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겨울 다음은 봄
잠들 수 없었다. 새벽이 걷히며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 때문이 아니다. 뒤척뒤척. 다정은 손을 뻗어 눈 부신 햇살을 막아봤다. 겨울 햇살인데도 뜨거웠다.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대문 밖에선 우석이 지키고 있을 터였다. 언뜻 평범한 인사처럼 보여도 ‘잘 가’라는 인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두 사람 모두가 잘 알았다.
가족 같은 친구를 잃을 각오로 했던 말이었다. 그럼에도 우석은 저를 혼자 두지 않았다. 차라리 서로를 버리는 결과였으면 좋았을 텐데.
우석은 흔들리지 않는 고목처럼 묵묵히 집 밖을 지키고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때 해는 처마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여전히 방안은 환했지만, 눈이 부시진 않았다.
몇 시지…?
핸드폰을 들어 시각을 확인하는데,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번호다. 지역 번호는 051. 부산이었다.
나른하게 붙었던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자, 부산 병원 스테이션의 간호사가 전화를 받았다. 다정이 사정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051로 시작하는 전화. 성후일까. 깨어난 걸까, 그가.
재빨리 전화를 받는 손끝마저 심장이 된 듯 뛰었다.
“여보세요.”
-나예요. 성후 엄마.
긴장이 한계를 초월하기 시작한다.
“네, 어머니…”
혹여 성후에게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무서운 상상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간다.
-성후, 깨어났어요.
“아. 다행…”
눈물이 주룩 나와, 말문이 막혔다. 하염없이 쏟아내고도 또 눈물이라는 게 나왔다.
-병원에 올 생각이죠?
“네. 지금 갈게요.”
-아니요. 오지 말아요.
“…네?”
-방금 가족들이 왔어요. 며칠 있다가 오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병원을 서울로 옮길 것 같으니, 그쪽에서 만나도 좋겠고요.
부정하려 해도 거부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럼 또 봐요.
전화를 끊고, 하루가 느리게 흘렀다. 조금 전 현관을 두들기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다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기봉이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느냐며 소리를 치길래 못 이기는 척 문을 열어주었다. 기봉의 손에는 그의 어머니가 보낸 삼계탕이 들려 있었다.
“무라. 뭐라도 입에 넣어야 정신이 깬다.”
주방 상판에 삼계탕을 뚝배기째 내려둔 뒤 해가 기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성후 씨…, 뭐 하고 있을까. 왜, 전화도 없을까. 사실은…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정말로 깨어났다면 제게 연락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늘 자신을 보러 왔던 쪽은 성후였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 입장이나 체면 따위 생각지 않고 달려왔었다. 온몸으로 사랑을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후 이외에 다른 것은 논외라는 걸 깨닫는다. 그 대상이 설령 그의 가족이라고 해도 말이다. 성후에게 배운 대로 사랑만을 실천하고자 마음먹는다.
문밖으로 나오자 마당 너머 철제 대문 앞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우석의 등이 보였다. 발이 꽁꽁 얼었는지 답지 않게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모습에 서글픈 미소가 지어졌다.
“주방에, 기봉이가 갖다 준 삼계탕 있어. 데워서 먹고 먼저 서울 가.”
“…너.”
우석이 예감한 듯 말을 아꼈다. 다정도 다른 말 없이 멀어져 갔다.
버스 터미널까지라도, 데려다주고 싶은 우석이었다. 하지만 다정이 한사코 거절할 것을 알기에 우석은 그대로 남아 꿈쩍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간단히 화장했다. 부은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불긋한 거 정도는 가릴 수 있을 테니까.
성후가 있는 곳과 가까워질수록 신기하게도 점점 차분해졌다.
병실 문을 열자 의료진들과 가족들 사이에 빙 둘러싸인 성후가 보였다. 반대로 모든 이들도 갑자기 나타난 다정을 주목했다.
다정은 선화를 비롯한 가르니크 일가로 보이는 이들에게 먼저 묵례했다. 선화 이외엔 가족인지 직원인지 분간되지 않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후를 바라보았다.
성후는 멀쩡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어릴 때 보았던 꼿꼿한 소년과 겹쳐 보였다. 울컥 복받쳐 올랐을 때, 성후가 양팔을 크게 벌리는 것이 보였다. 다정은 달려 기어이 그의 품에 안겼다.
“그거야.”
성후가 다정의 정수리에 턱을 올리며 말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성후는 다정을 안은 채로 가족과 의료진에게 눈짓했다. 노골적으로 나가보라는 눈짓이었다. 선화는 잠깐 놀랐지만, 금세 차분한 얼굴이 되었고, 유리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마 회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괜찮은 거예요…?”
다정이 성후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머리에 붙은 거즈를 보며 조금 더 꼼꼼하게 드레싱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도 생각하면서.
“기억 상실이라도 됐을까 봐요?”
“농담하지 말고요.”
“다정 씨가 괜찮으면 난 다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손을 까딱이는 성후다. 이번엔 안기지 않고 제 가슴에 성후를 품었다. 커다란 몸을 꼭 끌어안으며 먹먹한 심정을 달랜다. 절로 신에게 감사 기도가 흘러나왔다.
아까는 원망해서 미안해요.
지금은… 그저 감사합니다.
* * *
선화는 성후와 다정의 사이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결별을 바란 게 아니었다. 잠깐의 틈. 그거면 머리 아플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여겼다.
가령 유리의 질투나. 남편의 간섭 같은.
그나마 다행인 건, 현재 캐나다 공장에 가 있는 남편의 비행기 편이 취소되면서 그가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흘러가는 정황상, 아마 예정보다 조금 늦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 남자는요.”
성후를 해했던 사내를 가리키는 것이다.
“관할 청장님에게 잘 일러뒀어. 전과범에다 유사 사건 용의자에, 현행범이니 무사하진 못할 거다.”
“정신질환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건… 아니겠죠?”
성후가 빨간색이라면, 유리는 파란색. 늘 차분하고 이지적인 게 특징인 딸이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각별한 남매 사이임을 알기에, 선화가 유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버지가 그리되게 두지 않으실 거야.”
그제야 고개를 주억이는 딸이다.
“엄마는… 다시 대구로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응. 그래야지. 너는?”
“나도 전시가 잡혀서.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작업이 있어요. 오빠에겐 미안하지만…”
“아니다. 미안해할 것 없어. 성후도 무사하고, 우리도 각자의 삶이 있잖니. 자신의 자리는 잘 지켜야지.”
반은 진심이었지만, 반은 예쁘게 포장해 둘러대는 것이었다.
다정에게 연락하려던 성후를 말렸을 때, 정색하며 반항하던 성후의 눈이 선화의 속에서 되살아났다. 다정이 병실로 찾아왔을 때, 달라지던 표정과 매달리듯 다정을 꼭 안던 아들의 팔.
한창 뜨거운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바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는 성후와 다정의 몫이고 들러리가 된 가족은 떠나 줄 차례다.
“가는 길에 공항에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인사하고 올게요.”
“유리야.”
부드럽지만 엄한 선화의 목소리가 유리의 발을 붙잡았다.
“그냥 가자.”
무표정의 선화를 보며 유리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화가 한 번 더 설득했다.
“지금은 성후가 바라는 대로 하자. 그게 오빠를 위한 거야.”
“…알았어요.”
* * *
“복도가 조용하네요.”
“모두 가셨을 겁니다.”
“네??”
다시 찾아든 밤. 어두워진 병원 복도를 지나며 다정이 되물었다.
“아까 우리 저녁 먹을 때. 사정이 있어서 먼저 가게 되었다고 연락 왔었습니다.”
“…제가 괜히 와서…….”
“나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닙니까.”
“…걱정돼서 온 건 사실이에요.”
“걱정만?”
성후의 잘생긴 눈썹 하나가 비뚤어졌다.
“걱정이라고만 쳐줘요. 보고 싶은 내 그리움 풀이하려고 왔다고 하면… 나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그가 빙그레 웃는다.
“그게 내가 원하는 건데. 다정 씨가 좀 더 이기적 여지는 것.”
“…사랑 앞에서는 그래 볼까… 해요.”
“잘 생각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그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바람 쐬러 갈까요?”
“죄송하지만 마성후 환자님. 무리하시면 안 되고요. 환자복 차림에 링거 줄 달고 탈출은 허용되지 않습니다만.”
“…깐깐하긴.”
성후가 담당 간호사를 대하듯, 눈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그때 지나가던 간호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 쪽을 쳐다보았다. 움찔 놀란 다정이 작은 체구로 성후의 앞을 가리고서 하하 웃었다.
네, 그 피아니스트 마성후 맞습니다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저…”
앳돼 보이는 간호사가 결국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다정은 완벽한 미소로 선을 그었다.
“무슨 일이시죠?”
마치 성후의 경호원이라도 된 양. 성후는 그런 다정이 귀여워 작은 등 뒤에서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온다정… 선생님 되시죠?”
“네??”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팬이에요. 사인 하나 해주실 수 있을까요?”
두 볼을 발그레 붉히는 간호사 앞에 다정의 얼굴도 붉어졌다.
어린 간호사와 헤어진 뒤 다정이 성후의 팔짱을 잡고 끌었다.
“병실로 돌아가요.”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여친이 유명인이라 피곤하군요.”
무덤덤한 말투였지만, 놀리는 것이 분명했다.
“소리칠 거예요.”
다정의 으름장에 성후가 다정의 옆구리를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어떤 소리?”
능구렁이 같은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아, 다정이 눈썹을 앙칼지게 뜨고서 다시 협박했다.
“…더 유명한 남자가… 여기에 있다고…!”
성후가 다정의 허리를 꽉 쥐고서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해, 봐.
그리고서 낮게 키들거린다.
“…속도 좋다니까.”
“뭐가 말입니까.”
어느새 성후의 병실 앞에 다다랐다. 다정은 문고리를 잡아 열며 말했다.
“그렇게 험한 일을 당하고도 웃고…. 난…”
“아. 혹시, 죄책감 같은 거 느낍니까?”
병실 입구에서 우뚝 선 성후가 물었다. 다정에겐 낯선 병실이라, 벽을 더듬거리며 백열등 스위치를 찾았다.
“저 때문인 게 사실이잖아요.”
“다정 씨.”
다가온 성후가 다정의 등으로부터 끌어안았다. 다정이 흡하고 숨을 삼키자, 그가 그녀의 귓가에 조그맣게 고백했다.
“당신이 괜찮으면 난 괜찮다고 했잖아요. 다친 게 다정 씨가 아닌 나라서… 내가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지 모를 겁니다.”
다정이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캄캄한 병실 안. 어둠에 익은 눈이 서로의 이목구비를 읽어냈다.
“실은 한 가지 더 미안해요.”
머뭇거리던 다정이 결심한 듯 입술을 움직였다.
“…프라하.”
성후의 귀가 움찔한다. 그의 얼굴도 사뭇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가슴은 폭발할 것처럼 뛰기 시작한다. 그 소리가 머리마저 지배할 만큼 격렬하다.
“늦게 알아봐서… 미안해요.”
다정의 울대가 허락도 없이 떨렸다. 때문에 목소리도 희미하게 떨리며 나왔다.
“생각도, 상상도 못 했었는데…. 집요하게 떠올려 봤더니, 내 안에서 꽤 선명해졌어요. 열다섯의 마성후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까.”
성후가 다정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물었다. 제스처에 비해 목소리엔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과 다르지 않아요. 체구가 좀 더 작았을 뿐. 똑같아요.”
“그럴 리가.”
다정의 코가 닿는 근거리까지 다가온 성후가 작게 속삭였다.
“그때의 난, 키스 같은 거 해본 적도 없었는데.”
“그런 뜻이 아니…”
바쁘게 움직이는 다정의 입을 춥 소리와 함께 막았다. 짧은 입맞춤 이후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다시 속삭인다.
“이렇게 잘하지도.”
코가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를 기울인 성후가 다정의 입술을 단숨에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