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54화 (54/82)
  • 54화. 소년과 소녀의 재회

    “…어떻게 아셨어요?”

    성후의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쿵쿵. 너무 크게 울려, 호텔 방 안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잠깐 가늠해보았다. 혹시나, 혹시나, 했지만 정말 그녀가 프라하에서 만났던 소녀라는 걸 확신하기 어려웠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기억 속 소녀와 다정이 닮은 거 같기도 하다. 순간 앳된 소녀의 얼굴이 다정의 얼굴과 스르르 겹쳐 보였다.

    성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보다 키가 한 뼘 더 크고,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지만, 종종 보여 주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시원시원한 말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맥이 풀렸다.

    성후가 침대로 털썩 주저앉자, 다정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제 몸을 가리고 있던 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 줄도 모르고 무방비하게도 다가온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요?”

    핑글 도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그때… 몇 살이었습니까. 프라하에 갔을 때.”

    “열넷요.”

    그때 그 소녀도 자신을 열넷이라 소개했던 거 같다.

    “정확합니까?”

    다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과 갔던 해외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요. 막 서울에 이사 왔던 때라… 아, 저 고향이 시골이거든요. 어쨌든 그래서 기억이 선명해요.”

    “여행은… 즐거웠고요?”

    쿵쾅쿵쾅 뛰는 이 심장 소리가 정녕 그녀에겐 들리지 않는 것일까.

    “즐겁긴요. 정신 팔려 길을 잃는 바람에…”

    다정이 눈썹을 찌그린다.

    “그때… 누군가 만났던 거 같은데. 그게…”

    예쁜 미간을 심각하게 모으며 생각에 빠졌다. 성후의 심장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폭주한다. 이러다 폭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정도로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먼저 나를… 기억해줄까.

    “그때…”

    꿀꺽….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두 사람 사이를 핸드폰 벨이 갈랐다. 다정은 작은 경기를 일으켰다가 핸드폰 발신인을 확인했다. 성후에게 전화를 받겠다는 수신호를 해 보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우리 딸~.

    어제의 울음기가 거세된 엄마의 목소리는… 비염을 심하게 앓는 사람처럼 콧소리가 났다.

    “…으응.”

    다정은 전화를 받으며 머뭇머뭇 이불로 몸을 가렸다.

    -어디야~?

    “…밖?”

    -친구 집~?

    “맞아. 친구 집.”

    -오호…

    “아하하…”

    -누군 연애 안 해본 줄 아니?

    뜨끔. 다정이 성후의 눈치를 살핀다. 혹시나 험한 말이 새어나갈 성싶어 급하게 통화 볼륨을 낮추며 눈꼬리를 휜다.

    -엔간히 하고 들어와라?

    엄마의 목소리가 단박에 냉랭해졌다.

    “…네.”

    -집에서 기다린다.

    “…!”

    -끊는다.

    “예썰…!”

    성후가 침잠한 눈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 다정은 그의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짐작할 여유가 없었다.

    부모보다 남자를 택했던 지난 밤.

    그로 인해 자신에게 쏟아질 엄마의 잔소리가 버젓이 예상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다정은, 이미 벅찬 상태였다.

    “가봐야겠어요.”

    “데려다주겠습니다.”

    다정이 생각하는 엄마는 좀 셌다. 아니, 좀 많이 셌다. 수틀렸다 생각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퍼부을지도 모른다. 거기엔 이 멘트가 꼭 들어가겠지. ‘시집도 안 간 남의 집 귀한 딸을…’.

    으으.

    다정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맞아야 할 화살이라면 성후도 함께 맞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를 방패 삼고 싶지도 않다.

    “전화할게요.”

    나갈 준비를 정신없이 하고 나니, 호텔 방에 홀로 남겨질 그가 눈에 밟혔다. 다정은 멍하니 앉아 있는 성후에게 다가와, 그의 양어깨를 꾹 쥐었다. 그리고 깊은 눈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외로워 말아요.”

    성후의 이마에 쪽. 짧은 입맞춤을 맞춘다. 성후가 시선만 들어 다정을 깊게 바라보았다. 다정이 다시 한번 더 애정을 표했다.

    “내가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이 그런 것처럼.

    *

    일 층에서부터 발끝은 세워져 있었다. 운이 좋으면 부모님이 안 계실지도 모른다. 운이 조금 좋으면 부모님이 화기애애 나누는 수다를 귀동냥으로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덜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귀를 갖다 댄 집안은 침묵.

    가셨거나, 호랑이 모드로 계시거나.

    반반 확률의 도박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도어락을 열었다. 당당함을 가장하기 위해 시원하게도 젖혔다. 들어가자, 바로 맞은편 바닥에 앉아 있는 명정과 경환의 묵직한 시선이 다정에게로 닿았다.

    헉!

    “아하하… 굿모닝.”

    “네 친구 집에는 욕실도 없다니?”

    엄마의 말에 다정은 머리칼을 대충 슥슥 정리하고 씨익 웃어 보였다. 보기 싫다는 투로 외면하는 엄마완 달리, 다가온 아빠는 묵묵히 다정을 안아주었다.

    “이렇게 따뜻한 너를 다시 못 안아 볼까 봐, 얼마나 떨었던지. 고마워, 우리 딸.”

    아빠의 울대가 희미하게 떨렸다. 다정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옆에서 투덜거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만 나쁜 애미지, 나만 나쁜 애미야, 라는 말이.

    역시. 무드 깨는 덴 엄마가 최고다.

    다정은 아빠에게 안긴 채, 엄마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툴툴거리는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음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명정도 울컥하는지 코를 훌쩍였다.

    “갑시다. 꼴 보기 싫으니.”

    “어허.”

    경환이 명정을 돌아보며 눈치 줬고, 명정이 한마디 더 붙였다.

    “시동 좀 켜놓아요. 차 안이 얼었겠어요.”

    침묵하는 경환의 마음을 읽은 명정이 강조했다.

    “다정이 안 잡아먹어요.”

    명정의 재촉에 결국 경환이 먼저 오피스텔을 나섰다. 뚜벅뚜벅 명정이 다가오자, 다정은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때, 명정이 다정을 와락 안았다. 저만큼이 날씬한 엄마의 뼈마디가 느껴질 정도로 깊게.

    “어, 엄마…”

    “괜히 아빠 얼굴 보기가 그래서. 네가 남자친구랑 간 걸 버젓이 봤는데 밤새 집에 돌아오질 않았잖아. 엄마는…”

    명정이 다정에게서 멀어지며, 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인 채였다.

    “다 이해해. 말했잖아. 엄마도 연애, 해봤다고.”

    “…미안해.”

    명정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가 있어. 사랑에 미칠 때. 엄만 그저, 네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께 감사해. 정말 그거면 돼.”

    온화하게 웃는 엄마의 눈가에서 결국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다정은 입술을 짓이겼다.

    “밥 잘 챙겨 먹고, 푹 쉬어.”

    “나 오늘 오프야. 같이 있어.”

    “미용실 열어야지, 이것아.”

    독한 파마 약에 지문이 닳은 엄마의 손을, 꼭 잡는 다정이다. 명정도 조용히 딸의 어깨를 두드리고 집을 비웠다.

    홀로 남자, 제일 먼저 욕실로 향했다. 흐르는 물에도 먹먹한 가슴은 씻기지 않았다.

    젖은 머리를 털며 냉장고를 여는 순간, 잔뜩 쌓인 락앤락 통이 보였다. 다시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며 라면 봉지를 들었다. 라면과 밑반찬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울 요량이었다.

    그러다 문득, 밥 잘 챙겨 먹으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 라면 대신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수납장과 연결된 접이식 상판 위로 밥상을 차렸다. 꺼내도 다 먹지 못 하겠지만, 단 하나도 등한시하고 싶지 않아 반찬을 모두 꺼냈다. 냄비 채로 들어가 있던 찌개를 데우자 집 안 가득 엄마의 냄새가 고였다.

    이런 기분에 적막은 사양이다.

    밥 한술을 밀어 넣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는 온통 에번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눈에 익은 의료진이나 병원 관계자의 인터뷰 장면도 종종 나왔다. 모두가 환희에 젖은 얼굴이었다.

    없던 입맛이 더욱 떨어진다.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 바이러스에 희생된 환자와 그 유가족의 통곡.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자, 목이 멨다.

    “읍….”

    마음이 완전히 침울해졌을 때, 뉴스는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 있었다. 조현병의 심각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흔히 묻지 마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병이라며 기자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 아픈 와중에도 분명한 발음의 목소리가 다정의 귓가에 들렸다.

    괜히 오싹해져 몸을 떠는 순간, 간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식탁과 부딪치는 마찰음이 커 화들짝 경기를 일으킨다.

    메시지였다.

    “하…”

    진이 확 빠진다. 상대는 침울해진 기분을 단숨에 바꾸고도 남게 할 인물이었다.

    [모처럼의 연휴, 나한테 써달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다정은 잠시 생각하다, 신중하게 답을 보냈다.

    [오늘은 늘어지게 잘래요. 내일 만나요.]

    인력이 부족해 강행되었던 근무와 강렬한 섹스. 체력이 달렸다. 하지만 정말 쉼이 필요한 이유는, 고단한 마음 때문이었다.

    고통스럽다고 해서 기억을 억지로 묻기엔, 아픔이 많았던 싸움이었다. 몇 주간의 악몽을 곱씹으며 충분히 아파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은 내일이면 가실 테니까.

    그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사람들에게 금방 잊힐 혹독한 역사를, 단 하루라도 가슴에 새겨 넣자.

    진정한 간호사라면.

    * * *

    에번 바이러스 사태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을 때만 해도, 다른 욕심은 없었다. 그저 다정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지금의 성후는 그녀의 단 하루의 부재도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마지막 메시지는 점심때 끊겼고 그녀는 그 뒤로 전화는커녕 메시지 한 통이 없었다.

    자정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그것도 야트막한 꿈속에서 헤매고 깨기를 반복했다.

    아침 해가 떴을 땐 기뻐 환히 웃었다.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편안한 옷에 검정 패딩 하나만 툭 걸친 채 집을 나섰다. 다정을 데리러 가는 차가 비행기가 되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다정은 눈처럼 새하얀 롱패딩을 입고 이미 내려와 있었다. 차에 올라 밝게 웃는 그녀가 정말이지 흰 눈처럼 깨끗하고도 고아했다.

    벌컥.

    조수석 문이 열렸다.

    “하이.”

    좌석에 앉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예쁘게 올라간 광대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딥니까.”

    “제 고향이요. 밀양.”

    “밀양이… 어디죠?”

    “경상남도.”

    성후가 내비게이션에 손을 갖다 대었다.

    “넘치는 게 시간인데, 가죠. 경상남도.”

    가는 동안 다정의 말소리를 노래 대신 들었다. 말수가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그녀지만, 오늘따라 재잘재잘 떠드는 말들이 듣기가 좋았다. 성후는 고개를 주억이다, 피식 웃다, 종종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허, 어허. 운전에 집중…!”

    “되겠습니까, 집중이.”

    성후의 말에 쑥스러워진 다정이 사이드미러를 힐끔 쳐다보았다.

    “기분 탓인지, 뒤에 계속 같은 차가 따라오는 거 같아요.”

    성후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비서입니다.”

    “아아.”

    성후의 속에서 울상 짓던 연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간 자신의 단독행동에 관하여 그 죄를 연석에게 물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과 연을 끊을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연석을 바짝 조인 게 바로 그 증거다.

    “밀양은 어떤 곳입니까.”

    미안하지만, 지금은 연석에게 마음 쓸 때가 아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살아있는 곳이죠. 언젠가, 돌아가서 살고 싶은 곳이고요.”

    추억이라….

    어린 다정의 모습이 남아있다는 곳에, 성후도 얼른 가고 싶었다. 순순히 보고 싶기도 했고 확실히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소녀가 다정인지. 확실한 고증이 필요했다.

    밀양에서도 외곽이라던 다정의 고향은, 확실히 시골이었다. 겨울바람 앞에 얼어있는 논과 살얼음이 낀 도랑이 곳곳에 보였다. 차로는 올라가지 못하는 길목에 차를 주차하고서 다정을 따랐다. 좁고 구부정한 길을 꺾자, 빨간 벽돌집이 보였다.

    “여기에요. 내가 자랐던 곳!”

    괜히 긴장으로 가슴이 뛴다. 성후는 고개를 주억이며 다정이 열어주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에서부터 노파에게 안긴 아기 다정의 모습이 액자에 박제되어 있었다.

    “좀 누추해요. 어서 들어가요.”

    다정이 성후의 등을 슥 밀었고, 성후는 자연스레 거실을 지나 좁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색이 변해 누런 장판과 흙냄새가 나는 벽지. 유리 상판이 놓여 있는 촌스러운 책상 위로 액자가 전시된 듯 서 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쓰던 방이에요. 그때까진 공부를 잘 안 해서 보다시피 책상이 깨끗한 편이죠. 후후.”

    성후의 시선이 하나의 사진에 붙박였다. 열넷의 2월. 초등학교 졸업식 날의 사진이다. 다정의 곁에는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아.”

    다정이 피식 웃었다. 졸업식 날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복잡미묘한 얼굴의 성후가 다정을 와락 끌어안았다.

    “맞구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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