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68화 (68/82)
  • ?68화. 살벌한 보호자.

    “확실히 전보다 좋아진 거 같습니다. 브라이언 박사님 치료 방법이 성후 씨에게 잘 듣나 봅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하는 성후의 눈동자에 아무런 기쁨도 어려 있지 않아 주치의가 의아한 고갯짓을 했다.

    “피아노는 만져 보셨습니까?”

    이 병원에서 그가 피아노 연주와 함께 청혼했다는 걸, 모르는 자가 없었지만, 예의상 물어왔다.

    “아니요.”

    성후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딱히 숨기려는 의도가 아닌 것 같았지만, 흘려듣는 것도 문제였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 쳐보실 것을 권유합니다. 경련이 없었던 다른 손가락 반응도 중요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전혀 궁금한 것이 없다는 성후의 얼굴은 마치 영혼을 잃은 빈집 같았다. 주치의는 헛기침으로 마무리 짓고자 했다.

    “최근에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까? 손가락 경련이나 심적인 스트레스나. 정 힘드시면, 정신과 상담도 함께 진행하… ”

    “교수님.”

    손가락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얼굴의 성후가 주치의의 말을 잘랐다.

    “네. 성후 씨.”

    괜스레 긴장되었다

    “온다정 간호사 말입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점심시간, 의료진들이 한 데 모인 자리에서, 수간호사 정희가 의준에게 퍼붓던 일이 떠올랐다. 그게 아마 오늘 오전에 일어났던 일이라 말했고, 열이 잔뜩 난 보호자를 상대한 사람이 바로 다정이라 들었다.

    “불편해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온 선생님이 제 여자친구거든요.”

    주치의가 곤란하다는 듯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두 분이 법적인 관계라고 해도 내부적인 얘기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성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외부인이라고 하기엔 최근, 은명 대학 병원에 이바지를 많이 했습니다만.”

    “이바지… 요?”

    성후는 올해 이 병원에 후원을 많이 했다. 운영 자금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병원장을 편하게 구워삶으려면 돈을 쓰는 편이 쉬웠다. 어차피 후원이나 기부 등은 세액공제가 되기 때문에 크게 보아도 나쁠 것이 없었다.

    성후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 곤란하시면 병원장님한테 가서 직접 여쭙겠습니다.”

    난감해진 주치의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태였고 당황도 했기에 판단이 잘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 있는 자는 여러모로 갑이란 건 확실했다. 또 만약 느른한 협박처럼 그가 병원장실에서 모든 상황을 듣게 된다면- 병원 방침을 그대로 따랐던 자신이 되레 융통성이 없다며 쓴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괜찮겠지.

    다정과 각별한 사이라니 일이 새어나갈 확률도 희박할 것이다. 주치의는 느낌에 기대기로 한다.

    “실은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이 있었습니다.”

    “일이라면.”

    성후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치의도 조금 안도하며 따라 앉았다. 소상히 다 말한다면 병원의 치부를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으므로 가장 굵직한 것들만 짚어 말했다.

    그러자 성후가 날카롭게 되묻는다.

    “그 보호자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아무리 상식 이하의 사람이라고 해도, 이유는 있었을 테지요.”

    어서 말하라고 압박하는 성후의 눈동자가 서늘했다. 주치의의 울대에서 꿀꺽하고 경박한 소리가 났다.

    “침묵이 길어지면 그럴듯하게 포장하시느라 바쁜 줄로 여기겠습니다.”

    정중한 말투였지만, 주치의의 허를 찌르는 협박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같은 의사로서 전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화를 성후에게 말했다. 개인 정보나 의료 시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콩닥거리는 주치의다.

    주치의의 말을 모두 들은 성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교수님에게 피해 가지 않게끔 하겠습니다. 그럼.”

    진료실을 등진 성후의 얼굴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거침없이 복도를 거니는데 연석이 기민하게 따라붙는다.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연석이었지만, 성후를 둘러싼 험악한 공기는 그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

    성후가 상황실에 들이닥치자 그를 피아니스트로만 알았던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여, 여기는 어쩐 일로…?”

    “CCTV 좀 봤으면 합니다.”

    잠깐 얼었던 직원이 결코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오전에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직원 둘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사건을 목격한 눈치다. 그중에 한 명이 침음을 삼키며 말했다.

    “영장을 지닌 경찰이나, 병원 관계자가 아닌 외부인에겐 불허되어 있습니다. 법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도의적인 선도 특별한 사건의 당사자 정도까지입니다. 죄송합니다.”

    연석이 성후의 명함을 내밀며 유능한 로비스트처럼 말했다.

    “가치 있는 의료 행위를 위해 올 한 해 운영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낸 분이 바로 이분이십니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은명 대학 병원이 한국에서 선진하는 병원이 되기를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해당 병원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을 숨기신다는 것은 운영 자금이 투명하게 쓰이는가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상부에 여쭤보면 아시겠지만, 정형외과 병동 VVIP 환자인 이 분은 정형외과의 열악한 환경과 처우에 관하여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셨고, 개선의 의지를 피력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전과 별반 다를 거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앞으로의 기부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꽤, 막대한 금액인데.”

    연석의 유창한 말솜씨에 직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뭐 물론 후원자에게 모든 걸 공개할 의무는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후원자 또한 기부금의 행방이 조금이라도 의심된다면, 세금 내듯 후원을 의무적으로 할 필요는 없겠지요.”

    직원들의 얼굴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연석은 여세를 몰아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희 입장이야 아쉬울 것 없겠지만, 상부에서도 과연 그럴진 의문입니다. 도련님. 돌아가시죠.”

    모처럼 성후에게 깍듯하게 굴며, 문을 가리키는 연석이다. 그러자 귀동냥으로 듣던 직원들까지 우르르 몰려 문 앞을 지키고서 말했다.

    “당장 공개하세요…!”

    연석이 오랜만에 월급 값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넓은 화면 화면마다 시간을 역행하고 있었다. 다양한 각도의 CCTV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가장 정확하게 보이는 녹화 영상이 제일 큰 화면에 잡혔고 성후의 시선이 그대로 붙박였다.

    동그란 얼굴에 쩍 달라붙어 있는 노란 머리의 여자가 거칠게 따져대는 장면이 보였다. 환자를 케어하고 돌아온 다정이 주변에 연유를 묻는다. 간호사들이 슬금슬금 노란 머리 여자를 피했다. 표독스러운 얼굴에 커다란 덩치가 대체로 가냘픈 그녀들이 상대하기엔 버거울 만도 했다.

    그때 다정이 나섰다.

    공감을 표하는 얼굴로 보호자인 여자에게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빨간 깃발을 발견한 황소처럼 분을 참지 못하고 다정에게 달려들었다. 멱살을 잡고 침을 튀겨가며 욕설을 하더니 이내 다정을 거세게 밀쳤다. 다정이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찍는 순간, 분노가 성후를 범람했다.

    이후 상황은 더 비참했다.

    어설픈 경비에 의해 보호자가 제압당했지만, 그 누구도 다정을 보호하려는 자가 없었다. 쭈뼛쭈뼛 다가온 후배 간호사들이 울먹이며 몇 마디 건넸고, 다정은 잔머리를 쓸어 넘기며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성후의 심장이 종이쪼가리가 되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몸을 제어하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어 본다. 그러나 분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늪으로 빨려 들어갔고 더는 빛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연석아.”

    “네, 형… 아니, 도련님.”

    “CCTV 챙겨.”

    “네.”

    얼마 뒤. 상황실에서 빠져나온 연석이 무거운 얼굴로 성후에게 말했다.

    “이 분위기에 할 얘기가 아닌 줄로 알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또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속닥거리는 연석의 말에 성후의 동공이 새카맣게 확장됐다.

    * * *

    “몇 번이나 노티(*notification의 줄임말로 병원에서 사용하는 은어. ‘보고하다’라는 뜻.)를 했잖아요.”

    -난들 어떡합니까. 잠도 못 자고 수술하느라 환자를 돌볼 여력이 없는데. 의사가 무슨 신입니까? 수술 스케줄 뻔히 알면서.

    “5분이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온 선생. 지금 병동 경력이 몇 년 찬데. 보호자 항의에 쩔쩔매면서 닦달을 해야겠습니까. 동료끼리 사정도 좀 봐주고 해야지. 박희남 환자는 제가 내일 오전에 바로 들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쯤 합시다.

    되레 지겹다는 말투의 의준이었다.

    “선생님이야말로 단 5분을 못 내서 환자나 보호자의 애를 태워야겠어요? 그 5분 때문에 힘없는 간호사들을 방패로 삼으셔야겠느냐고요.”

    잠깐의 침묵 이후 의준이 싸늘하게 말했다.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억울해서 그런다면 경찰에 신고해요. 어차피 개인 끼리 일어난 폭행 사건이니까. 제가 보호자를 사주한 것도 아니고, 제가 맞은 것도 아닌데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무책임한 발언에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후배 간호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들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했다.

    “하. 개인 간의 폭행 사건이요? 신고요?”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다정이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낚아챘다.

    “좋습니다. 신고하겠습니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겁니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를 물어뜯을 듯, 으르릉 짖는 성후였다. 다정이 놀라 두 눈을 깜빡거렸다.

    -다, 당신은 누군데…! 또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이오?!

    당황한 목소리였지만, 의준은 멈추지 않고 반발했다.

    “분쟁의 원인 제공자인 만큼, 참고인 진술은 불가피할 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사건을 이 지경까지 키운 의사의 고귀한 발걸음을 드디어 보게 되겠군요. 아 혹시. 다리가 부러져 기어 오지도 못하는 상황인가. 그렇군요. 미치지 않고서야 환자를 방관하는 의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성후를 보는 눈들이 커졌다. 다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짐승처럼 사나운 눈빛을 빛내는 성후에게 고개를 젓자 그가 입술에 검지를 붙인 뒤 말을 이었다.

    “난 마성후입니다. 불만 있으면 약자들 상대로 치졸하게 굴지 말고 나한테 따져요. 언제든 대환영이니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자마자 문제의 노란 머리 보호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쿵쿵쿵.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조차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

    “아직 멀었어요?? 오후에는 주치의가 올라온다 했잖아!”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들자, 성후의 눈썹이 미묘하게 비뚤어졌음을 다정이 읽었다.

    “성후 씨! 안 돼요!”

    이 순간 성후는 다정에게까지 야멸차졌다. 그가 여자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선뜩한 공기를 체감한 여자가 움찔한다.

    “당신 아버지만 귀합니까.”

    살벌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뭐??”

    여자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어졌다.

    “나는 내 아내가 될 이 간호사가 귀합니다. 간호사는!”

    그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맡은 환자를 성심껏 케어하고 정당한 급여를 받는 사람이지, 당신에게 함부로 욕지거리를 들어도 되는 시종이 아닙니다.”

    말로 사람을 찢어발길 듯 위협적인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오금이 저리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기에 눌린 여자는 전의를 상실하고서 어깨를 떨었다. 그런 여자에게 성후가 뚜벅뚜벅 다가갔다. 깜짝 놀란 다정이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지만, 성후의 말이 더 빨랐다.

    “제 가족 귀한 줄 알면 누군가의 가족도 귀한 줄 알아야지. 쯧.”

    뼛속에 새기듯, 힘주어 말하는 성후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떨궜다. 맹수 앞에 던져진 먹잇감처럼 조금도 꼼짝할 수 없었다.

    성후는 그대로 다정의 손목을 붙잡고서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 몫의 발소리가 복도를 공명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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