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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56화 (56/82)

56화. 혹한기 (2)

“왜 이렇게 안 와.”

다정을 기다리다 초조해진 성후가 집 앞으로 나왔다.

시골의 밤은 아름다웠다. 흩뿌려진 별들이 유난히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지독하리만큼 어둡게 깔린 밤 덕분이리라.

하지만 성후는 시골의 아름다운 밤 따위 달갑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 다정이 아는 길도 헤매는 건 아닌지 걱정만 앞설 뿐이었다.

“하아…”

길을 모르니 섣불리 찾으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씩 걱정이 커져만 가는데 때마침 인기척이 들렸다.

미어캣처럼 재빨리 시선을 돌리자 낮은 벽 위로 머리 하나가 보였다. 칼바람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정갈한 헤어와 무심한 얼굴. 연석이었다.

성후가 인상을 찌푸리고서 물었다.

“왜 혼자야?”

“음? 온 선생님 아직 안 오셨어요?”

“이 새끼가…. 대체 정신을 어디에다가 둔 거야.”

때마침 밖으로 나온 기봉이 말했다.

“하이고. 걱정 마이소. 야들은 이 동네 눈 감고도 다닙니데이.”

“그래도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여는 다 아는 사람들만 살아서 무서울 것도 없습니더.”

“원래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뒤따라 나온 우석이 말했다. 그의 말이 모처럼 마음에 든 성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에헤이. 그라지 마라. 괜히 성후 씨 불안해지신다아이가.”

그 순간 몇 마리의 이름 모를 새들이 푸드덕하고 하늘을 날았다.

성후와 우석이 동시에 불안한 눈빛을 교환한다. 각자의 시계를 확인하고서 재빨리 집을 뛰쳐나갔다.

“온다정…!”

“다정 씨…!”

패딩 안에 땀이 꽉 차도록 뛰어다니던 두 남자가 갈림길 앞에 섰다. 우석이 먼저 제안했다.

“이쪽으로 가보세요.”

그의 손이 한쪽을 가리 켜고 있었다. 성후는 고개를 주억이며 강조한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소리치는 겁니다.”

“물론이죠.”

두 남자가 뿔뿔이 흩어져 본격적으로 다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 * *

남자는 아까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서 천천히 다정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급하게 뛰어오는 것도 아닌데, 다정의 발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다. 본능적으로 주변을 탐색한다. 우거진 나무들이 바람 앞에 춤추는 소리 외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여기는 시골이었다.

시골의 해는 빨리 떨어졌고 마을 주민의 대부분인 어르신들은 지금쯤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시각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남자도, 말소리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분명 텅 빈 눈동자를 지닌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남자의 두 눈은 유난히 반짝였다. 그 광기 어린 눈빛을 보자 다정은 사자 앞의 토끼처럼 완전히 얼어버렸다.

“마음에 안 들어.”

죽었구나. 따져 볼 겨를도 없이 판단이 먼저 들었다. 아, 난 여기서 죽는구나. 저자는 살인마다. 다정도 스스로가 기이했다. 묘하게 순응하고 있는 자신이 말이다. 공포 앞에 모든 것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남자가 완전히 다가왔다. 살려달라는 그 흔한 애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의미한 애원이 되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탓이다.

남자의 손이 날렵하게 공중을 가른다. 기어이 올라간 칼이 아래로 휘둘리는 순간,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성후 씨...!

푸욱-!

그런데 아프지가 않다…?

다정이 눈을 떴을 때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짐승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체취에 놀라 고개를 올리자 성후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괜찮습니까.”

“…성…”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다리가 풀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성후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거의 패닉 상태여서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다가왔다.

“으읏…! 읏…!”

칼에 찔린 성후보다 당황한 암행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풀썩, 제 다리에 꼬여 넘어지고야 만다. 성후는 등에 칼이 꽂힌 채로 달려들어 남자의 몸 위를 점령했다.

다음으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꼭 말아쥔 돌 같은 주먹으로 연신 남자의 얼굴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과 피 터지는 소리가 폭죽처럼 이어졌다.

다정은 우선 신고해야 한다 생각했다. 생각은 분명 했다. 그러나 후들거리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아… 으으…”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떨다 겨우겨우 입술을 뗐다.

“그… 만…. 어서 신고를….”

곤죽이 되도록 패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정은 젖은 눈가부터 팔등으로 훔친 뒤 기어가듯 성후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남자에게 주먹을 퍼붓는 데 열중했다. 말려야 해. 저러다 사람 죽겠어…!

죽어 마땅한 범죄자라고 해도, 성후가 응징하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성후 씨…”

목소리가 작다. 다시 한 번 크게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남자가 손에 잡힌 돌로 성후의 머리를 거세게 찍었다. 퍽 하는 소리가 하늘을 공명하게 채웠다.

“꺄악…!!”

다정의 목소리도 터졌다.

“이런 개자식…”

성후도 시야가 흐려지는지, 비틀거리며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그 순간 남자가 성후에게로 돌진했고 성후도 자리에서 쓰러졌다. 남자가 성후의 위로 올라타려는 순간 날렵한 발이 남자의 목덜미를 강타했다.

“…우석아!”

“미안하다. 늦었지?”

우석은 남자의 목덜미를 그대로 잡아끌었다. 다시 남자를 패주려는 순간, 우석이 움찔한다.

“뭐야 이 자식. 벌써…”

얼굴이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은 더는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신고 좀 해줘…!”

다정이 소리치며 성후에게 달려갔다.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성후 씨!”

다리에 성후를 받치고 돌에 맞은 부위를 지혈했다.

“어떡해, 출혈이 너무 심해!”

큰 돌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관자놀이를 가격한 바람에 그가 의식을 잃었다.

“어떡해! 우석아!!”

남자를 배 깔고 눕게 만든 다음,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를 밟고 있던 우석이 외쳤다.

“알았어…!”

쓸데없이 많은 점퍼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연석이 나타났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119는 늦어요! 이쪽으로!”

연석의 차에 다정이 탔다. 그리고 연석이 성후를 옮겨 태웠다. 우석은 남자를 처리한 다음, 전화를 주겠다고 말했다. 문제의 남자에 관한 건 다정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눈앞에 피 흘리며 쓰러진 연인 외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죄책감이 다정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칼은…”

연석이 성후의 등에 꽂힌 칼 손잡이에 손을 대자, 소스라치게 놀란 다정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빼지 마요!”

섣불리 뽑아냈을 경우 상처를 막고 있는 장애물이 사라져 출혈이 더욱 심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도 그대로 두는 편이 맞았다.

“비상등 켜고 가주세요. 밀양은 안 돼요. 급한 처치는 내가 할 테니까, 연석 씨는 부산 병원으로 가 주세요. 어서요!”

다행히 피는 금세 멎었다. 다정이 자신의 목도리로 강하게 압박해 지혈한 덕분이었다. 응급처치하기엔 좁다란 뒷좌석이었지만 다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우선 성후를 제 다리 위에 올리고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혹시 구토가 인다면, 기도를 막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피가 멎었더래도, 이미 피를 많이 흘린 터라 쇼크가 오지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다정은 간호사였고, 작은 가능성의 기적이나 불행을 숱하게 보았었다. 그러니 기적도 불행도 확률은 반반이다.

부산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도 멀게만 느껴졌다.

*

병원으로 도착했고 좌상을 입은 등은 응급 수술이 이루어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국 국적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검사를 하려면 조영제 부작용 등의 이유로 직계가족 동의가 필요했다. 물론, 가르니크 정도의 힘이라면 편법으로 검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성후가 의식이 있거나, 성후의 가족들에게 현재 상황을 알릴 때 가능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보고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연석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끝내 통화 버튼을 눌렸다. 연석의 시선이 의식 없는 성후가 누워있는 병동 문에 가닿았다.

-응. 연석이구나.

받는 이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벨소리에 깼음이 분명했다.

“사모님.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말해 봐.

선화의 목소리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연석은 자초지종을 쭉 설명했다. 선화가 함께 있는 반려견이 짖지 않았더라면, 통화가 끊겼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지금 그리로 갈게.

마친 선화는 대구에 있었다. 일 때문이었지만, 운이 좋았다. 중국에서 오는 것보다 훨씬 빨리 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조심해서 오십시오.”

연석이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성후는 반듯하게도 누워있었다. 다정은 그런 그의 손을 꼭 쥐고 눈물을 흘렸다.

“온 선생님….”

“나 때문이에요.”

자책이 깊었다. 연석은 따뜻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또 위로라는 건, 관계의 친밀성이 있어야 가능한 영역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석은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 뒤, 잠시간 자리를 비워주었다.

* * *

최근 잇따라 겹치는 아들의 악재에, 부산으로 향하는 선화의 마음이 타들어 갔다.

선화는 무교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왜 신을 찾는지 이해됐다. 아니면 흔히들 말하는 굿이라는 것을 해야 하나 하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마음이 점점 약해져 갔다.

선화도 결국 부모였고 자식 일엔 별도리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 연석이 알려줬던 층으로 급히 올라왔다. 늘 반듯하게 서 있던 연석이 벤치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또각또각 다가가는 구두 소리에 연석이 고개를 들었다.

“사모님….”

“성후는.”

“…아직.”

“의료진 좀 불러줘. 사람이 먼저지, 동의서가 먼저야?”

선화는 평소와 달리 날카로웠다. 연석이 만류했다.

“공복이어야 한다고도 해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선화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연석에게 너는 월급 받고 뭐 하는 사람이냐고 탓하고도 싶었다. 부산으로 오는 차 안에서 연석 탓을 아예 안 했던 건 아니다.

허나, 선화가 아는 성후는 사람의 바운더리 안에 얌전히 있는 아들이 아니었다. 사고란, 부모가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은 세 살배기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선화는 알았다. 연석을 나무라는 건, 분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았어.”

선화는 병실로 발길을 돌렸다. 두려웠지만, 아들의 상태를 두 눈으로 보는 게 먼저였다. 문고리를 잡아당길 때부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병실 입구에 부착된 이름표를 확인했다.

‘마 * 후’

아들이 맞았다.

다시 문을 열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젊은 여자의 등이 보였다.

다정도 인기척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녕하세요.”

선화가 온다는 소식을, 연석에게 미리 들었던 터였다.

“…그럼.”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걸 직감한 다정이 묵례했다. 눈물로 얼룩진 데다가, 고개까지 숙인 다정의 얼굴이 선화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정이 선화를 스쳐 지나가면서, 선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잠깐…!”

선화가 다정을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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