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혹한기 (3)
멈칫한 다정이 물끄러미 선화를 쳐다보았다. 선화가 다정의 얼굴 속에 무언가를 찾듯, 유심히 뜯어본다. 때마침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경찰 조사를 끝낸 우석이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다.
“성후…”
우석은 말을 하다 말고 선화를 보며 꾸벅 인사했다.
“우리 아들 친구분이세요?”
“비슷합니다.”
“비슷하다라….”
선화는 차분하게 누워있는 성후에게로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분함을 가장한 것이었다. 그대로 등을 보인 채 성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아들은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 같았다. 수려한 이목구비에 편안한 얼굴. 금방이라도 눈을 떠, 뭘 여기까지 왔냐고 채근할 것만 같았다.
선화는 은밀히 입술을 깨물었다.
종종 말썽을 피우는 아들이긴 했지만, 주변에 원한 살 행동을 하거나 타인과 시비에 걸릴 만큼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않았다. 특권계층 자녀라 특유의 오만한 태도는 부모로서도 인정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신하건대, 이따금 씩 논란이 되는 여타 재벌가 자녀들과 성후는 달랐다.
그때 선화의 귀를 사로잡은 건 젖은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선화가 느리게 시선을 돌린다. 아무래도 저 어여쁜 아가씨와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다는 듯, 재차 사과하고 사라지는 다정이다. 그때 남자답게 생긴 훤칠한 청년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는 기우석이라고 합니다. 자초지종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선화가 침잠한 눈으로 우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봐요.”
* * *
병원 복도 끝, 짧은 벤치에 앉은 다정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통째로 복습했다.
같이 가자는 말만 들었더라면, 핸드폰만 챙겨 갔더라면, 도망갔더라면, 내가 칼에 찔렸더라면, 성후의 주먹질을 말렸더라면.
늦은 걸 알지만, 후회가 가슴을 쳤다.
“후우…”
눈물로 제 감정에 집중하는 것도 자격 없게만 느껴졌다. 마치 하늘이 성후와 저를 갈라놓으려는 것처럼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만 차례대로 늘어놓는 것만 같았다.
그때 조금은 어두운 반대편 복도에서 선화가 오는 것이 보였다.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성후를 저리 만든 죄인이 저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고라는 걸 알면서도 모든 원흉은 꼭 제게 있는 듯한 묵직한 죄책감이 다정의 목에 단단히 박혔다.
선화가 완전히 다가왔을 때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해주는 회색 코트와 검정 와이드 팬츠. 단발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긴 선화는 민낯임에도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넋을 놓고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 고아한 얼굴을 볼 낯이 없어 다정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예쁘게 자랐군요. 온다정 양.”
선화의 말에 다정이 두 눈을 깜빡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나 봐요.”
선화가 희미하게 웃는다. 주름진 눈가에 반가움과 슬픔이 번져있다.
“그게 무슨…”
“예전에 프라하에서 만났었는데. 기억, 안 나요?”
“프, 라… 하……”
다정이 체코의 어느 도시명을 느리게 곱씹는다. 얼마 전 성후가 했던 묘한 질문들이 겹쳐 떠올랐다. 하지만 두 모자가 왜 이러는지 단박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빛바랜 기억이어서 첫 해외여행으로 프라하에 갔었다는 사실 이외엔 모든 것이 흐리기만 했다.
“왜, 예전에 길 잃은 적 있었잖아요.”
선화의 말이 물수제비가 되어 다정의 기억 속 표면을 훑고 지나갔다.
“카를교!”
다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던 기억이 다정의 온몸을 지배한다. 조각난 장면 속에는 키가 아주 크고 말수 적은 미소년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때 만났던 친구가, 우리 성후라는 걸…, 여태 몰랐어요? 저는 그렇다고 해도, 그건 좀 섭섭하네.”
다정은 울컥 복받쳐 올라 입을 틀어막았다.
“저도 처음엔 긴가민가했어요. 낯이 익다, 익다 했는데… 분명한 기억은 없더라고요. 친구분에게 다정 양 이름을 듣는 순간 알게 됐어요. 얼마나 놀랐던지.”
어린 성후와 어린 다정이 노을을 안고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예뻤다. 선화는 저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얼마 후 인화를 했더랬다. 성후에게 넌지시 친구의 이름을 묻자, 시큰둥하게 ‘온다정’이라고 알려주었었다.
그 이름 석 자를 딱 한 장뿐인 사진 뒤편에 새겨 둔 사람도 선화였다.
‘이름이 특이하고 예쁘네. 온다정. 온다정.’
선화가 알게 된 성후의 첫 친구. 여러 번 되새김질했던 이름이었다.
분명 기억에선 흐려졌지만, 마음먹고 떠올려보면 그날의 감정은 여전히 생생했다.
성후가 처음으로 제게 엄마라고 불렀던 날이고 그날 이후 부쩍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작은 친구를 사귄 이후 성후가 마음을 달리 먹었다는 건, 바로 그 친구의 영향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고마웠던 소녀와의 우연한 조우라니.
아니, 이건 인연이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선화도 감격스러웠다.
“…몰랐어요.”
“성후도 몰랐을까요?”
근래 물음들을 떠올려 봤을 때, 아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본 것이다. 기억해낸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다정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훔쳤다. 격정의 감정이 그녀를 휘감는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주고 또 주는 깊은 사랑과 묵묵히 기다려 주는 넓은 아량 앞에 다정은 감읍했다.
선화가 다정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큰일을 겪어 상처받았을 다정이 걱정되어서였다.
아들이 다쳐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특별한 아이. 이럴 땐 먼저 산 어른으로서의 관록을 발휘할 차례다.
“놀랐겠어요. 다정 양은 괜찮아요?”
흐린 기억 속 버버리 코트의 여성. 어린 자신이 감탄하며 봤던 그분이 바로 이분이리라.
“…저는 괜찮아요. 저만 괜찮아서… 죄송할 따름이에요.”
선화가 갑자기 뜬구름 잡는 얘기를 꺼냈다.
“우리 성후 아주 잘 컸죠? 성격이 좀 괄괄하긴 하지만, 미남에다, 의리 있고.”
“네? 네….”
그때 그 새침해 보이던 도련님이 성후라는 사실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강하죠.”
모든 면에서 그렇다. 마성후라는 남자는. 다정이 고개를 주억이자 선화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성후는 괜찮을 거예요. 들어보니 치명상은 피했고 수술도 잘 되었다고 하니까요.”
“…네.”
“다정 양은 간호사라면서요?”
“네.”
“원래 아는 만큼 두려운 법이죠.”
내 사람한테는… 요.
얘기에 집중하느라 누군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연석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늘 정갈하고 뻣뻣했던 비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자세였다.
“아니다. 연석아.”
선화는 다정을 보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잡고서, 연석에게 물었다.
“…가해자는?”
한 톤 낮은 목소리로.
“기우석 씨가 자세하게 진술하고 왔다 들었습니다. 조현병 환자라고 하더라고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랍니다.”
조현병이라. 다정이 실습 간호사였던 시절 스쳤던 조현병 환자들이 떠올랐다. 밖에서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들었지만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들을 안타깝게 여겼던 어린 자신의 모습도.
갑자기 멍해진다. 직업의식도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정 양?”
선화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불렀다.
“네??”
“돌아가서 쉬어요.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선화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각국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곧 이곳으로 올 거예요. 여기서 이런 식으로 인사하는 건 별로잖아요. 다음에 제대로 인사해요. 네?”
다정의 입안이 무척 썼다. 비참하기도 했고, 스스로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다정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선화가 한 번 더 다정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 회장이나 ‘오빠 바라기’ 유리는 자신과 달랐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결코 아니다. 다정이 상처받을 것이 분명해,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연석이 말했다.
“아뇨. 우석이랑 갈게요.”
다정은 선화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
밀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펑펑 울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돌아갈 순 없었다. 거긴 부산 병원과 너무 멀었다. 그 말은 성후와도 멀어진다는 말이 되니까.
둘이 와서 혼자 돌아간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흐읍….”
다정은 다정대로. 우석은 우석대로 미칠 것만 같았다. 펑펑 우는 게 당연한 상황이라, 차마 울지 말라는 말도 할 수 없어 다정의 눈물을 바라만 봐야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기봉이 파란 트럭을 끌고 마중 나와 있었다. 진탕 운 탓에 엉망이 된 다정의 얼굴을 보며 기봉도 침묵을 지켰다.
다정의 할머니 집에 차가 멈추고, 그녀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녀린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우리도 마, 가자.”
기봉이 말했다.
“먼저 가. 나 다정이랑 할 얘기 있어.”
“얘기? 그라모 물 데파(데워) 놓을까?”
“아니. 나 너희 집에 안 갈 거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다정을 따라 들어가는 우석이다. 이 집만큼 오래된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다정이 눈에 들어왔다.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우석을 보고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눈동자가 텅 비었다.
“같이 있어.”
그제야 시선을 들어 우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같이?”
그러나 눈빛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 같이.”
“그건 안 돼.”
작은 목소리지만, 단호했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야. 다치지만 않았을 뿐, 너도 험한 일 겪었어. 몇 시간 되지도 않았고. 그냥 네가 자는 방문 앞에 있을게.”
“안 된다고, 우석아.”
이번엔 다정이 애원 조로 말했다.
“강한 척하지 마. 너도 여자야.”
“알아. 난 여자고. 넌 남자지.”
“뭐?”
“너도 나한테 이제, 남자라고.”
우석이 놀라 다정을 쳐다보는데, 다정이 한 번 더 뜻을 풀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도, 남자는 남자란 걸 알겠어. 그럼 선을 잘 지켜야지.”
우석의 심장이 돌처럼 굳었다. 오랫동안 가슴앓이하며 지켜왔던 친구 자리마저 잃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온다정 이 바보야…”
얼마 뒤 우석이 얼굴을 찌푸린다. 그의 생각이 조금 더 멀리 나갔기 때문이었다.
다정이 자신을 밀어내서 아픈 거 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다정 때문에 더 아팠다. 여기서 다정이 생각하는 타인은, 자신과 성후였다.
제게는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서.
또 성후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우석이 꾹 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이럴 땐 그냥 너 좋다는 놈 이용하면 되는 거야. 혼자 견디기 힘든 새벽이잖아. 또, 무섭잖아. 너 지금…”
뚜벅뚜벅 다가와 다정의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떨고 있잖아!”
아무리 태연하게 굴어도, 의지와 다르게 떨리는 몸까지 제어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성후가 병상에 누워있는데. 그게 다 자신 때문인데. 저만 편히 잠들고. 저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정은 손목을 비틀어 풀었다. 세게 잡혀있던 손목이라 금세 붉게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아픈 줄 몰랐다. 저로 인해 아픈 두 남자 때문에.
다정이 걸음을 뗐다.
“기우석.”
낡은 소리를 내는 현관문을 열고서 말했다.
“잘 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절연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