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63화 (63/82)
  • ?63화. 모든 날, 모든 순간.

    “그러세요.”

    막상 그의 앞에 앉고 나니 긴장이 부연을 덮쳐왔다. 용기가 가상했다. 우울감은 상쇄되었지만, 밥이 잘 넘어가질 않는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밥알을 삼키기는 했다. 침묵의 식사가 이어졌고 어색함은 오로지 부연의 몫으로 남았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급해진 부연이 작게 소리쳤다.

    “그날!”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부연을 응시하는 연석이다.

    “왜… 도와줬어요?”

    부연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연석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희망이 절망으로 변할까 봐 두려운 얼굴이었다.

    “안타까워서요.”

    “안타까워요?”

    연석이 들고 있던 식판을 테이블 위로 내려두고서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말했을 텐데. 오해하지 말라고요.”

    “…그러셨죠.”

    부연이 작게 입술을 짓이긴다.

    “기죽지도 말고요.”

    그러면서 피식 웃는다. 연석이 다시 멀어지려고 하자, 부연이 홧김에 소리쳤다.

    “자꾸 그쪽이 눈에 밟혀요!”

    근처에 앉은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평소라면 쥐구멍을 찾아 달아났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며칠 내내 그랬던 것처럼, 신경은 온통 연석에게만 쏠려 있었다.

    다시 의자에 착석한 연석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약한 부연은 긴장과 불안으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심장에 연석의 단호한 대답이 꽂힌다.

    “저는 흘리고 다니는 여자, 싫어합니다.”

    매정한 거절이었다. 툭. 부연의 뺨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만인의 앞에서 대놓고 차였다. 수치심보단 쓴 거절에 목이 멨다. 고개를 떨궜다. 가녀린 어깨가 서글프게 떨린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든 부연은 깜짝 놀랐다. 벌써 사라졌으리라 예상했던 연석이 계속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여러 번 물갈이 되는 동안 그는, 묵묵히 기다렸다.

    “다 울었습니까?”

    희미하지만, 그의 미간에 금이 가 있다. 모진 말을 들은 건 자신인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네.”

    “이만한 일에 울긴.”

    슈트 안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무심하게 건넨다. 부연은 그것을 받아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감정관 별개로 섬세한 손짓에 연석이 큭 하고 웃는다.

    “왜 웃어요?”

    부연의 목소리가 조금은 앙칼지다.

    “아닙니다.”

    말을 삼키는데 능숙한 그가 말을 아꼈다.

    “왜…, 안 가셨어요?”

    호기심을 못 이겨 묻고도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는 부연의 눈빛이 실로 안타까웠다. 연석은 조금 더 상냥해지고자 마음먹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것이 있더라고요. 그중에 버릴 것도 있지만, 쓸 만한 것도 있죠.”

    “…너무 어려워요.”

    쪽팔리는 건 질색이다. 그 때문에 알아들은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석의 말을 ‘척’으로 흘려들었다간 후회할 사람은 자신일 터다. 그것이 기어이 반문한 이유다.

    “신 선생님은 본래의 모습도 괜찮습니다.”

    “본래의 모습이라뇨. 사실 전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원래 제 속에 제 것이었던 건 하나도 없는걸요.”

    바다 위 조각 배처럼, 트렌드라는 파도에, 남의 말이라는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았다. 합판으로 만들어진 그 조각 배는 바닷물을 원 없이 빨아들인 덕분에 요즘은 부식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부연은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다해 대충 살아요. 그리고 그런 자신을 최대한 응원해주고요.”

    “그게…”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 속을 보라고요. 대충 살면서 열심히 나만 보면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질 겁니다.”

    눈물이 그친 부연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였다. 연석은 조금 낯간지러워져,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달랜 뒤 이어 말했다.

    “만약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땐 제 눈에도 신 선생님이 밟힐지도 모르죠.”

    “그… 말씀은.”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두 해주었다. 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라붙은 식판을 들었다.

    “오늘 이브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핑크색 여운을 남긴 그가 떠나갔다.

    * * *

    과부하가 걸릴 때가 됐지.

    간호일지만 남기면 곧 끝이다. 퇴근을 바라보며 겨우 버티고 있는 다정이다.

    “선생님 이거.”

    누리가 연한 귤색의 예쁜 봉투를 건넨다.

    “음…?”

    봉투를 받아든 다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게 뭐죠?”

    “열어보세요.”

    쑥스러워하는 누리의 표정에 다정이 봉투를 조심히 열어보았다. 청첩장이다.

    “헉. 신규 쌤 결혼해요??”

    잠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그렇게 됐어요. 아. 사고는 안 쳤답니다.”

    미리 방어하는 누리를 보며 다정이 힘내 웃어 보였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날짜가 금방이네요?”

    “네. 사실은 몇 달 전에 팀장님에겐 전달해두었던 내용이어서, 신입인 주제에 미리 날짜를 받아뒀어요.”

    “근데 왜 이제야 말해요?”

    누리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라서….”

    “하하. 어쩐지.”

    머리가 핑글 돌았다.

    “얌전한 고양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그럴 리가요. 무조건 축하해요.”

    결혼이라. 다정이 청첩장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이 깊어졌다.

    “참. 팀장님이 잠깐 수간호사실로 와달라고 전해 달랬어요. 선생님 3-3번 환자 보러 가신 사이에 전화 왔었거든요.”

    “금방 다녀올게요.”

    “넵.”

    수간호사실로 가는 동안 복도가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열이 나는 모양이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만지자, 열기가 후끈했다.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업으로 먹고살면서, 정작 자신을 돌볼 여력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다 크리스마스 때문이다.

    다정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좋질 못하는데, 마주하는 환자마다 크리스마스 때 뭐하냐는 안부를 물어왔다. 그녀는 앵무새가 되어 같은 대답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일해야죠.’

    겉으론 웃었지만, 속에선 구멍이 숭숭 나고 있었다. 그 구멍은 질문과 대답이 오갈 때마다 커져만 갔다.

    아마도 성후의 부재가 가장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시작한 연애라서가 아니다. 운명이라 느껴질 만큼, 온몸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도 홀로 맞는 크리스마스여서 괜히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매년 듣는 질문에도 마음이 유난히 엄살을 떨었다.

    머리로는 그의 치료가 중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럴 때는 풋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미성숙하게 구는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면 이게 다 몸살 때문이야….”

    그렇게 무슨 탓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수간호사 실에 도착해 노크했다. 가녀린 팔인데 무겁게만 느껴진다.

    “네.”

    “팀장님? 부르셨다고요.”

    “아. 다정아. 어서 들어와.”

    다정은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섰다. 사실 그것도 어려워 곁에 있는 철제 책상에 살짝 기대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친절 상(QL질향상) 너한테 간다? 아니, 또 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축하해.”

    다정은 말없이 웃었다. 아니, 겨우 웃는 것이 다였다.

    “올해도 고생했어.”

    “아니에요.”

    “이제 퇴근이지? 어서 가 봐.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 다정의 가슴에 온종일 박힌 단어.

    “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쓰다 만 간호일지를 겨우겨우 쓰고 나이트 근무 간호사에게 인수인계했다. 탈의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몸은, 정말이지 최악의 상태였다. 으슬으슬 춥기도 하면서 동시에 진땀이 흘렀다. 온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도 처졌다.

    “하….”

    캐비닛 속에 들어 있던 체온계로 열을 재보았다. 38.7˚ C. 고열이다. 아마 밤이 되면 더욱 오르리라.

    다정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다. 해열제를 먹고 푹 자주면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이다. 복도 앞 승강기 앞에 섰다가,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고서 비상구로 발길을 돌렸다. 손잡이를 잡고 바들바들 내려가 묵직한 비상구를 다시 열었을 때 온 세상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택시 타는 호사를 누릴…

    생각이 뚝 그쳤다.

    병원 로비에서부터 은은하게 퍼지는 피아노 선율은, 벽을 짚고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울렸다. 완전히 로비까지 나오자, 병원에서 가끔 행사를 여는 용도로 사용하던 무대가 개방되어 있었다.

    로비 정중앙에 집채만 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어서, 무대 위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이 누구인진 잘 보이지 않았다. 다정은 흐린 정신을 부여잡고 무대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슴이 뛰었다.

    피아노라니.

    성후가 곁에 없어도 꼭 그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약을 먹고 올걸.

    후회됐다. 어느새 병원 안을 꽉 채운 이 아름다운 음악을 끝까지 듣고 싶었다. 피아노 연주가 더욱 반가웠던 이유는, 캐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Whitney Houston의 .

    온종일 크리스마스 안부에 시달렸던 다정에겐 몹시 고마운 선곡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감싸고 있는 원목 벤치에 털썩 앉았을 때, 드디어 연주자의 등이 보였다.

    “…!”

    다정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울면 안 되는데, 울면 더 열이 오를 텐데….

    하지만 눈물은, 댐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흐윽…”

    미국에 있어야 할 그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환영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실체다.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음 이탈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작은 위기를 넘기는 연주 앞에 다정은 감읍했다. 그가 정말 한국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제 앞에.

    비록 시야는 뿌예졌지만, 성후가 선물하는 음악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마음속 번뇌는 아름다운 선율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연주가 끝나자, 환아를 제외하고 숨죽여 듣던 청중이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쳤다. 특별한 날, 병원에 남은 이들은 다정 못지않게 적적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가 성후로 인해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었다.

    성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러다 다정을 발견하고서 마이크를 쥐었다.

    “아아. 잠깐 손을 풀어봤는데… 듣기에 괜찮았습니까.”

    다정에게 보낸 질문에, 청중들이 대신 그렇다고 답했다.

    “지금부터가 진짜니까 잘 들어주세요.”

    다시 함성과 같은 대답이 들렸다. 성후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피아노에 부착된 마이크 전원을 올렸다.

    겨울과 꼭 어울리는 도입부였다. 잔잔한 반주에 이윽고 성후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곡명은 <모든 날 모든 순간>.

    노랫말이 꼭 다정에게 하는 고백과 같았다. 눈물이 멈추질 않아, 열이 가파르게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흐려져 가는 정신을 붙잡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안했던 나의 고된 삶에-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와 날 웃게 해준 너-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해. 긴말 안 해도 눈빛으로 다 아니깐- 한 송이의 꽃이 피고 지는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해-”

    성후 씨….

    “알 수 없는 미래지만 네 품속에 있는 지금 순간순간이 영원했으면 해- …… 처음 내게 왔던 그 날처럼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해.”

    노래가 끝나고 성후가 다정에게 다가왔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붙이고 다정의 젖은 뺨을 닦아준다.

    성후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환히 웃으며 말했다.

    “결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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