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65화 (65/82)
  • ?65화. 죄송합니다.

    성후가 고개를 틀었다. 맞닿는 입술이 깊어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다정과 성후가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침묵.

    이후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그것도 신경질적으로 들릴 만큼 연속적으로.

    성후는 하는 수 없이 다정을 놓아주었다. 욕실 문 맞은편 벽에 있는 인터폰을 확인한 다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면서 급히 뛰어 붙박이장으로 향했다.

    “음?”

    “옷! 옷! 성후 씨도…!”

    다정이 조용하게 외쳤다.

    “…!”

    누구인지 몰라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상대. 그건 아마도 가족.

    성후도 재빨리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셔츠 단추를 여몄다. 아무렇게나 벗어둔 바지도 끌어 올렸다. 철컥철컥, 벨트 착용까지 겨우 끝냈을 때 어벙한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다정이 쏜살같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겉보기에 정말 다 나은 것처럼 보였다.

    현관문이 열리자, 이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늦다. 늦어.”

    다정의 엄마, 명정이었다. 성후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명정이 고개를 획 돌린다. 놀란 다정이 성후를 쳐다보자, 셔츠 단추를 한 칸씩 밀려 잠근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허억! 다정이 수신호로 단추를 가리키자 당황한 성후가 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성후 씨 있는 줄 알았어.”

    명정이 말했다.

    “어떻게?”

    “주차장에 차가 있더라고. 계집애…. 겁도 없이….”

    그래서 엄마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정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게 아니라…”

    변명하려다 입을 꾹 다문다. 아팠다는 말로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왜! 방해꾼이 와서 싫니?”

    “엄마도 참…. 누가 그렇대?”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앉아서 해요. 무슨 얘기든.”

    정신없이 움직였더니 기운이 쭉 빠진 다정이다. 먼저 간이 테이블로 향하는데 엄마가 따라오지 않았다.

    명정은 욕실에서 나온 성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쏘아보았다.

    다정의 근무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미용실 문을 닫고서라도 딸을 기다릴 요량으로 새벽같이 찾아왔다.

    “마성후 씨.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이유는 눈앞의 이 젊은 청년 때문이었다.

    얼마 전 중국 재벌가 여식과 결혼 기사가 난 거로도 모자라 어제 병원 로비에서 다정에게 프로포즈한 사진이 SNS를 통해 전국적으로 번졌다.

    명정은 기사화된 것을 보고 알았다. 다정의 얼굴은 블라인드처리가 되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딸을 몰라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대체 뭔가.

    답답한 심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정에게 어찌 된 일인지 진위를 따져 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달려온 건데 당사자와 맞닥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이왕 마주친 거.

    그에게 진실을 묻고자 한다.

    성후는 긴장한 얼굴로 명정을 바라보았고, 다정은 놀라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 왜 그래. 무섭게…”

    엄마의 팔을 힘없이 잡아끈다. 그러나 명정은 굳건하게 버티며 성후에게 재차 말했다.

    “할 말 없어요?”

    성후가 입을 꾹 다물고 지난 며칠을 반추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짐작되는 것이 많아도 너무 많다.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만해, 엄마. 나한테 할 얘기 있어서 왔다면서. 나랑 해요.”

    “아닙니다. 제가…”

    그때 성후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성후는 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전화는 끊이질 않고 연이어 울렸다. 당황한 성후가 전원을 끄려는데 명정이 말했다.

    “받아요.”

    뚝 끊겼던 벨소리는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운명. 여전히 웅장하다.

    “그럼 실례합니다.”

    성후가 등을 돌려 작게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연석이었다.

    -형님….

    연석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그러나 성후는 그런 연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빨리 말해.”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말했다.

    -지금… 이쪽으로 좀 오셔야겠습니다….

    “왜.”

    -명호 선생님이… 호스피스 병동에 계십니다.

    성후의 속에서 몇 달 전에 보았던 명호의 얼굴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네 놈 손가락이 고장 났다던데 스승이 돼서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냐.’

    그렇게 말하며 능글맞게 웃어 보이던 명호의 안색이 어땠는지 까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머리가 하얗게 텅 비워지고,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씨?”

    “…후 씨?”

    “성후 씨!”

    성후가 작은 경기를 일으키자, 다정이 성후의 얼굴을 걱정스레 올려다본다.

    “무슨 일 있어요?”

    “저…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경황없는 얼굴. 심각성을 읽은 명정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어서 가봐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성후가 연신 고개를 숙인다. 다정은 괜찮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현관 앞까지 쫓아 나와 성후에게 힘을 실어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길 바래요.”

    하루 만에 조금 야윈 다정의 볼을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 미안함이 어렸다. 다정이 그 손에 볼을 비비다 이내 떼어낸다.

    “어서 가요…!”

    “전화… 하겠습니다.”

    *

    호스피스 병동으로 달려온 성후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명호를 발견했다.

    “선생님….”

    근사했던 백발은 어디 가고, 민머리의 명호가 멋쩍게 웃는다.

    “뭐 이리 급하게 달려왔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그가 보고 있던 성경을 덮으며 웃는다.

    “암 걸렸지 뭐. 대장암인지 뭔지. 독한 놈이라고 하더구나.”

    그렇게 말하는 명호의 얼굴은 평소처럼 여유가 넘쳤다. 죽음 앞에 어째서 이리 태연한 걸까.

    성후의 심장이 종이가 되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명호는 성후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생물학적 부친도 못했던 것을 그가 했다. 방황하던 성후를 붙잡고 호되게 가르쳐 인간이 되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 예쁜 아가씨와는 잘 되어가고? 얼마 전에 뉴스에서 봤다. 무탈하지?”

    당장 저는 저승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태평하게도 다정의 안부를 물어왔다.

    “선생님….”

    “내가 죽지, 네가 죽냐? 그런 얼굴 마라. 누구나 언젠간 가. 그게 순리지. 그러니 너보다 조금 더 늙은 내가 먼저 가는 거뿐이다.”

    호쾌한 목소리. 바짝 야위어,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명호는 명호였다.

    “너는 어서 결혼이나 해. 네 그 더러운 성질머리 진심으로 받아 줄 여자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성후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묘해진 말투는 꼭 반항기의 소년 같았다.

    “성후야.”

    명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시간은 언제까지고 기다려주지 않아. 놓치지 말고 어서 결혼해. 그리고.”

    성후가 귀를 바짝 세운다.

    “스캔들 빨리 정리하고. 지금 정신 못 차리면 늙어, 나처럼 외로워진다.”

    몇 번의 이혼과 재혼을 거듭했던 명호였지만, 슬하엔 자식이 없었다.

    그래도 자식이 있다.

    성후를 이끌며 복에 없던 부모가 되어 본 것이다. 한 생명의 성장을 지켜본다는 건 정말이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 모진 항암 홀로 견디시면서,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명호가 씩 웃으며 속으로 대답한다.

    네 놈의 귀한 청춘 뺏고 싶지 않아서다. 이 얼빠진 놈아.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남았답니까.”

    “음. 길면 삼 개월이라고 했던가.”

    “…제가 더 알아보겠습니다. 대장암에 권위 있는 의사를 반드시 찾겠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명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이미.”

    “선생님!”

    “목소리 낮춰라!”

    명호가 엄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버릇없는 놈!”

    그제야 성후가 주변을 둘러본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방송을 보는 사람. 배우자에게 툴툴거리며 짜증을 내는 사람. 열심히 무언가를 쓰는 사람. 자원봉사자에게 안마를 받는 사람. 기력이 쇠해 겨우겨우 숨만 붙은 사람.

    마지막 이는, 오늘 임종실로 옮겨질 사람이었다.

    문득 저 사람과 명호가 겹쳐 보였다.

    얼마 뒤 스승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성후의 영혼이 북북 찢기는 느낌이 들었다.

    일그러진 성후의 얼굴을 보며 명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숭고한 마무리의 시간이다. 감히 동정하지 마라.”

    “…선생님.”

    “다 죽은 얼굴로 나타나려면 여기에 오지 마.”

    “죄송합니다.”

    “하늘이 허락하는 동안, 웃으면서 보자.”

    눈시울이 붉어진 성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어떻게 된 거야. 청혼. 기사로 봤어.”

    간이 식탁에 마주 앉아,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술이에요.”

    “맥주가 술이냐? 속이 타서 그런다. 속이 타서.”

    엄마는 몹시 언짢아 보였다. 다정은 성후가 만든 엉성한 죽을 퍼서 먹었다. 쌀알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가끔 까끌까끌하게 씹혔지만 그래도 충분히 맛있고 달게만 느껴졌다.

    “너는 웬 죽?”

    “컨디션이 별로라. 한사코 괜찮다는 데도, 성후 씨가 약도 사다 주고 죽도 끓여줬네.”

    그가 이렇게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을 엄마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생각이 많아졌는지 엄마도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내 생각?”

    “결혼 말이야.”

    다정이 머뭇거리다 조용히 대답했다.

    “하고 싶어… 요. 결혼.”

    “그런데 왜 자신 없는 말투야. 저쪽 가족들이… 반대하니?”

    정곡을 찔렀다. 다정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환하게 웃어 보인다.

    “아니~ 아직 뵌 적도 없어.”

    잠깐의 침묵.

    명정의 나이쯤 되면 보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적당히 기우는 것도 아닌데, 반대도 그냥 반대가 아닐 테지.

    결혼이라는 게 그렇다. 사랑 하나로 밀어붙이기엔 거쳐 가야 할 산이 너무도 많고 험했다. 언뜻, 두 사람 만에 의한, 두 사람을 위한, 결혼인 거 같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가족 대 가족의 만남. 그사이에 생겨나는 작고 큰 문제들은 오로지 부부가 된 자들의 몫이다. 영원히 서로의 편일 것 같아 시작했어도 대개는 자신의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명정은 그런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우리가 알아서 잘 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

    다정이 명정의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명정도 그런 딸의 손을 꼭 겹쳐 잡으며 얘기한다.

    “많이 아플 거야.”

    “엄마 딸 씩씩한 거 알잖아.”

    명정이 슬프게 웃으면서 다정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나 성후 씨 믿어요. “

    ‘성후’라는 이름만 나와도 눈을 반짝이는 딸에게, 명정은 더 이상 토 달 수 없었다.

    *

    며칠 뒤. 퇴근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는 성후가 보였다.

    “성후 씨…!”

    다정은 반가움에 성후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성후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얘기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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