다 들었다.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거 알아요.”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는 거죠?”

“적으로 돌릴 상대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제가 무슨 짓을 할까 봐 서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성후의 뒤에 숨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의 보호는 안온했지만, 지금 부딪히는 문제의 반은 다정의 몫이니 말이다.

“…많이 생각해봤어요. 주제 파악도 열심히 해봤고.”

“하루 동안요?”

‘겨우?’라는 뒷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네. 더 오래 생각해 볼 가치가 없었어요. 어차피 성후 씨를 포기할 순 없으니까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에, 유리 씨에게 진심을 호소하고자 해요.”

“진심… 이라.”

감성팔이라면 질색이다.

“오빠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는지 열거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오빠한테 목메는 여자들이야, 숱하게 봤거든요.”

“만약 성후 씨 마음이 저와 다르다면, 저희의 미래도 달라지겠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달라질 것 없는 얘기를… 왜 굳이 입 아프게 하시려고.”

“성후 씨에겐 제가 필요해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명호로 인해 무너지는 성후가 떠올랐다. 그런 그를 떠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명호가 아니더라도 성후는 무모하리만큼 저를 사랑했다.

그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고, 복받쳐 오르는 사랑을 주고 싶다.

“하.”

유리가 비소를 흘렸다.

“내가 온다정 씨 주변을 뒤흔든다면? 그래도 오빠 곁에 남을 자신, 있으세요?”

* * *

성후는 급히 중국으로 향했다. 명호의 곁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연석의 동행 없이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땅은 가까웠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보다 적게 드니, 문득 세상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머지않아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성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얼마 뒤 용이 세공된 정문으로 들어서는 성후의 표정이 비장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본 저택으로 들어서자, 아버지 서재 앞 소파에 앉아 있는 운용이 보였다. 연석의 부친이자, 가르니크만큼 오래된 아버지의 비서였다.

성후가 짧게 묵례하자, 운용이 굳은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머니는 중국에 없었고, 경호원을 제외한 도우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각이어서 저택 안은 황량하리만큼 고요했다.

“어쩐 일이냐.”

성후는 대답 없이 짧게 묵례했다. 성후 대신 운용이 서재 방문을 두드리자, 이윽고 기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용이 걱정스런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성후가 들어서자, 조용히 문을 닫는다.

“자주 보는구나.”

늦은 시각까지 결재 서류를 보고 있던 기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리, 한국에 왔더군요.”

올 것이 왔다는 듯 피곤한 얼굴로 제 목덜미를 주무르는 기태다.

“앉아라.”

“서서 말하겠습니다.”

기태의 미간이 얼핏 구겨졌다. 성질 급한 놈. 또 무슨 폭탄을 던지려고 그러는지 살짝 긴장도 되었다.

“말해 봐.”

기태도 중국에 들어온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베트남에 새로 공장을 가동하면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았다. 황무지에 떡 하니 돌아가는 공장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밀린 결재 서류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눅진하게 들러붙은 피로를 외면한 채 앉아 있는 것도 충분히 고역이었기에, 시한폭탄 같은 아들의 등장이 달갑지만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유리가 한국에서 무얼 하고 있더라.

반추해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아버지 딸이 내 여자를 협박하니까, 나는 아버지를 협박해야겠습니다.”

유리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그녀의 수족은 애초에 성후가 심은 자였다. 감시라기보다 보호를 위해서였다. 여동생을 향한 순수한 걱정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족은 오랫동안 성실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보고 상대는 연석이었다. 오늘 낮에 연석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유리가 다정을 찾아갔다는 얘기였다. 찾아간 데에서만 그친 게 아닌, 다정의 빌라 공동 현관문을 멋대로 부수기까지 했다고 전해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렇다고 아끼는 유리에게 직접 전인 위해를 가하고 싶진 않았다. 연애사완 별개로, 소중한 동생을 딱 한 번만 눈감아주기로 한 오빠의 마지막 인내였다.

중국행을 선택했던 것도 사실은 아버지와 가시적인 타협을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힘 없인 무력 그 자체인 유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에 들어온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연석이 아닌, 유리의 수족에게 직접 들은 내용에 의하면… 유리가 불과 네 시간 전, 다정을 협박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정의 가족을 볼모로 잡고서.

그렇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협박?”

기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최근엔 무서울 정도로 바빠 가족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유리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가르니크의 위상이 시궁창에 처박히게 될 겁니다.”

기태의 머리가 핑글 돌았다. 아들은 제 속도 모르고 막힘 없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제 친모에 관한 진실이 전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기태를 단숨에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충격적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성후의 협박이 실현된다면, 가르니크의 주식이 곤두박질을 치는 것은 물론, 가족 모두가 다치게 될 것이다. 또 그때의 악몽이 다시 저를 괴롭힐 것이다.

“너 그걸 말이라고…”

“평생을 조용히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틀렸어요. 가족, 혹은 걱정이란 이유로 가진 것을 휘두르고 무자비한 분들에겐, 저 역시 똑같은 놈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아들이 단단히 칼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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