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젖어버린 미소.
환하게 쏟아지는 달빛. 그 아래 돋보기안경을 쓴 채, 성경을 보고 있는 명호. 그런 그의 침대를 검지로 한없이 두드리는 성후.
타닥타닥. 타닥타닥.
머릿속에 떠오른 멜로디에 사로잡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찌푸리는 성후다. 명호는 그런 성후를 힐끔 쳐다보았고 그의 상태를 읽었다.
자주 오지 않은 그 미친 영감이 떠오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명호의 눈길이 다시 성후의 손가락에 닿는다.
타닥. 타다닥. 타닥타닥.
주저 없는 손짓이지만, 이렇다 할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두려우냐.”
안경을 협탁에 올려두며, 명호가 말했다. 성후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 없이 손가락만 움직일 뿐이었다.
그는 이럴 때 아주 예민해졌다.
그 어떤 외부적인 것이 끼어들면, 떠오른 악상이 단숨에 휘발되는 경험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워도 못 놓겠지.”
정답이 성후의 속을 꿰뚫자,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 망각을 각오하고서, 명호를 바라보았다.
“네. 선생님. 두렵습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악상이 여전히 머릿속에 굴러다녔다. 하나하나 조각내고 붙이고 자르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동안 음악과 멀어졌던 탓에, 뇌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그럴 것 없다.”
명호는 성후가 최근에 연주했던 영상을 보았더랬다.
한 레스토랑에서.
병원 로비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퍼트린 영상 속 성후는, 권위 있는 무대 위에서 연주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포컬디스토니아라는 병명을 잊은 사람처럼, 자신감 넘치고도 즐겁게 연주를 해댔다.
흥분. 열정. 쾌감.
모든 것이 골고루 어려 있었다.
“지금 하던 대로 하면 돼. 막말로 피아노로 못 먹고 살면 뭐 어떠냐. 돈도 많은 놈이.”
말대꾸라면 성후도 연석 못지않았다. 하지만 명호가 아프고 나선 그 빈도가 많이 줄었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말대꾸했다.
“배부른 놈.”
괜히 짜증이 인다.
“꼭 생계만이 위대한 건 아니잖습니까.”
“속 좁은 놈. 내 말이 그런 뜻 같으냐.”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주시죠!”
발끈하는 성후를 보자, 괜히 기운이 넘치는 명호다.
“너에게 무언가 빠지면, 또 다른 무언가가 널 채우게 되어있어. 그게 사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취미든, 일이든. 운명이 널 다른 곳으로 이끄는 게야. 그러니 모르면 닥치고 따라가.”
“선생님.”
“그래도 괜찮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그럼 여태까지 네가 왜 피아노를 하고 살았냐고? 그 시간들이 다 뭐가 되냐고?”
성후의 마음을 명호가 소리 내 읽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놈. 지나서 돌아보면 무의미한 건 결단코 없다. 언제 내 말이 틀린 적 있든?”
“…뭐, 가끔은.”
“염병. 나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놈이고. 너는 한참 멀었다. 그러니 내 말 듣고 마음 놔. 어차피 네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또 이 인생이란 놈이니까. 알간?”
성후가 인정하기 싫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주억인다. 명호는 심드렁하게 성후를 노려보며 누웠다.
“좀 잔다. 너도 집에 가.”
“한국엔 집이 없는 데요.”
엄밀히 따지면 의절을 언급했던 아버지의 집이지,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으이고, 저놈의 말대꾸.”
명호는 지겹다는 듯 등을 돌렸다.
“큭큭큭….”
조금 더 선생님과 투덕거릴 수 있기를. 침울한 눈으로 명호의 등을 바라보는 성후다.
* * *
“우리 오빠, 약혼녀 따로 있어요.”
유리가 아침 드라마 급 대사를 던지자, 다정이 픽 웃었다.
“기사로 잘 봤습니다.”
천연덕스러운 다정의 태도에 유리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아는데 저희 오빠 곁에 있다고요?”
“있으면 안 되나요? 난 여친인데.”
“여친….”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다, 다시 말을 이었다.
“무게가 많이 다르다는 거, 아시죠?”
“마유리… 씨라고 했나.”
다정이 유리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그쪽도 번지수가 틀렸다는 걸 알겠네요. 이런 일은 제가 아닌 오빠에게 가서 따질 일이죠. 왜요. 오빠는 무서운가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아서?”
기죽지 않는 당돌한 눈빛. 보통내기가 아니다. 유리는 차분히 시인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다정 씨가 그만둬 주세요. 두 사람, 어울리지 않아요.”
“어떤 점이 그리도 안 어울리나요.”
유리가 몰라서 묻냐는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여러모로 현격한 차가 나죠. 무엇보다 가장 반대하는 이유는… 당신을 만나고 오빠가 계속 다쳤어.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모자란 거 없는 오빠가 가시밭길을 가는 모습을 난, 보고 싶지가 않네.”
다정이 싸늘하게 웃었다.
“가시밭길 좀 간다고 죽니?”
유리의 한쪽 눈썹 끝이 미세하게 올라간다.
“말이 상당히 짧은데.”
“내가 좀 상대적인 사람이라서. 불쾌하면 말 좀 길게 해줄래? 아니면 계속 말까고. 나이 많은 내가 손해겠지만 너그럽게 수용할게.”
유리가 은밀하게 볼 안을 씹는다.
“아. 혹시 할 얘기 다 한 거야? 본론만 짧게 해줘서 고맙네. 그럼 잘 가.”
딸각. 차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또각또각.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로 멀어져 가는 다정을 유리가 노려보았다.
저 뒷모습.
아니, 저보다 조금 더 작은 뒷모습.
얼마 전에 봤었다.
노을에 잠긴 카를교. 그 어딘가에 앉아 있는 성후와 웬 소녀의 등이 나란히 담긴 사진.
‘이 사람은 누구?’
‘성후 애인.’
‘…뭐? 이렇게 어릴 때?”
‘쿡쿡. 아니. 지금 애인. 온다정 양.’
‘……네?’
‘두 사람 어릴 때부터 인연이 깊었어. 너도 아버지도 이제 적당히 하고 내버려 두렴.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는 게 되어있어. 그게 다 사람 인연이지. 그러니 괜히 오빠 힘들게 하지 마. 다정 양한테도. 새길 때는 쉬워도, 지우기는 어렵단다, 딸아.’
엄마의 말을 수긍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의 짝이라고 받아들이기엔 한참을 뒤처졌다. 그렇게 쫓아 온 한국에서 찔러 본 오빠의 애인.
유리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 끝내주는 건…, 닮긴 했네. 하지만, 나만 할까.
유리는 차에서 내려 다시 다정을 쫓았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간 빌라 안은 입구에서부터 통유리로 막혀 있었다. 몇 호였더라. 사전 조사는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빌라 입구 옆에 널브러져 있는 벽돌이 눈에 들어왔다.
쨍그랑!
유리는 지체 없이 현관 통유리를 박살 내버렸다. 경보가 울리고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남은 유리까지 모조리 깨트려 제거했다.
높은 층에서 다정이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유리는 명함을 허공에 들고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 벽돌 아래로 명함을 깔아둔 채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놀란 다정이 일 층으로 뛰어 내려왔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유리가 만졌던 벽돌을 들자, 명함이 보였다. 다정은 명함을 내려다보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미친 지지배…. 지 오빠 동생 아니랄까 봐.”
그러면서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혹시 몰라 명함을 주머니에 챙겼다. 파손한 기물의 책임은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
왜 불운은 겹쳐 오는가.
다음 날, 다정은 출근 이후, 한 보호자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노란 머리의 덩치가 좋은 여성은 입원 후 주치의에게 제대로 된 설명 하나 듣지 못했다며 간호사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장 불러오라고!”
“죄송하지만, 담당 선생님이 지금 수술 중이셔서…”
다정이 간호사 스테이션에 서 있는 신규 간호사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주치의가 연락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수술 중인지 휴가 중인지 그런 거 난, 모르겠고! 지금 아버지가 입원한 지 벌써 이틀 째야!! 사진 찍고 피 뽑고 사람 할 짓 못 할 짓 다 시켜 놓고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고 있다니…! 그런 주제에 여기가 대학 병원이라고?!! 아픈 사람 이끌고 몇 시간 죽어라 대기하다, 입원하는 일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어?!!”
언성은 갈수록 높아져 갔다.
“보호자님, 잠깐 진정을 하시고…”
“진정?!!”
여자는 다정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고서 험악한 욕설을 퍼부었다. 우악스러운 힘에 대처할 방도가 없다.
“당신 가족 일이라면 진정할 수 있겠어?!! 결과가 어떻게 되고, 치료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알아야!!!”
다른 간호사들은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오늘 근무하는 간호사 중, 제일 고참인 다정의 입장만 난처해져 갔다.
“대체 병원에서 하는 일이 뭐야?!”
이런 말을 듣기엔, 억울함이 없지 않았다. CT 검사 결과는 타과 협진이 필요한 부분이어서 시간 조율이 어려운 실정이었고, 피검사는 외주로 맡긴 터라 결과가 나오는 데 시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내부에서 끝난 피검사를 토대로 혈당을 체크하고, 진통제와 항생제를 투여했으며 환자의 혈압, 수액량, 식사량, 몸에서 빠져나온 소변량과 색깔 등 꼼꼼하게도 기록했다.
하지만 간호사의 변명은 힘이 없다는 것을 안다.
“수술이 끝나는 대로 뵐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겠습니다.”
뒤늦게 올라온 경비에게 끌려가는 보호자는 끝까지 병원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며 떠나갔다. 독기 어린 보호자의 눈빛이 다정의 가슴에 화인처럼 새겨졌다.
기운이 쫙 빠지는 오전이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 앉아 밥이라는 것을 먹고 있는데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먹어야 기운 내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의사의 미비한 대응에 내가 욕을 먹는 것도. 멱살이 잡히는 것도. 그래서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것도. 흔들려선 안 돼. 내가 꿋꿋하지 못하면… 어린 간호사들이 더욱 두려워할 거야. 하지만 이게 간호사 삶의 실체인걸. 일부분이라 해도 언젠가 또 반복될 실체.
한숨이 푹푹 나왔다.
그때 제 앞에 진 큰 그림자가 털썩, 맞은 편에 앉는다. 다정이 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는 성후가 보였다.
자신의 사정과 별개로 말끔한 셔츠 차림의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괜히 울컥했다.
“저 보러 왔어요…?”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다.
“진료받으러 왔습니다만?”
성후가 능글맞게 농담을 던진 순간, 다정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놀란 성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하. 주책이네, 갑자기 눈물이.”
다정이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눈물을 훔쳐 닦는다.
“진료 잘 받고 가요.”
젖은 눈으로 싱긋 웃으며 떠나가는 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