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오직 너에게로 직진!
갑작스러운 봄을 만난 사람처럼, 부연은 종일 멍했다.
눈에 띌 만큼의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경력으로 체화된 노련함과 타고나게 야무진 손끝으로 제 몫 정도는 너끈히 해내는 간호사였다. 장점이라면 환아들과 잘 지내는 것 정도.
그런 그녀가 오늘은 신규 간호사처럼 실수를 연발했다. 결국 수액 풀드롭으로 인해 맡은 환자의 혈관이 붓는 사태가 발생했고 수간호사 정희에게 따끔한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왜 이렇게 얼이 빠져 있어? 정신 좀 차리자. 신 선생님!”
“죄송합니다….”
뭘 했는지 모르겠는데 시각은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밥 생각이 없다. 간호사 스테이션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깨끗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안 먹어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무감한 얼굴의 연석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연석이 미간을 구긴다.
“어디 아파요?”
그의 말투가 조금은 편해졌다는 것을, 부연은 느낄 수 있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끼니 챙겨가며 일하세요. 그럼.”
짧게 묵례하며 돌아서는 폼이 깔끔하다. 미련은 1도 없다는 뉘앙스의.
온종일 자신의 정신을 쏙 빼놓았던 상대가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다 마성후 환자의 방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아….”
앓다 죽지. 앓다 죽어.
늘 그랬듯, 오래가지 않으리라 자위하는 부연이었다.
* * *
병실 문을 닫자마자, 긴장이 연석을 급습했다.
허위 스캔들이라니.
그것도 기사가 뜬지 만 하루가 지났는데 성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이틀 전. 부연과 식사 중, 기사가 터진 것을 뒤늦게 알고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돌아왔었다. 성후는 말간 얼굴로 물어왔다.
‘빨리 왔군. 선물 리스트는 뽑아 왔겠지?’
밥만 먹고 그냥 돌아왔다는 것을 인지한 연석이 말을 빙빙 돌리자 성미 급한 성후가 비 오는 날 먼지 털듯, 저를 털어 댔다.
이후로 쭉 그를 주시했건만, 여전히 핵폭탄급 뉴스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개 쌍 마이웨이라지만, 이리도 인맥이 없을까….
“너 말이야.”
성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연석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네, 네?”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라이브로 보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제부터 대체 뭐야.”
“뭐가 말입니까…?”
“계속 감시하는 거 같단 말이지.”
성후가 연석을 지그시 뜯어보며 말했다.
“하하. 그게 제 일이지 않습니까.”
“연석아.”
“네, 형님.”
“어색해. 웃지 마.”
“아.”
연석은 억지로 웃던 미소를 그치고 눈을 말똥말똥 떴다.
“그 눈도 기분 나쁘고.”
“어쩌라는 건… 흐음. 에취!”
“핸드폰…”
“네?? 핸드폰이 왜요?”
성후의 손에 들려 있는 저 요망한 것이 가장 문제다. 하루는 무사히 넘겼다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연락이 올지 모른다. 그의 성질이 곱지 않아 누구도 가십을 두고 떠들기 어렵겠지만, 가령, 가족이 연락해온다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연석의 몫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안 돼. 그러니까 카톡도 안 되고.”
그러면서 핸드폰을 든 손을 위로 번쩍 들어 보인다. 몇 번 흔들다 다시 내리며 핸드폰을 강하게 터치한다.
“겨우 문자나 전화만 되는데, 오는 연락이 없으니 고장 난 거 아닌지 모르겠다. 전화해 봐.”
그의 말대로 제발 고장이 났길 바라며 통화키를 눌리자 성후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성후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조용하단 말이지.”
“원래 조용했지 않습니까.”
“…아니지. 뜨문뜨문 다정 씨한테는 연락이 왔단 말이야. 그조차 오지 않으니. 하아…….”
“줘 보십시오. AS센터 가서 고쳐 오겠습니다.”
맡겨두고 영영 찾아오지 않을 심산으로 말했다. 그러자 성후가 고개를 젓는다.
“신통치 않아도 다정 씨한테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데, 그럴 수 없지.”
젠장.
그때였다. 성후의 벨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운명. 그 강인한 소리가 병실을 장악하자 연석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음?”
성후가 발신자를 확인한다.
“모르는 번호입니까? 줘 보십시오. 김미영 팀장일지도 모릅니다. 훔친 개인정보로 장난치는 이것들은 단박에 결딴을 내야 합니다. 얼른요.”
과도하게 열 올리는 연석을 보며 성후가 전화를 받았다.
“Hello.”
상대편 목소리도 언뜻 들렸다.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안심은 이르다. 그의 몇 안 되는 인맥은 대부분 해외 각지에 흩어져 사는 외국인이었고 가르니크 뉴스는 전 세계적으로 퍼지기 때문이었다.
연석이 귀를 쫑긋 세우다 못해 서서히 그의 핸드폰으로 다가갔다. 완전히 그의 곁에 바짝 붙었을 때 성후가 몸서리치며 역정을 냈다.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지?!”
“아… 그게…”
“브라이언 박사님이셔. 저리 좀 가 있어.”
귀찮다는 듯 손을 후치는 성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연석.
손가락 상태에 대해 여유롭게 통화하던 성후가 곧 마지막 인사를 할 때였다. 브라이언 박사가 고조된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자, 성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화를 끊은 그가 엄한 얼굴로 연석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지?”
갑자기 병실 안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연석은 숨을 흡, 참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가 봐.”
“형님.”
“꼴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그가 베개를 던지며 말했다. 그 바람에 손등에 꽂혀있던 바늘이 휘면서 링거 바늘이 뽑혔다.
“피…!”
성후의 손등 위로 번지는 피를 보며 연석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나가.”
“…네. 금방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연석이 나간 뒤, 성후는 심호흡을 했다. 연석의 잘못이 아니다. 이런 기사를 낼 수 있는 건…….
선화에게 전화를 걸어, 진의를 먼저 파악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벌써 어제 난 기사다. 느긋하게 순서를 밟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침착하기도 하다.
“뭡니까, 기사.”
-잠잠하길래, 받아들인 줄 알았다.
“당사자는 모르는 약혼녀며, 결혼은 다 뭐냐고 물었습니다!”
-시답지 않은 연애 놀이 그만하고 이제 장가가야지.
“언제는 연을 끊으신다면서요. 그리 하시죠.”
-아들 마음 돌리는데 부모 된 자로서 무슨 말이든 못할까.
“언제부터 부모 노릇을 하셨다고, 이제 와 제 인생에 간섭하시는 겁니까! 이제 와!”
-마성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해외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방황할 때! 그때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셨습니까! 저는 ‘아버지’를 포기한 지 오랜데, 왜 아버지는 제게 아들의…, 가르니크 아들의 역할을 강요하시는 겁니까! 끝도 모를 정도의 돈을 가지고도, 재벌가 사돈이 필요했습니까?! 아버지 욕심에 신물이 다 나는군요.”
잔뜩 흥분한 성후가 가슴을 오르내리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가라앉을 리 없다.
“정정 기사 내세요. 아버지가 시작한 무리수. 아버지가 거두십시오.”
-네가 그 여자애한테 단단히 씌웠구나.
“하.”
성후가 비웃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랑 없는 재혼을 하셨습니까? 초혼처럼?”
-배은망덕한 놈. 너를 키워준 사람을 두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네! 저는 새어머니 밑에 자란 놈이지, 아버지 밑에 자란 놈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오랜만에, 제대로 사고 한 번 쳐 드릴까?!”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성후는 전화를 끊고 거칠게 병실 문을 열었다.
“다정 씨는!”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연석이 바짝 언 채로 다정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 * *
“힘들죠?”
불우이웃 모금 행사에 참여한 다정에게, 꽤 이름 있는 배우가 다가와 생수를 건넸다. 간이 대기실 안은 모처럼 고요했다. 다정은 고개를 주억이며 시인한다.
“네. 보통 일이 아니네요.”
그 한 마디에 다정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동빈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음 대화를 이었다.
“사실 제가 온다정 선생님 팬이에요. 다큐멘터리도 봤었는데, 그때는 참 고운 간호사구나 정도로 생각했었거든요.”
다정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유명한 배우가 저를 안다니. 새삼 방송의 힘에 놀란다.
“그런데 뉴스 인터뷰를 보고 완전히 반했습니다. 아, 물론 팬으로서요.”
“과찮으세요. 저보다 훌륭한 간호사가 세상엔, 더 많답니다.”
다정이 코 밑을 훔치며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게 다가 아니죠. 실물이 훨씬 아름답기도 하고요.”
“하. 그건 좀 거짓말 같네요. 매일 예쁜 연예인분들 사이에 계시면서. 과대 칭찬은 사양이에요. 사실 지금도 몸들 바를 모르겠거든요.”
그러면서 씩 웃는 다정. 동빈은 그녀의 성격이 파악되었다. 드물게 진솔한 사람.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인품까지 더 해진.
“진짠데.”
대기실 안으로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안정된 자세로 앉아 다정을 바라보던 동빈의 눈가가 휘어진다.
“아.”
낯 간지러워 목을 벅벅 긁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는 다정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행사 진행 요원이 들어왔다.
“곧 마지막 사진 찍는다고 하는데요. 10분 뒤입니다. 스탠바이 해주세요!”
잘 됐다.
“저는 따로 준비할 것이 없으니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그럼.”
단정하게 인사하고 대기실을 나가는데 동빈도 따라나섰다.
“저도 메이크업은 다 한 상태여서 뭐.”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때 복도를 지나가던 스텝들이 성후의 이야기를 했다. 재벌가의 정략결혼이라느니, 뭐라니.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병원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는데, 들을 때마다 어깨가 경직되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다정 씨도 마성후 팬?”
다정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재벌가가 어떤 건지, 그곳이 어떤 세상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이번 일로 명확하게 알게 된 한 가지.
성후의 집안에서 저를 완벽히 무시한다는 사실.
가슴 아프지만 납득도 쉬운 일.
사실 더 나쁜 생각도 들었다. 자신 따위는 신경 쓸 대상조차 되지 않으니, 이건 성후를 압박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고.
그 역시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정 씨.”
어쩌다 보니 동빈과 함께 복도를 거닐게 되었다.
“네?”
“친구하고 싶어요.”
“엑?”
다정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동빈이 큭큭 웃는다. 머지않아 그의 웃음이 뚝 그쳤다.
“어?”
시선을 멀리에 두고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마성후…? 여긴 웬일이지??”
다정의 시선도 복도 끝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아도 큰 키에 시선을 휩쓰는 아우라가 대단했다. 성큼성큼. 1초가 1분처럼 흐른다. 다정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어느새 성후는 두 사람 앞에 완전히 다가왔다.
동빈 따위는 보이지도 않다는 듯, 성후가 다정의 손목을 덥석 잡고서 물었다.
“봤습니까?”
그의 눈엔 거의 살기나 다름없는 기운이 어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움츠러든다.
성후의 막역한 말투에 동빈도 놀라 성후와 다정을 번갈아 보았다. 성후는 다정의 대답이 늦어지자, 답답하다는 듯 재차 물어왔다.
“빌어 처먹을 기사. 봤냐고.”
다정이 입을 우물쭈물하다 겨우 대답한다.
“…네.”
“하아…”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허리를 굽혔다. 아름답고 큰 손을 뻗어 다정의 두 귀를 느슨하게 막으며 또박또박 각인시킨다.
“…믿지 마.”
언뜻 사나운 말투 같지만, 다정에겐 꼭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가 한층 더 깊게 다정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보지도 마. 내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내가 말하는 거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