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60화 (60/82)
  • ?60화. 누나가 정해

    “왜 그러고 있어? 울었니?”

    다정은 눈가를 찍으며 씩 웃는다.

    “그냥.”

    “차였어?”

    다정이 피식 웃으며 반문한다.

    “그러길 바라지?”

    부연이 털썩, 다정의 곁에 앉는다. 그리고 제 주머니를 뒤적이며 사탕을 하나 건넸다.

    “너 좀 멋있더라.”

    다정은 언젠가 부연에게 건넸던 사탕을 기억하며, 묘한 기분에 빠졌다. 사탕을 받아 비닐을 벗긴 뒤 입으로 쏙 넣었다.

    “응?”

    “싸우는 거 말이야.”

    다정의 눈동자가 요리조리 굴러간다. 얘가 무슨 소릴 들었나….

    “바이러스랑.”

    “아.”

    “네 말대로 내가 너무 직업의식 없이 일했다는 생각도 들고. 무균 병동에서 목숨 걸고 투쟁하는 의료진들 보면서….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어.”

    늘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부연의 목소리가 영 기운이 없다.

    “그렇지도 않아.”

    부연을 마주하기 전에, 다정은 잠시간 생각에 빠졌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정말 간호사의 열악한 환경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이 맞을까, 하고.

    그러자 스스로가 의심됐다.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것이었다. 두려움까지 외면하며 목소리를 냈던 건, 약자의 오기가 아니었던가 하고.

    또 과연, 모든 간호사를 대표해 나설 자격이 있는 건지 그 역시 의문스러웠다.

    “아니, 너는 그래.”

    확신에 찬 부연의 말투 때문인지 귀가 바짝 섰다.

    “그런 간호사야. 너처럼 올곧은 간호사가 있어야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변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 우리 모두 한때는 그런 간호사가 되고 싶었지. 하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부터 일은 일일 뿐이고. 하루 주어진 업무를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벅차. 생각할 틈도 없이 의무적인 움직임만 반복되지.”

    스스로가 의심되는 순간, 뜻밖의 동료에게서 적절한 위로를 듣게 되었다. 다정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묻는다.

    “갑자기 왜 그래. 이렇게 띄어주고.”

    “기분 좋아할 거 없어.”

    “…응?”

    “너무 잘나면 피곤한 일투성이잖아? 팀장님한테 들었어. 바빠진다며.”

    “나 빼고 다 알고 있었구나.”

    “잘난 걸 어떡하니. 운명이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무난한 난 선보러 간단다.”

    “선?”

    “이제 백마 탄 왕자님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고. 드디어 타협하는 거지. 며칠만 지나면 서른 하난데, 언제까지 꿈으로 살 순 없잖니.”

    그렇게 말하는 부연은 씁쓸하다기보다 후련해 보였다.

    “좋아 보여.”

    다정이 시름을 잊고서 말했다.

    “나는 흘러가는 대로 살지만, 온다정 너는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 지금처럼. 그게 너다워.”

    아래층에서 듣고 있던 성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 * *

    며칠 뒤. 성후는 다정과 맞이하는 첫 이벤트 날에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는 한 몸과 같은 환자복을 입은 채로 말이다.

    “곧 크리스마스야.”

    성후의 말에 책을 보던 연석이 성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거두어 다시 책을 보았다.

    성후 이마의 핏줄이 불거졌다.

    “듣고 있냐.”

    “들리기는 한다만, 딱히 해줄 말은 없습니다.”

    “선물은 뭐가 좋을까.”

    “그것도 잘.”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 봐.”

    성후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구겨진 성후의 인상을 발견한 연석이 그제야 책을 덮었다.

    “상점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그렇다고 네가 사라는 대로 사지 않을 거야. 하라는 대로 하지도 않을 거고. 어디까지나 참고만 할 거야. 참고만.”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는 성후다.

    “어련하시… 아니. 네. 물론이죠. 월급 받는 몸인데, 놀면서 시간을 보낼 순 없지 않습니까. 미세먼지만큼의 보탬이라도 되겠습니다.”

    “말이 왜 이렇게 길어.”

    “나가면 추워서 잠시 시간을 끌… 아닙니다. 뛰겠습니다.”

    “어. 당장. 롸잇 나우!”

    병실을 나오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복도 가득 음식 냄새가 퍼졌다. 어쩐지 배가 고팠다. 어차피 병원식은 별맛이 없으니 나간 김에 근사한 음식이나 사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말이다.

    “흐흐.”

    성후를 두고 홀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을 했더니, 괜히 고소했다.

    “흐음!”

    우선 번화가로 차를 몰았다.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대학로보다 명품관이 즐비한 쇼핑 거리가 나을 것 같았다.

    그전에, 식도락인 연석은 스스로를 만족시켜 줄 식당을 먼저 물색했다. 성후의 두루뭉술한 지시는 어차피 완벽한 정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뿐인가. 하루는 아직 반이나 남았다.

    “음…”

    크고 웅장한 명품관을 지나자 요즘 유행이라던 프랜차이즈 맛집이 밀집해 있었다. 프랜차이즈 음식점은, 첫 한술은 괜찮을지 몰라도 먹으면 먹을수록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MSG에 예민한 연석이어서 더욱 그랬다.

    좌절감이 몰려오는데 저 끝에 우뚝 선 빌딩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호텔이었고, 예전에 성후와 와 본 적이 있던 곳임을 기억해냈다. 음식 또한 괜찮았다. 퍽 마음이 놓였다.

    호텔 정문에는 웅장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대칭을 이루고 서 있었다. 은은한 캐럴이 울려 퍼지고 호텔 직원들은 새빨간 산타 모자를 쓴 채 방문객을 환영했다.

    귀여운 건 질색하는 연석이어서, 재빨리 레스토랑으로 직진했다.

    레스토랑 입구에도 작은 트리들로 꾸며져 있었다. 온 세상이 크리스마스에 들뜬 것이다.

    “예약하셨습니까.”

    다소곳이 머리를 묶은 직원이 연석을 반겼다.

    “아닙니다.”

    “그럼 이쪽으로.”

    안내받은 자리는 체리목 파티션으로 가려져 있어 혼자 온 사람이 안기에 딱 좋았다. 연석은 간단한 브런치를 주문하고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통창 밖으로 저 멀리 우뚝 솟은 남산타워가 보였다.

    다시 시선을 돌리는데, 입술을 잘근 씹으며 초조하게 앉아 있는 여성이, 파티션 사이사이로 조각나 보였다. 착각인지 낯익다. 연석은 눈을 흐리게 뜨고서 파티션 사이로 보이는 여자에게 집중했다.

    누구더라…. 아!

    신부연이라던 간호사였다. 늘 간호사 정복에 갇혀 있던 그녀는 오늘 긴 생머리를 깨끗하게 내리고 가장 보편적인 샤넬 투피스를 입었다. 꼿꼿하게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에는 베이지색 모직 코트가 걸려있었다.

    느낌이 왔다.

    맞선보나 보군.

    연석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커피 대신 주문한 당근 주스가 테이블로 나왔다. 왜인지 크리스마스 캐럴이 듣기 싫어 무선 이어폰을 착용하려는 순간, 바리톤의 목소리가 먼저 귀에 박혔다.

    “상당한 미인이라고 들었는데, 글쎄요.”

    저평가하는 말투가 몹시 거슬렸다. 맞선 상대라기보단 인사 고과에 점수를 매기는 고위 관리자 같은 말투였다. 연석은 우아한 혼밥을 포기하고서 무선 이어폰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여성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수다가 많은 바리톤의 목소리는, 연석이 듣기엔 끔찍했다. 끊임없이 웅웅 울렸다. 어째서 귀까지 기울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외모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죠.”

    그러면서 어색하게 하하, 웃는 부연이었다.

    “하긴. 또 보면 볼수록 정이 갈 수도 있겠고요.”

    “네, 뭐….”

    너무 뻔뻔한 남자의 말투에 연석이 파티션 사이로 힐끔 남자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키는 모르겠지만, 일단 체구가 크고 강인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쯤. 나쁘지 않은 외모였지만, 볼록 나온 배를 보았을 때 어지간히 술고래인 듯 보였다.

    뭐, 물론 뇌피셜일 뿐이다.

    그가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아니면 패스트푸드 중독자인지 같은 건 연석의 관심 밖의 일이니 말이다.

    “병원은 계속 다닐 생각이시죠?”

    “그래야죠.”

    “요즘은 맞벌이가 필수지 않습니까.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는 말도 다 구시대적 발상이죠. 일해서 자아실현도 하고, 살림에도 이바지하고.”

    “아, 네.”

    연석이 고개를 갸웃한다. 부연의 목소리에 분명 감흥이 없는데도 그녀가 수동적으로 앉아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기억 속 부연은 하이톤 목소리로 앙칼지게 톡톡, 서슴없이 발언하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낄 때 안 낄 때 구분도 못 하고서.

    눈치를 삶아 먹었나, 싶다가도 가끔 속으로 웃기도 했다. 분별력 없는 태도가 조금은 귀여웠던 것이다.

    “저는 뭐든 반반을 원합니다.”

    “반반이요?”

    “결혼에 대해서요.”

    “아.”

    “집도 반. 혼수도 반. 맞벌이에 맞게 급여에서 생활비를 반반 각출하고 나머지 부분은 각자 관리하고. 물론 아이를 낳게 되면 아무래도 여성 쪽 노고가 크다 보니, 그때는 포상금을 드릴 생각입니다.”

    포상금. 피식. 같은 남자가 듣기에도 어이가 없어, 비소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다음이 더 가관이다.

    “저는 안타깝게도 자궁이 없는 관계로. 하하하하.”

    듣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저질스러운 농담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마침 색색의 샐러드와 토마토 수프, 앙금과 치즈가 들어간 버터 빵 등이 먹기 좋게 나왔다.

    “하….”

    연석은 비위가 약한 사람이었고, 뭐든지 한번 식으면 그걸로 끝인 사람이었다. 지금은 식욕이 그랬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연석이 일어나 부연의 테이블로 향했다.

    “누나.”

    단박에 연석을 알아본 부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누나? 아는 동생입니까?”

    남자가 여유롭게 웃는다. 연석은 남자에게서 등진 채 부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조금 무례하게 굴겠습니다.

    찰나의 순간, 부연이 거절 의사를 표한다면 관둘 생각이었다. 브런치값은 허공에 날리게 되겠지만, 여기를 떠나면 그만인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부연은 오묘하게 미간을 찌푸리다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허락이다.

    “죄송하지만, 이 맞선은 여기서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청년이 뭘 좀 모르네. 그건 당사자들끼리 정할 일입니다. 부연 씨. 안 그렇습니까.”

    쌍꺼풀이 진 동글동글한 눈이 부연에게로 향하자, 연석이 그 시선을 몸으로 막아서며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은 반반 결혼을 원한다면서요. 어쩌지. 우리 누나는 돈이 없고, 나는 그런 누나의 통장이 되어주고 싶은데.”

    “허.”

    남자가 그제야 연석의 옷차림을 뚫어지라 스캔했다. 그저 젊은 청년이라 생각했는데, 날렵한 몸 위로 걸친 슈트는 고가의 명품이었다. 언뜻 보이는 시계 하며 구두까지.

    완벽한 조합이었다.

    성후가 옷을 살 때마다 깐죽거려 하나씩, 하나씩, 얻어낸 거지만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남자의 얼굴에 여유가 달아났다.

    “누나.”

    연석이 몸을 빙글 돌려 다시 부연을 친근하게 불렀다. 부연은 어쩔 줄 몰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취집할래? 두꺼비 같은… 아니, 저 쪼잔한… 아니, 검소한 남자한테 끌려갈래? 응? 누나가 정해.”

    그러면서 연석이 환하게 웃는다. 늘 냉랭한 표정의 그가 짓는 미소는 여기서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부연은 말 대신 손을 뻗어 연석의 슈트 끝자락을 잡았다. 그러자 연석이 픽 웃는다.

    “가자.”

    망설임 없이 부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코트도 연석이 기민하게 챙겼고, 카운터에 도착해서는 남자의 눈에 보이게끔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계산까지 말끔하게 끝낸 연석이 부연과 함께 캐럴 사이를 가르며 레스토랑을 나왔다.

    호텔에서 제법 벗어나, 부연의 얼굴을 빤히 직시하며 말했다.

    “이렇게 기죽은 모습보단, 병아리처럼 쫑알거리던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습니다.”

    부연이 눈을 깜빡거리자, 연석이 멈추지 않고 말했다. 표정은 어느새 평소처럼 냉랭해져 있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오해할 마음은 없는데, 설렜다. 아마 또 금사빠 병이 도졌나 보다.

    “어디 가서 저런 놈에게 후려치기 당할 정도로, 모자란 사람 아닙니다.”

    “아…”

    “이해했다고 대답해줘요. 그래야 이 미친 오지랖도 그만 떨지 않겠습니까.”

    “네. 이해, 했어요.”

    “좋아요. 이 근방에 맛집 알아요?”

    “네?”

    “밥 좀 사주세요.”

    부연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의 지갑을 열게 할 심산이었다. 계산이 깔끔해야만 잔여 감정이 남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벌써 뒤틀리고 있었다는 것을 연석은 알지 못했다.

    “네, 이 근방 맛집 알아요. 소박한 곳이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프랜차이즈만 아니면 됩니다.”

    쇼는 끝났지만, 부연의 심장은 계속해서 뛰고 있다는 사실을.

    * * *

    간호사에서 성후 여친으로 돌아가는 시간. 사복으로 갈아입고 털썩, 의자에 앉아 쌓인 메시지와 톱 뉴스 등을 확인했다.

    “응…?”

    실시간 검색어에 익숙한 활자가 보였다.

    「1. 마성후 결혼」

    「2. 마성후」

    「3. 마성후 약혼녀」

    「4. 가르니크」

    「5. 피아니스트 마성후」

    검색어 1위 문장을 클릭하자, 세계적인 두 재벌가의 결혼 소식이 인터넷 화면을 가득 채웠다. 본 적 없는 낯선 여인의 사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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