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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55화 (55/82)
  • 55화. 혹한기 (1)

    찰나의 성후 얼굴을 보았던지라, 다정은 조용히 안겨 있었다. 저를 안고 있는 큰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잠시 이대로, 그가 얘기해줄 때까지 기다려보고자 한다.

    아직 그 정도의 시간은 충분하니까.

    “성후 씨….”

    다정에게 잠시 멀어진 성후의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다정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그때였다.

    “거 누군교!”

    집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공기가 와장창 깨지는 것만 같았다. 다음, 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피아니스트 마성후의…”

    “아 좀. 당신은 머꼬. 비키 보소!”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저는 피아니스트 마성…”

    “아 쫌!! 비키보라꼬요! 내 진짜, 확 마! 힘을 함 써뿔까? 엉?!!”

    성난 황소처럼 날뛰는 기봉과 그를 버겁게 상대하는 연석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성후는 계속 넋이 나간 채여서, 다정이 그를 두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야! 누가 보면 네 집인 줄 알겠다!”

    다정이 환히 웃으며 질타했다. 이틀 전 서울에서 보았던 기봉도 환히 웃었다. 꼭 오랜만에 만나는 것만 같았다.

    “와아씨. 다정이 아이가! 은제 내려왔노…!”

    “휴무라 내려왔어. 와보고 싶어서.”

    무균 병동에서 만났던 할머니 한 분이 다정의 머릿속에 각인된 채 한동안 둥둥 떠다니셨다. 그분은 무탈하게 퇴원하셨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조모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는 계기를 주셨다.

    그때 다정의 뒤로 커다란 인기척이 느껴졌다. 성후였다. 성후는 현관 옆 문틀에 손을 받힌 채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래된 촌집이라, 현관보다 그의 키가 더 컸던 탓이다.

    “안녕하십니까.”

    “어? 전에…!”

    기봉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응. 내 남자친구야.”

    다정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 어서 오이소, 난 또 누라고…. 빈 지 윽수로 오래된 집인데 웬 사람 인기척인가 했습니더. 반갑습니더. 저는 다정이 친구, 정기봉입니더.”

    기봉이 악수를 청했다. 손톱엔 농사의 흔적으로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성후가 기봉의 손을 꽉 쥐자 기봉이 감탄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히야…. 무신 남자 손이 이리 곱노.”

    “하하.”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굽니꺼.”

    연석을 흘끔 보는 기봉의 눈이 곱지만은 않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아는 동생입니다.”

    성후가 연석의 말을 잘랐다. 현재 피아니스트로서 뚜렷한 활동이 없는 자신의 비서라고 소개하자니, 어쩐지 민망하다. 더욱이 기봉은 자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해 괜한 위화감을 조성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주변을 보지 않았던 성후가 다정으로 인해 많이 변한 것이다.

    “아는 동생. …큭.”

    연석이 비릿하게 웃자, 성후가 육성으로 터질 뻔한 욕을 삼켰다. 이 새끼가.

    그의 마음을 읽은 연석이 천진하게 입술을 열었다.

    “성후 형.”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는 동생분은… 뭐 하는 분인데 이 먼 거리까지 따라왔습니꺼.”

    기봉이 연석을 눈치 없는 사람 취급하며 흘긋댄다. 젊은 사람이 일거리도 없이. 근데 와 양복 입고 있지? 보디가드도 아이고. 아이지. 보디가드가 이래 희멀건 멸치 같을 리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내가 같이 오자고 했어. 마침 휴일이 겹쳐서.”

    다정이 눈치껏 말하자, 금세 수긍한 듯 기봉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라모 어차피 단둘도 아닌데, 나도 끼도 되겠나.”

    다정이 흰자위로 성후의 눈치를 살핀 뒤 대답했다.

    “무, 물론이지!”

    이런. 말을 더듬고야 말았다.

    “큭큭.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네 얼굴 언제 이래 보겠노. 남친은 서울서 니 마이 볼 테니까.”

    “그래그래.”

    “막걸리 한잔하자. 내 금방 챙기 올게. 느그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아이가.”

    큰 덩치와 달리 기봉은 아이처럼 신나 보였다. 몇 걸음 가뿐하게 걷다, 기봉이 다시 몸을 획 돌렸다.

    “아 맞다. 마침 우석이도 내려왔거든. 같이 한잔 때리자! 씻고 있으레이! 느그 집 기름은 좀 있드라!”

    빈집을 관리해주던 것이 기봉이어서, 그는 이 집에 관한 건 훤히 꿰뚫고 있었다.

    “으응…!”

    기봉이 떠난 자리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정을 얼추 아는 연석은 차 안으로 도망친 뒤였고 어색한 가운데 성후와 다정은 돌아가며 샤워를 마쳤다.

    *

    상상해보지 못했던 멤버와의 술자리. 제사상이라 불리는 커다란 상을 중간에 두고 다정, 성후, 연석, 기봉, 우석이 빙 둘러앉아 있다.

    다정은 하필, 성후와 우석의 사이에 낀 상태였다. 지은 죄도 없이 어깨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서 제일 말 많은 자는 기봉이었다. 승주가 빠지긴 했지만, 친구들끼리 모인 건 오랜만이어서 기분이 몹시 들떴던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다정이 진짜 예뻐졌다. 맞제, 우석아? 여 살 때만 해도 완전 머쓰마였다아이가. 나는 야가 여자 화장실에 가는 거조차 이상했데이.”

    “너무해!”

    다정도 밝게 맞장구쳤다. 노력이었지만, 자연스러웠다.

    “너무하기는 뭐시 너무해. 나중에 니가 시집은 가겠나, 싶었다니까. 그래도 이래 윽수로 잘생긴 남친 만나가 연애한다카이 내 마음이 다 좋다.”

    “너나 장가가.”

    다정의 말에 기봉이 픽 웃는다.

    “촌에 틀어박혀 농사나 짓는 촌놈한테 어느 딸아가 오겠노.”

    “다 인연은 있어.”

    다정의 말에 괜히 우석이 움찔한다. 우석은 며칠간 갈증에 시달렸던 사람처럼 막걸리를 들이켰다. 그때 성후의 손이 다정의 등으로 닿았다. 이내 천천히 올라와 다정의 어깨를 감싼다. 자신의 것임을 모두에게 상기시키듯 말이다. 덕분에 다정의 어깨도 볼도 미세하게 뜨거워졌다.

    돌아가는 분위기와 성후의 그러한 태도를 보며 연석은 픽 웃었다. 경계하는 성후의 태도가 유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성후 역시 연석의 마음을 읽은 터라 무서운 눈으로 연석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 살기가 어린 건, 연석만의 착각일까.

    “콜록콜록.”

    누가 봐도 인위적인 기침을 연발하는 연석이다. 한사코 거절한 막걸리 대신, 물잔을 들어,

    “밀양은 물도 참 달군요. 형님.”

    기봉의 막걸릿잔에 부딪히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동상은 서울 깍쟁이같이 생기가, 은근 싹싹하네. 내랑도 친하게 지냅시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아따, 그러는 동상이야말로 편하게 말하이소.”

    “그럴까.”

    다시 성후의 무서운 눈초리가 닿는다.

    “…요.”

    “에이, 시시하구로. 나도 그라모 존댓말 할랍니다. 으미, 머쓰마들끼리 낯간지럽네. 근데 우석이 니는 무슨 묵언 수행 중이가.”

    “딱히 할 말이.”

    “쟈는 어려서부터 저라드만, 나이 묵을수록 더하네. 재미없구로. 저러다 나중에 말하는 것도 까묵는 거 아인가 모르겠다.”

    그러면서 기봉이 껄껄 웃는다. 정확히 기봉만 껄껄 웃는다.

    “아이고. 술이 똑 떨어지뿟네. 내 금방 갔다 올게. 아직 슈퍼 문 열려있을 끼다.”

    “아니!”

    다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다녀올게!”

    “응? 무거울 낀데.”

    “나 몰라? 나 완전 힘세잖아!”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어려선 또래 아이들을 평정했던 다정이었다. 한마디로 골목 대장.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기봉이 어렵지 않게 납득한 눈치다.

    “그리고 슈퍼 할머니도 뵙고 싶어.”

    “윽수로 정정하시다. 다녀온나.”

    그때였다.

    “같이 갑ㅅ…!”

    “내가 같이 가…!”

    성후와 우석의 말이 겹쳤다. 다정이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 피식 웃는다.

    “지금은 왠지, 혼자이고 싶으네?”

    부드럽고도 센스있는 질타였다.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의미심장한 말이겠지만, 성후와 우석은 불편했을 다정의 마음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갔다 올게요.”

    다정이 성후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성후는 연석에게 눈짓했다. 따라가 보라고. 연석은 기봉의 수다를 듣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하지만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남자 셋만 남은 어색한 상황. 기봉조차 조용한 성격이었다면 납처럼 무거운 공기에 모두가 압살당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여기 모인 남자들의 공통분모가 다정이어서, 기봉은 계속해서 다정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만히 듣던 성후도 되물었다.

    “그런 다정 씨를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까?”

    성후의 물음에 잠시 멍해졌던 기봉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손사래 까치 치며 대꾸했다.

    “어데요~! 암만 예쁘고 잘났다 한들, 가족을 좋아하는 사람 봤습니꺼?”

    기봉의 무심한 반문이 우석의 심장을 관통했다.

    “나쁠 것도 없잖아. 진짜 가족도 아닌데.”

    그러자 기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건 아이지. 그러다 둘이 깨지기라도 해 봐라. 그라모 우리 다 같이 얼굴 보겠나. 우리들 관계도 다 깨지는 거 아이가. 나는 늙어서도 느그들이랑 요래 뭉치고 싶다.”

    “결혼하면.”

    “오, 그건 또 다른 얘기네.”

    “결혼은 끝이 아닙니다. 시작에 불과하지. 이혼이라는 선택지도 있으니까요.”

    성후의 말에 기봉이 다시 수긍으로 고개를 주억인다.

    “오, 맞네. 그것도 그렇네요. 요새 이혼율도 엄청 높다 카드만.”

    “애를 낳으면 또 다르지. 동지애도 생길 테고, 서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다 보면 자연히 끈끈한 부부 사이가 될 거야.”

    “알라들 낳으면 그렇긴 하겠다야.”

    그러자 성후가 피식 웃으며 막걸릿잔을 매만졌다.

    “왜 웃으시죠?”

    우석의 서늘한 눈이 성후에게 닿았다.

    “그쪽 의견은 그러니까… 애 보고 산다? 사랑이 아니라 동지애로?”

    “뜨거운 사랑은 잠깐이죠. 결국, 가정을 지키는 건, 기복 없는 관계로부터 시작될 테니까요. 왜 ‘친구 같은 부부’가 좋다잖아요. 못 들어 보셨어요?”

    “아.”

    성후가 미간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건 그냥 정만 남은 부부들의 말하기 좋은 핑계 아닌가. 남의 귀한 집 딸을 데려와 고작, 친구처럼 대해주는 남편이라니. 과연 그것이 아내를 위한 최선일지 모르겠군요. 그럴 거면 애초에 결혼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하지 않았나, 하는 뭐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석이 성후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성후는 개의치 않고 강조하는 투로 한마디 더 붙였다.

    “하던 대로, 친구로 지내면 되니까 말입니다.”

    * * *

    “그럼 수고하세요!”

    “오야, 다정이도 가레이!! 우리 밀양의 스타! 온다정 간호사 최고데이!!”

    얼마 전, 에번 바이러스로 인해서 했던 인터뷰를 슈퍼 할머니가 본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금의환향한 손녀를 대하듯, 다정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막걸리 다섯 통은 확실히 무겁긴 했다. 다정은 봉지째로 끌어안고 친조모 집으로 향했다. 서울보다 춥지는 않지만, 시골의 겨울도 겨울이었다. 기온은 조금 더 높아도 맑은 공기 탓인지 오히려 더 춥게 느껴지기도 했다.

    “왜 이렇게 으슥해…”

    등 뒤로 섬뜩한 시선이 매달린 것처럼 괜히 오싹해졌다. 목덜미로 한기가 파고 돌자 다정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휭- 휭-.

    바람 소리가 꼭 한 맺힌 귀신의 울음소리 같았다.

    구불구불한 촌길 옆으로 정리되지 않은 수풀도 날바람을 맞아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익숙한 고향의 적막이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각종 소음으로 꽉 찬 도시 생활에 젖은 탓일 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낡은 기억 속 아는 얼굴을 기대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다정은 새하얗게 질렸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흐린 달빛 앞에서도 반짝이는 칼날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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