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금욕의 크리스마스.
청혼을 받자마자 휘청이는 다정을 성후가 기민하게 받쳐 안았다. 보던 이들도 놀란 얼굴이다. 성후는 다정을 번쩍 안아 들고 비상구로 향했다.
계단을 두 칸씩 오르는데, 다정이 성후의 팔을 꼭 붙잡았다. 말이 꼭 붙잡았다는 것이지, 촉각을 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희미한 악력이었다.
“성후 씨…”
늘 윤기가 흐르던 다정의 입술이 바짝 말라 있다.
“응.”
“집으로 가줘요.”
묻고 싶은 말이 많지만, 컨디션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지금 몸 상태가…!”
다정이 성후의 팔을 한 번 더 지그시 눌렀다.
“부탁이에요….”
그냥 몸살이라고. 쉬면 괜찮다고. 유난 떨고 싶지도…, 방해받고 싶지도 않다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
자신이 머무는 호텔로 가려다 다정의 집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편히 느끼는 곳이 좋을 듯해서였다. 다정을 데려다주며 본 적은 있으나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성후는 다정을 들쳐 업은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몇 호입니까?”
쌕쌕 흐트러지는 숨결에 그녀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4호.”
“4호?? 몇 층 4호입니까?”
승강기 이용을 못 하는 그녀니, 기껏해야 3층 정도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속단이었다.
“……604호.”
성후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리 건장하기로 서니, 다정을 업은 채 6층까지의 계단을 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목에는 그녀의 핸드백이, 입에는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산 각종 약이 봉지째로 물려 있었다.
“끄응…!”
5층 정도까지 올라왔을 때 다정을 고쳐 업었다. 한결 편해졌다.
6층에 도착했을 때, 성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에게 꼭 층수가 낮으면서도 안전한 집을 사주겠다고. 이왕이면 함께 살 집이면 좋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현관 앞에 도착하자 다정이 비밀번호를 속삭였다. 고쳐 업은 탓인지 그녀의 입술과 귀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더운 숨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마성후. 미친놈아. 진정해. 상대는 아픈 여자라고.
극강의 인내심을 발휘해 현관을 열었다. 다정의 아담한 오피스텔이 한눈에 들어왔다. 14평 남짓한 오피스텔은 개방형 원룸이었다. 침대가 놓여있는 방구석에는 기억자의 통창 유리로 되어있어, 원룸인데도 불구하고 좁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성후는 신발을 벗을 손이 없었다. 구둣발로 집안으로 들어와 다정을 침대에 눕혔다. 드디어 턱에 고인 땀을 팔등으로 훔쳤다.
“…힘들었죠.”
“말하지 마요. 없는 기운 더 빠지니까.”
그렇게 말하며 성후는 욕실로 향했다. 급하게 손부터 씻고 나와 더러워진 바닥을 수습하며 물었다.
“이대로 집에 있어도 괜찮습니까.”
다정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냥하게 살펴주는 그 때문에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간 채였다.
“아픈데 웃음이 나와요?”
다정에게 다가온 성후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목 뒤를 받치고 코트를 꿰고 있던 팔을 조심히 빼냈다. 이후 순차적이지만 주저 없이 벗겨냈다.
괜찮다는 사양이 다정의 목젖 밑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쌕쌕, 가는 숨소리만 뱉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깐만.”
자잘한 꽃무늬가 들어간, 광목 이불로 다정의 배까지 덮어 주었다. 속옷 차림이 된 그녀가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리려던 걸 성후에 의해 제지당했다.
“열 날 때는 꽁꽁 덮으면 안 되는 거로 아는데.”
그런 성후의 눈동자 속에 걱정이 어렸다. 다정이 긍정의 의미로 눈꺼풀을 살포시 깜빡하자, 성후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는 유능한 간병인처럼 굴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가져와 수건을 적시고 다정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늘어져 도리가 없는 그녀는 완전히 성후에게 자신을 맡겼다.
기이했다.
시간이 중간중간 사라지는 것처럼, 그의 모습도, 현재 상황도 조각이 난 채 받아들여졌다. 제 몸을 닦는가 했더니 어느새 약을 가져왔고, 그 약을 제대로 먹지 못하자 입으로 약을 넘겨 먹여주었다. 겹쳐지는 물기 젖은 입술에 잠시간 정신이 돌아왔다가 다시 눈을 감고 떴을 땐 집안이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침대 옆을 손으로 쓸다, 허전한 걸 느낀 다정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서 큰 몸을 웅크리고 잠든 성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불이라도 챙겨줘야 하는데. 보일러는 틀었나.
인기척을 느낀 성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떴다.
“목마릅니까?”
감기약이 몸의 수분을 말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성후는 그녀가 잠든 사이에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냈다. 다정이 대답 대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제 씻었는지, 속옷에 셔츠만 대충 걸친 그에게서 자신의 샴푸 향이 났다.
“말도 못 할 만큼 힘든 겁니까?”
성후의 미간이 완전히 찌푸려졌다. 잠도 달아난 얼굴이다. 곧 성후가 제 이마를 다정의 이마에 데어 보았다.
“…하.”
그가 고민 많은 얼굴로 말한다.
“모르겠네.”
“쿡쿡….”
다정은 침대 곁에 있는 철제 협탁을 열었다. 그 속에 항상 비치되어있던 체온계로 열을 쟀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온도를 확인하자, 38.3˚ C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했을 때는 분명 39˚ C 이상의 열이 났을 터였다.
“열이 좀 떨어진 거 같아요.”
모래를 잔뜩 머금은 듯,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다정이 목을 잡고 큼하고 풀자, 성후가 얼른 일어나 미온수를 가지고 나타났다.
“물 많이 마셔야 한댔어요.”
전문가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성후가 퍽 귀엽게 느껴졌다. 하얀 셔츠를 펄럭이며 달빛 아래 음영이진 자신 없는 이목구비가 어린 시절 성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 남친이지만…”
다정이 성후에게 받은 물을 꿀꺽꿀꺽, 달게 마신 뒤- 이어 말했다.
“참 잘생겼어요.”
그러자 성후가 픽 웃는다.
“지금 어린애 보듯이 보고 있는 거, 압니까.”
“예리하기도 하셔라.”
다정이 다시 남은 물을 마시며 눈으로만 생글 웃어 보였다. 조금 살 것 같았다. 물잔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 나니 성후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다정이 픽 웃으며 말했다.
“저 아직 열 있다고요?”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리는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안 합니다.”
그리고 침대 끝에 양손을 지탱하고서 다정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맞췄다.
“이 이상은.”
그러면서 다정의 입가를 슥 훔쳐 닦아주었다.
“다정 씨 입술은 반짝거릴 때가 특히나 예쁩니다.”
“그건 성후 씨가 유난히… 입술만 봐서 그래요.”
“그럴 리가.”
성후가 지그시 다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이 순간을 곱씹듯, 다정의 이목구비 하나하나 정성스레 뜯어본다.
영민해 보이는 눈매는 웃을 때면 천사처럼 아름답고, 그 속에 담긴 다갈색 눈동자는 깊고 또렷해- 보는 이의 마음을 빤히 훔쳐보는 것 같으며, 두드러지게 오뚝하진 않지만, 작고 귀여운 코는 이목구비에 과하지 않은 중심이 되어 주었다. 또 저 적당한 두께의 입술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갔다가도, 사람을 광기로 몰아넣는 에로틱한 마법을 부려 성후를 안달나게 했다.
얼굴 아래로는 사슴처럼 희고 가느다란 목이 보였다. 돌연 잇자국을 새기고 싶었다. 침음을 삼키며 시선을 내린다. 반듯한 라인의 새하얀 어깨도, 제 손으로 입혔던 슬립 안으로 도드라진 가슴도….
“매 순간. 위험할 정도로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끊어 말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서 인내가 느껴졌다. 다정은 손을 뻗어 그런 그의 어깨를 안았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겸손이 아니었다. 상황 분간 못 하는 성욕을 다스린 거 말고는, 그녀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누군가한테 간호받는 거….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아요. 참 따뜻하네요.”
“다정 씨 몸. 아직 뜨겁습니다.”
하지만 차마, 떨어지라 말할 수 없었다. 그리 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스스로 멀어질 기회를 주기로 한다.
“…복사열이 발생해요.”
다정이 성후를 안은 채로 낮게 키들거렸다.
“노력 많이 하셨네요.”
정보를 검색했다는 사실이 단박에 들켰다. 성후는 다정을 살포시 안아 다시 자리에 눕힌 뒤, 영리한 박사처럼 말했다.
“그쯤이야, 상식이죠.”
그 모습이 귀여워 다정이 다시 웃었다. 성후가 그런 다정을 아이에게 하듯 타일렀다.
“조금 더 잡시다.”
“밑에 추워요. 곁에 자요.”
“밑엔 춥지만, 곁은 힘듭니다.”
“아무 짓도 안 할게요.”
되레 약속하는 작은 목소리에 성후의 심장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가 참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짓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정 씨가 몰라서 그래요. 정염을 다스린다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압니까. 특히 잠까지 안 올 때면 아랫배 속 내장이 꼬이는 것처럼 고통스럽단 말입ㄴ…”
“저 지금 눈감아요. 바로 잘 거예요. 지금 열은 38.3˚ C. 아침이면 조금 더 떨어지겠죠. 단. 외롭지 않게 성후 씨가 손을 꼭 잡아 준다면요, 아마도 푹 잘 수 있을 거예요.”
“하.”
졌다. 유창한 말솜씨를 보아하니 많이 좋아진 것 같지만 그녀의 앞에서 성후는 언제나 약자다. 선택지는 하나. 고분고분 다정의 곁에 누웠다.
성후가 완전히 가까이 오니 샴푸 향과 그의 체향이 섞여 향이 묘했다. 다정은 성후의 큰 손을 꼭 붙들고 그의 쪽으로 빙글 돌아누웠다. 나른함에 취하며 새삼 깨닫는다. 성후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처럼,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는 것을.
“……메리 크리스마스.”
작게 읊조린 뒤, 예고했던 대로 금방 잠이 들었다.
다시 쌕쌕 숨 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성후는 두 눈을 손으로 짚었다. 아픈 여자가 곤히 잠들어 내는 숨소리도 야하게만 들렸다.
한 침대 위에서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다.
금욕의 크리스마스라니.
…빌어먹을.
걸핏하면 발광하는 이놈의 색욕이 가장 문제다. 성후는 인생 최대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나긴 새벽을 홀로 견뎠다.
*
늘 눈이 부셔 잠을 깨곤 했었다. 공짜로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해를 구태여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이트 근무를 한 다음 날은 논외다.
그런 다정이 적당히 어두운 와중에 눈을 뜬 건, 주방에서 나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시각을 확인하자, 출근 시간까진 여유가 있었다. 다행이었다. 다시 주방으로 시선을 돌리니 커다란 몸집이 조붓한 주방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꼭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기묘한 풍경이다.
“뭐해요…?”
여전히 기운 없지만, 어제보다 한결 가벼운 몸을 일으켜 다정이 물었다.
“아.”
성후가 몸을 빙글 돌리자, 다정이 놀라 벙지다-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맑고 깨끗한 웃음소리에 성후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웃지 맙시다.”
언젠가 여진이 사줬던 프릴 달린 핑크색 앞치마를 매고서.
“아, 죄송… 크크큭… 크크크큭… 크흡. 큭…”
참는다고 참아보지만, 잘되지 않았다. 성후가 잘생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웃어요.”
“큭큭. 하하하. 하하하하. 죄송해요. 그런데… 하하하하.”
시원하게 웃는 그녀는 어느새 눈가에 고인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돈으로 하는 건 무성의하니까, 죽이란 걸 직접 만들어보려고 해봤는데…”
“해봤는데? 크큭… 크크큭…”
“진심으로 후회가 되는군요.”
“아니, 그 앞치마를 대체 어디서 찾은 거예요?”
되묻고 다시 웃음이 터진 다정이다. 성후는 들고 있던 국자를 빈 접시에 내려두었다. 체념한 등이 보인다.
다정은 그런 성후에게 다가와 큰 등을 껴안으며 말했다.
“계속 아프고 싶어요.”
이 평범한 따뜻함이 좋아서. 실컷 어리광부리고 싶어서.
“그건, 제가 곤란하겠는데요.”
아직도 뜨거운 다정의 몸이 닿자 성후의 몸이 반응하며 짜릿해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다정이 나긋나긋하게 약속했다.
“다음에 성후 씨가 아프면 제가 꼭 갚아줄게요.”
그리고 청혼에 대한 답…, 해줄게요.
“유능한 간호사의 은밀한 케어라. 그거 꽤나 유혹적이군요.”
성후가 몸을 빙글 돌려 그녀의 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헉. 다정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주, 죽, 다 됐어요? 타는 냄새 나는 거 같기도… 한… 데…”
성후의 손이 다정의 허리를 감쌌다.
“이건 어떻습니까.”
“어떻지 않아요!”
질문과 동시에 대답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은 눈치다. 되레 등을 굽힌 채 다정에게 더 바짝 다가올 뿐이다. 다정이 멀어지지 못하도록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 교활하게 웃었다.
“나한테 옮기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