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새빨간 선물
마지막 인장을 찍듯, 행사 참여 인원들이 줄 맞춰 무대에 섰다. 무대 뒤로는 ‘작은 정성! 큰 사랑! 불우한 이웃과의 행복 나눔!’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그 앞으로 결혼식 하객처럼 어색하게 서 있는 사람들 끝에 다정이 있었다.
“자, 찍습니다!”
사진사가 신호를 주자 가뜩이나 어색한 미소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대부분이 정장 차림인 가운데, 간호사 정복 차림의 다정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정복 때문만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 시선이 카메라보다 더 그녀를 주목하게끔 만든 것이다.
긴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성후의 눈빛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기민하게 다정을 쫓았다.
“다시, 한 장 더 찍습니다!”
그런 성후의 시선을 느낀 다정은 다소 민망했지만, 최선을 다해 웃어 보였다. 홀로 주목받는 자리도 아닌데, 역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직업은 할 게 못 된다 느끼며.
“좋습니다!”
이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취지와는 맞지 않은 귀족 파티가 연상되었다. 우아한 미소에 정해진 문구를 읊는 듯한 뻔한 인사들.
그 속에 다정도 갇혔다.
“온다정 선생님!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최 측 본부장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짤막한 연설을 한 서울 시장을 제외하고는 누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정에겐 그저 모두가 같은 익명일 뿐이다.
혼란스러워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가슴은 불안으로 뛰었다. 늘 그랬듯 성후가 난입해 저를 끌고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착각이었다.
성후는 제 자리에 딱딱하게 앉아, 눈으로만 다정을 쫓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몹시 뜨거워 무력으로 끌고 가지 않아도 온 영혼이 그에게 빨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다정 씨?”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면서도 시선 끝에 걸린 성후의 존재가 가장 크게 와 닿았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그에게, 누구도 아는 척을 못 했다. 결혼 기사가 아니라 부고 기사가 난 화제의 인물처럼 모두가 힐끔, 눈으로만 그를 구경했다.
그런데 그때. 웬 용자가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하나둘 사람들이 성후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건드리면 폭발하는 개복치처럼 예민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공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지만, 다정이 아는 그의 성격상 큰 이슈를 만들까 불현듯 걱정이 앞섰다.
“잠시만요.”
다정은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나갈게요. 죄송해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성후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다정이 보이지 않으니 시야 같은 건 불필요하다는 듯. 목석같이 앉아 있는 그에게 어렵사리 말을 붙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모두가 수군거리다 결국엔 떠나간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다정의 목소리에 그가 눈을 떴다.
“바라던 바입니다.”
결투라도 할 것처럼 두 사람이 서로를 맹렬히 쳐다보았다.
*
잠시 성후가 거주 중인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함께 들어가자는 성후에게, 다정이 정색하며 각자 갈 것을 요구했다. 자신도, 그도 더 이상의 가십은 사양하기 때문이었다.
성후가 먼저 호텔로 향했고, 챙겨 온 사복으로 갈아입은 다정이 30분 뒤 호텔로 들어섰다.
똑똑.
노크하자, 불쑥 튀어나온 손이 다정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휘청이며 그에게 폭 안기는 순간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이 위로 들렸다.
성후는 다정의 모자를 벗겨내 그녀의 얼굴을 깊게 뜯어 보았다.
“가린다고 가려질까요. 당신의….”
다정이 두 손을 뻗어 성후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흘러가면 안 되잖아요. 분위기가.”
의지를 듬뿍 담은 목소리완 별개로 손바닥에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히 짐승의 여친다워. 다정은 속으로 자신을 타박했다.
장난기가 거세된 성후의 눈은 오늘따라 진지하게 빛났다. 다정의 손을 꼭 잡아 내리며.
“들어와요.”
소파로 향했다. 경직된 그의 등을 따르며 다정이 크게 울리는 심장을 추슬렀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차라리 곁에 앉는 게 편했겠다 싶을 정도로 다정을 직시하는 성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왜 자꾸 쳐다보세요?”
“놓칠까 봐서.”
“뭘요?”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닌지…. 당신은 그런 걸 잘하지 않습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한 척.”
그러자 다정이 피식 웃는다.
“씩씩한 건 사실인 걸요.”
“압니다. 하지만 언제나 씩씩하게 군다는 게 문제죠. 조금은 드러내도 괜찮잖아요. 아니면 욕을 해도 좋아요.”
“성후 씨한테요? 제가 왜요?”
“미친 기사가 나가는 동안… 무얼 했냐고. 당신 집안이 그랬다면, 대체 그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거냐고. 어떤 비난도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진심 어린 그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얼굴이었다.
“싫네요.”
“왜 싫습니까?”
“저보단 성후 씨가 받는 고통의 무게가 더 클 것 같거든요. 저까지 당신을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조금 속상하다고 마음껏 화내기엔….”
다정도 성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어려운 진심을 꺼냈다.
“당신이 너무 귀해요.”
뜻밖의 고백에 성후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쿵쿵 뛰는 심장도 그의 균형을 깨트리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성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움찔하는 건 알지만, 상관없었다.
고운 마음씨에 고운 말까지 하는 그녀를 제 품에 넣고서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안 사랑합니까, 당신을. 어떻게.”
빠르게 뛰는 두 개의 심장 고동이 서로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다정은 성후의 커다란 등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태연하진 못했지만, 아무 상상도 하지 않았어요.”
성후가 좀 더 강하게 다정을 끌어안았다. 다정은 그의 품에 갇힌 뒤 눈을 꼭 감았다.
“이렇게 뜨거운 성후 씨를… 믿지 못할 리 없잖아요.”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다. 다른 언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따뜻한 침묵을 깬 건 성후의 물음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근무합니까.”
“간호사에게 크리스마스는 사치죠.”
“이런.”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지며 성후가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구긴다.
“나는 미국 갑니다. 그때는 못 보겠군요.”
“손… 때문에요?”
성후가 고개를 주억인다.
“잘 다녀와요. 며칠이나… 못 보겠어요.”
아쉬운 목소리로 말하는 다정의 손등에 키스하며, 성후가 물었다.
“받고 싶은 거 없습니까.”
“글쎄요.”
그의 입술이 닿은 손등이 화끈거렸다. 다정이 은근히 시선을 돌리자, 성후가 그 미묘한 낌새를 읽고서 다가왔다. 가까이. 더 가까이. 뒤로 물러나던 다정이 결국 소파 위로 털썩 누워졌다.
“나는 주고 싶은 게 있는데.”
다정이 잠시간 머뭇거리다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그럼 받아볼까요.”
“이왕이면 느긋하게 받아요. 아직 날이 훤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는 성후다. 슈트와 셔츠가 차례대로 벗겨지며 널찍한 맨몸을 드러냈다. 해를 받은 그의 몸이 아름답게 반짝거렸고 다정은 홀린 듯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천천히 쓸었다.
성후가 씩 웃는다.
“더듬지만 말고 확실히 만져봐요. 다 당신 거니까.”
그의 말 덕분에 다정의 손짓이 조금 더 과감해졌지만, 그거론 부족하게 느껴지는 성후다.
그는 다정의 손을 낚아채 아래로 내렸다. 묵직한 페니스가 또 다른 생명체라도 되는 듯 바지 위로 뜨겁게 꿈틀거렸다.
확실한 존재감 어필에, 다정이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커요.”
검붉은 색과 도드라진 혈관 등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압니다.”
“조금… 휜 거 같은데.”
다정의 말에 성후가 기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도 느껴진단 말입니까.”
“느, 느낀다기보다, 딱 만져 보니까…….”
대범하게 굴던 그녀의 손도, 입술도 멈췄다.
성후는 그런 그녀를 끝까지 몰아세우고 싶어졌다.
“만지는 거로 되겠습니까. 보는 편이 더 정확하죠.”
그가 몸을 일으키자, 바람이 일었다. 성후는 과감하게 하의를 벗어 던지고서 씩 웃었다. 다정은 입술을 깨물고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자신감… 끝장….”
“큭큭큭. 자꾸 웃기지 말아요. 힘 빠지니까.”
“빠지면 안 돼요?”
다정이 묻는데, 성후는 자연스레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불거진 성기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쿡쿡 찌르는 데도, 태연하게.
“나보다 당신이 곤란하지 않을까.”
다정의 속옷만을 남기고 모두 벗겨낸 성후가 덧붙였다.
“강도가 달라질 테니까.”
그러자 다정이 약 올리듯 그의 가슴을 쓸며 반문했다.
“분위기에 따라 강도가 달라진다? 그건 좀 아쉬운데요?”
장난스레 내는 콧소리가 섹시했다. 성후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브래지어 호크를 풀며 말했다.
“도발해서 어쩌려고 그러지.”
“책임질 자신이 있다면?”
다정의 웃음기 밴 목소리조차 야하게만 들린다.
“나만 쌓였던 게 아니란 소리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서요. 오늘 저, 집에 보내지 말아요.”
빼는 것보다, 당돌한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태도와 달리 붉어진 볼도 사랑스러웠다.
새하얀 살결을 드러내면서도 숨기지 않고 뻗는 팔은 하늘거리며 성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살아있는 예술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구석구석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성후는 근육이 꿈틀거리는 팔로 제 몸무게를 지탱하고서, 다정의 입술을 가졌다.
손은 그녀의 여린 살들을 헤집고 다닌다.
용감한 소년이 세상을 처음 마주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다정의 몸을 탐험하는 손길에, 그녀가 짧게 신음했다.
“그 목소리도 모조리 빨아 먹고 싶어.”
그가 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침대로 가요. 나도 참지 않을 거야.”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로 청하며 성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긴 채 번쩍 들렸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엉덩이 아래로 단단하고 뜨거운 페니스가 툭툭 닿았다.
그가 침실 슬라이딩 도어를 밀며, 낮게 경고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야.”
“두 발로 걸어나갈 꿈은 꾸지 않을게요.”
“아니.”
그가 다정을 완전히 침대에 눕히며, 잔악하게 웃어 보였다.
“기어갈 수조차 없을 거야. 기대해.”
* * *
누리가 청첩장을 건네자 부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결혼?? 혹시…?”
그러다 곧 흐리게 뜬 눈으로 누리를 쳐다보자, 그녀가 격하게 손을 저었다.
“사고 친 거 아니에요! 오빠가 나이가 좀 있어서. 어른들이 빨리 결혼하라고 하도 재촉을 하셔서…. 좀 일찍 가게 되었어요. 헤헤.”
“빨리 가서 안정 찾는 거, 나쁘지 않지. 축하해.”
쑥스러운 얼굴로 감사하다 말하는 누리를 뒤로했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받는 청첩장이라니. 마음이 추웠다. 이러다 외로움에 말라 비틀어 죽는 건 아닌지.
점심시간이 되어 구내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정갈한 폼으로 앉아 식사 중인 연석이 보였다. 분명 제 입으로 입맛이 까다롭다고 했었는데, 병원 밥을 태연하게 먹는 모습에 쿡쿡 웃음이 나왔다.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이 언행 불일치의 진수를 보여준다.
부연은 식판을 들고 얼른 연석에게 다가갔다.
“같이 먹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