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59화 (59/82)
  • 59화. 건의 사항

    허리를 굽혀 키스하는 성후는 그의 말대로, 능숙했다. 상처 입은 성후의 등에 짜릿한 통증이 번졌다.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통각이었다. 그러나 성후에겐 이 통증조차 포상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다정의 무탈함이 제 몸에 새겨진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겨울에도 마르는 일 없는 다정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지분거리다, 다시 그 안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혀가 얽힐 때마다 가늘게 떠는 그녀의 몸이 성후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기억하는 것보다 매번 더 근사한 키스에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간다.

    힘을 빼야 하는데, 조금 더 부드럽게 다가가고 싶은데.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성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고 있던 다정이 조심스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럴 때마다 성후는 멀어지지 않고 바짝 다가오기만 할 뿐이었다.

    병실 입구에서 침대까지 뒷걸음질로 도달했을 때, 철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이 화장실 문고리에 걸려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젠장.”

    그제야 입술을 떼고서 아쉽다는 듯 다정을 바라보는 성후다. 고민할 겨를 없이 손 등에 꽂힌 바늘로 손이 향했다. 성후의 다음 행동을 본능처럼 읽은 다정이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안 돼요.”

    “나는 치료보다 당신이 더 급해.”

    환자는 모른다. 하지만 간호사는 안다. 시시한 치료처럼 느껴지는 거추장스러운 링거가, 환자에겐 꼭 필요한 조치라는 것을 말이다.

    다정이 불허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제 입을 가렸다. 그런데 입술에 남아 있는 그의 온기에 되려 그를 갈망하게 되었다. 안 돼. 온다정. 안 돼. 여기는 병원이고… 여기는…

    다정이 아는 성후는 이런 쪽에 감이 좋은 남자였다. 제 마음이 들킬까 두려워진 다정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저를 직시하는 저 날 것의 눈빛을 그대로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흐응….”

    거봐, 거봐. 역시 눈치챘어!

    다정은 어색하게 그를 피해, 병실 입구로 향했다. 화장실 문고리에 걸려있던 링거 줄을 조심스레 풀었다. 미묘한 공기가 어두운 병실 안에 가라앉는다.

    스스로도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에, 다정이 기어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렀다. 팟 하고 밝은 백열등이 켜지자 성후가 일순 눈을 찌푸린다.

    다정은 제 속에 저장되어 있던 간호사 미소를 꺼냈다.

    “즐거운 건 다 낫고 해요, 우리.”

    그러면서 잘근 입술을 씹었는데, 그 사소한 행동이 성후의 심장을 건드렸다.

    “다 낫는 건 무리고. 서울에 가서 합시다. 그거.”

    “그, 그거?”

    성후가 악마처럼 씩 웃는다.

    “네, 그거.”

    다정은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회피한 뒤, 맥주를 사 오겠다며 병실을 뛰쳐나갔다. 병원에서 맥주라. 핑계를 대도, 하필 맥주라니.

    성후가 피식 웃는다. 다정의 당혹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큭큭…”

    웃음이 멈추질 않고 새어 나왔다.

    *

    다음 날. 퇴원 절차는 간단했다. 듣기는 했지만, 역시나 국적이 한국이 아닌 환자의 치료비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그것을 카드 하나로 무심하게 결제하는 연석의 등을 바라보며, 다정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일시불이겠죠?”

    남 얘기하듯 소곤거리는 다정이 귀여워, 성후가 픽 웃는다.

    “섬도 있는 남자가, 치료비가 없을까.”

    “그… 그건 그렇지만.”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선 침묵이 흘렀다. 바로 어제의 예고가 다정의 귓가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운전을 맡은 연석도 알 수 없는 침묵이 무료해 라디오 볼륨을 크게 높였다.

    “오늘 은명 대학 병원으로 입원할 겁니다.”

    성후가 입술을 열자, 연석이 음악 볼륨을 재빨리 줄였다. 다정은 예상했던 내용이라 고개만 주억였다.

    “같이 갑시다.”

    “…!”

    다정이 움찔하고 엉덩이를 가장자리로 옮기자, 성후가 낮게 키들거리며 약속했다.

    “병원에선 안 하겠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주어 따위 없어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맥락이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힐끔, 연석의 눈치를 살폈다.

    연석은 듣고도 모른 척, 무심한 얼굴로 운전에 열중했다. 안도하려는 찰나 성후가 악마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나쁜 짓.”

    다정은 움찔하는 연석의 어깨를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때문에 성후를 날카롭게 노려보자, 성후가 기꺼운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그러나 다정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손 정도로 타협해야 할 텐데. 아니면…”

    덥석! 성후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 입 좀…!”

    “큭큭큭.”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성후의 장난은 계속되었다. 일일이 반응하던 것도 잠시. 내성이 생긴 듯 다정도 냉담해졌다가 또 가끔은 참지 못하고 톡 쏘아대는 것이 미치게 사랑스러웠다.

    “입원 수속 도와줘요.”

    그의 짓궂은 장난에 진이 빠졌던 다정은, 당연히 도와야 할 것을 거절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농담에 반해 그가 겪은 일은 묵직한 것이었다.

    “…가요.”

    입원 수속을 밟는데 다정을 발견한 수 간호사 정희가 그녀에게 말했다.

    “내일 출근이지?”

    “네.”

    정희가 곁에 있는 성후를 힐끔 보고는, 작게 속삭인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병원장실로 올라가 봐.”

    “네??”

    놀라 되물었다가, 성후가 걱정할 성싶어 이내 태연을 가장하는 다정이다.

    “아아. 일전에 무균 병동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가 봐요. 잠깐 올라갔다가 올게요.”

    “뭘 올라갑니까. 얼마나 고층인데. 또 일일이 걸어가려고요?”

    성후가 무섭게 정색했다.

    “…그거야, 거기 병원장실이 있으니까…?”

    “오늘은 엄연히 쉬는 날입니다. 볼일 급한 사람이 내려오라고 해요.”

    선약 따윈 없다는 것을 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정희는 미안한 듯 찡긋 눈인사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 그게….”

    “하.”

    성후는 짧게 한숨을 쉰 뒤 핸드폰을 들었다. 다정이 낚아채려고 하자 그가 다정의 이마를 꾹 막은 채 전화를 받았다.

    “납니다.”

    얼마 후 병원장이 로비로 내려왔다. 마성후가 마성후한 것이다.

    “아이고. 입원하신다고요?”

    인사를 생략하고서, 은밀히 속닥거렸다.

    “위로 올라오시지. 뭐하러 대기표를 뽑고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민망함은 다정의 몫으로 남았다.

    “오. 온 선생! 그래. 폐소공포증이 있다고?”

    다정이 성후를 힐끔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쯧쯧쯧. 그럼 같은 식구끼리 배려해 줘야지. 참. 일과 관련된 얘기는 기밀 사항이어서, 온 선생만 잠깐 빌리겠습니다.”

    엄연히 따지자면 성후의 소유물도 아닌데, 병원장은 자연스레 그의 허락을 구했다. 성후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온 선생님의 휴일을 뺏는 거니, 당사자의 허락을 구했으면 합니다만.”

    칼같이 지적하고 넘어가는 성후로 인해 다정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회는 어쨌든 피라미드 구조가 확실했고 탑 층 권력자에게 어느 정도 순응이 필요했다.

    “괜찮겠지? 온 선생.”

    성후를 몇 번 겪은 병원장은 인자하게 웃을 뿐이다.

    “네.”

    아무렴요.

    성후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병원장을 따랐다. 급한 대로 비어 있는 전공의 당직실로 향했다. 이 층이라 오기엔 수월했다. 병원장은 자연스레 의자에 착석했고 다정은 교무실에 불려 온 학생처럼 우두커니 섰다.

    “온 선생도 앉지.”

    구태여 맞은편 의자를 끌어다가 권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이번에 많이 힘들었지?”

    “모두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온 선생님의 의식 있는 인터뷰가 대한민국 국민을 깨웠어. 매몰찼던 시선도 제법 따뜻하게 바뀌었고.”

    서론의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다정은 조용히 고개만 주억였다.

    “병원으로 온다정 선생 찾는 이가 많다고 들었네.”

    “감사할 따름이죠.”

    “실은, 나한테도 들어오는 부탁이 많아.”

    “부탁… 이요?”

    괜히 가슴이 서늘해진다.

    “별 건 아니야. 복지부 팸플릿 제작 시 온 선생 사진을 담고 싶다거나…, 의료 봉사를 떠나는 의료진들에게 힘을 실어준다거나… 음, 가령, 사진 같은 걸 함께 찍는 거지. 또, 불우이웃 모금 행사 주최 측에서도 온 선생을 초청하고 싶다더군.”

    “저보고… 모델 같은 걸 하란 말씀인가요?”

    기가 막혔다.

    “페이가 상당히 좋을 걸세. 물론, 병원 근무 스케줄도 조정해 주겠네.”

    공짜로 병원 광고를 하겠다?

    “그럼 저도 바라는 게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순순히 물러서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다정의 승진까지 생각해두었던 병원장이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간호사들 열악한 근무 환경 개선을 부탁드립니다.”

    “열악? 어떤 점이.”

    “조직문화도 수직적이고 1인당 맡는 환자에 비해 급여도 상당히 적게 측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과 비교해보았을 때 환자는 4배쯤 더 보면서 급여는 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근무 시간도 살인적입니다. 급여 부분이야 대한민국 평균에 맞춘 거니 떼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정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보호자나 환자가 인권을 침해하는 모욕적인 발언을 했을 경우, 혹은 격앙된 감정으로 간호사 몸의 터치했을 경우엔 병원 측에서 보호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쌓인 건 더 많지만,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겼던 것들을 쭉 늘어놓았다. 이 중의 하나라도 개선이 된다면 그깟 모델 몇 번이고 해줄 수 있었다.

    “아니… 온 간호사.”

    “네, 병원장님.”

    병원장이 나른한 미소를 지우고서 미간을 긁적였다.

    “전생에 쌈닭이었어?”

    “네?”

    “하아…. 여태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 지금의 기회다, 하고 이렇게 들이대는 거, 듣기가 좀 그렇네. 꼭 칼자루를 자네가 쥐고 있는 거 같지 않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조심해. 그 칼이 자네 목을 칠지도 몰라.”

    병원장은 껄껄 웃었지만, 다정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었다. 기고만장한 젊은 간호사를 제대로 눌러 준 것 같아, 병원장의 기분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대폭, 까지는 몰라도 온 선생의 요구사항, 잘 알아들었어. 어디까지 개선될지는 온 선생 하는 거 봐서 생각해보겠네.”

    이판사판이다. 다정은 사회성 가면을 벗어 던지고서 말했다.

    “그럼 저도 생각해보겠습니다. 병원장님이 어디까지 해주시려는 지 상상해보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거라 생각했는데, 당돌하게 받아치는 다정의 태도에 병원장이 속으로 움찔한다.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 같진 않다.

    “후…. 좋아. 검토가 아니라, 확실히 약속하지. 할 수 있는 범위 내로 근무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말이야.”

    그가 졌다는 투로 말하자, 다정이 꾸벅 인사를 한 뒤 당직실을 나왔다.

    비상구 문을 열고 주저앉듯 계단에 허물어졌다. 열혈 투사처럼 굴었지만, 맥이 풀린 것이었다.

    병원 최고 권력자에게 맞서는 와중에 어쩌면 그의 말처럼 자신의 목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두려웠다.

    두려웠기에, 자존심 상했다.

    “씨이…. 온다정. 이런 일에 울지 마라?”

    다정은 혼잣말하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흐르려는 눈물을 손부채 질로 겨우겨우 식히며. 되도록 코도 덜 훌쩍거리며.

    그 아래 비상구에선 성후가 문에 기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다정의 혼잣말이나 뜨문뜨문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녀가 평온을 찾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작정이었다.

    당장 달려가 연유를 캐묻고, 불도저처럼 굴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제 품에 다정을 넣고서 조용히 토닥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님을, 성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몰래 울던 눈물을 듣고 있었단 사실을 그녀가 안다면, 모멸감에, 강인한 자존심마저 흠집날 것이 분명했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시간만 보내고 있는데, 일 층 비상구 문이 열렸다.

    부연이었다.

    성후는 급히 제 입술에 검지를 꾹 붙인 채, 위층을 손으로 가리켰다. 부연이 돌아가 주길 바라서였다.

    힐끔. 부연이 계단 위층을 잠시간 쳐다본다. 그곳에 다정이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무언의 종용을 거절한 채,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타박타박.

    묵묵히 계단을 밟고 가다 이 층에서 우뚝 멈춘다.

    “온다정.”

    * * *

    “격에 맞지 않아요.”

    “유리야.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선화가 한숨처럼 말했다. 하지만 유리는 엄마의 말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차분한 태도로 조곤조곤 말했다.

    “오빠 마음 돌려야 해요. 최근 오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좀 보시라고요.”

    끝으로 갈수록 말투가 공격적이었다. 마 회장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쌌다.

    “그 간호사라는 여자가 악재인 거 같아요.”

    “마유리!”

    선화가 소리쳤다. 하지만 유리는 개의치 않고 아버지에게 의견을 피력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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