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52화 (52/82)

52화. 연주의 완성은 얼굴

“너무 말랐습니다.”

“그러니까요. 이런 곳이 아니라 고깃집을 갔어야죠. 지글지글. 자글자글.”

“조용한 곳에서 먹고 싶었어요.”

성후가 우아하게 칼질을 하며 말했다. 그에 반해 고기들은 듬성듬성 크게도 잘려져 있었다.

“저는 삼겹살에 쇠주가 땡기는데. 우리 좀 안 맞네요.”

다정은 스테이크를 잘게 조각내며 한입에 쏙 넣었다. 오물오물 스테이크를 씹으며 색색의 피클을, 고기보다 더 많이 먹는 그녀다. 그런 다정을 보며 성후가 피식 웃었다.

“입에 안 맞아요? 뭐 먹고 싶습니까.”

“음.”

다정이 고기를 먹으면서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 대답한다.

“어차피 양이 가잖아서, 2차로 뭘 먹긴 해야 할 것 같아요.”

“2차로 또 밥을?”

“앤 쇠주!”

다정이 익살스럽게 코를 찡그리며 대꾸했다.

“전 다정 씨가 술 먹는 게 싫습니다.”

성후의 말에 그녀가 제 머릿속을 뒤적여본다. 보자, 보자, 실수했던 기억이….

“술 먹은 여자를 안을 순 없으니까.”

다정이 입술을 앙다문다.

“그것도 끝까지 달려 취한 여자를. 그러니까 오늘은 좀 자제하세요. 물론 먹는 건 뭐든 좋습니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고풍스럽지만 별로 환하지 않은 레스토랑 안은 자리마다 연철 촛대가 세워져 있었고 자잘한 레이스가 새겨진 식탁보 위론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클래식도 우아한 멋에 품격을 더했다.

그것들을 배경으로 두고 앉은 성후.

아무렇게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커다란 고기를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큰 덩어리 채, 짓이겨진다. 느긋하면서도 강하게 움직이는 그의 턱에 다정의 시선이 붙박였다.

그는 그대로 쉬지 않고 먹어치웠다.

꼭 중세시대 속 귀족 파티에 참석한 야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우스운 건, 그 모습이 더 없이 남자답게 느껴졌다.

배경을 떠나, 고상과는 거리가 먼 그가 참 좋았다.

“성후 씨도 모자라겠는걸요. 거의 운동선수처럼 드시는 데요?”

며칠 함께 있었을 때, 성후를 조금 파악했더랬다. 그는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참을성이 부족한 남자였다.

그게 식욕일 때도 있고, 성욕일 때도 있었다.

어쨌든 탐하고 싶은 건 모두 탐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었다. 때로는 넘치게 탐하고도 부족하다 입맛을 다셨다.

“연비가 별로라. 먹어야 잘 달리거든요.”

그러면서 씩 웃는다.

“다정 씨도 많이 먹어요. 살, 찌워야죠.”

성후의 야릇한 시선이 다정을 더듬었다. 실제로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마치 그와 접촉한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

“이 전이 딱 좋았는데 말입니다.”

성후가 나이프를 내려두고 제 손을 펼쳐 보았다. 쥐락펴락하는 모양새가 괜히 야하게 느껴졌다.

깜짝 놀란 다정이 나이프로 성후를 척 가리켰다.

“저, 칼 들었어요.”

그 나이프는 성후의 얼굴 쪽에서 하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후는 자신도 모르게 하체를 움찔했다. 모처럼 볼 수 없는 당황이 성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다정은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성후도 따라 웃었다.

다정은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막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방호복 속에 사는 동안 바깥세상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새삼 느껴진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어쩌면 어렵지만,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이라고.

“손은 괜찮아요? 계속 아프죠?”

오전과는 달리 다정의 얼굴은 걱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성후는 벌써 스테이크 두 접시를 말끔히 비운 뒤였다.

“실험, 해볼까요?”

성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다리를 뻗어 뚜벅뚜벅 그가 향한 곳은 작은 무대였다. 그곳엔 먼지 한 톨 앉아 있지 않은 그랜드피아노가 서 있었다. 성후는 건반을 부드럽게 쓸다 건반 하나를 눌렀다. 맑은소리가 울렸다. 제대로 관리했는지 소리가 예쁜 편이었다.

의자에 앉아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신비하게도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눈을 감고 암보를 떠올려보았다. 마음이 차분해서인지, 뚜렷이 기억이 났다.

성후의 머릿속 세상이 손끝으로 옮겨진다. 베토벤의 소나타 A장조. 맑고 훌륭한 연주가 이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후에게로 꽂혔다.

누군가는 웅성거렸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들었다. 대부분 마성후를 알아본 낌새였다. 그 시선이 곧 성후가 앉아 있던 다정의 테이블로 향하기도 했다.

다정은 오직 성후만 바라보았다. 걱정되었다. 그러나 믿는 마음이 더 컸다. 무너질 남자였다면 스스로 무대에 오르진 않았을 터였다.

“하아….”

실제로 처음 보는 유려한 연주 실력에, 막귀가 듣기에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음에, 다정의 긴장은 길어졌다. 목이 탄다. 물로 입술을 적시는 순간, 음 이탈이 들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어떡해…!

“아.”

성후가 연주를 멈추었다.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다. 성후는 푹 쓰고 있던 모자를 거꾸로 썼다. 청중에게 기꺼이 구경거리가 되어주겠다는 듯이, 숨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의 이목구비가 완전히 드러나자 사람들이 더욱 열광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귀로 듣겠다는 마음보다, 영상으로 남기겠다는 의지가 훨씬 커 보였다.

동영상 촬영 알람 음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다정의 심장에 빨간 경고등이 켜진다.

이 정도의 노출은 위험해.

후폭풍이 걱정되었다.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후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성후가 그녀를 보며 여유롭게 웃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다정의 발도 그대로 멈추어 섰다.

다시 그의 연주가 이어졌다. 음 이탈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다정은 놀라 경직되었고 사람들은 작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작은 소린데, 다정에겐 재앙처럼 크게 들렸다.

무리하지 말아요. 제발….

그때였다. 성후가 씩 웃더니 광적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음 이탈과 자연스레 연결하니, 가끔 몇 음이 틀려도 마치 그의 연출인 것처럼 느껴졌다.

천재의 수완이다.

여유로운 표정에 자신감 넘치는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격정적인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다정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어땠습니까.”

그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이런 상남자가 없음에도, 웃을 땐 마치 소년 같다.

“훌륭했어요.”

다정의 말에 성후가 픽 웃는다.

“간호사 선생님. 제 손의 상태 말입니다.”

그리고 바짝 다가와 다정의 귓가에 속삭인다.

“바보 같은 연주 말고.”

성후의 말에 발끈한 건 다정이었다.

“하나도 바보 같지 않았어요! 정말 훌륭한 연주였다고요. 간도 크지….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다정이 무수한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성후가 허리를 굽혀 다정의 눈높이에 제 시선을 맞췄다.

“연주의 완성은 얼굴인 거, 이제, 아시겠어요?”

아픈 손가락도, 음이 뒤틀린 연주도, 모두 얼굴이 속였다는 말이었다. 다정이 피식 웃는다.

“뻔뻔도 하셔라.”

“그래서 좋아하잖습니까.”

마성후가 한 뼘 더 성장했다. 모든 병은 인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늘 없는 성후를 보는 다정의 마음이 뭉클했다. 이런 식으로 느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특하단 생각도 들었다.

“…좋아해요. 많이.”

생각지 못한 다정의 고백에 성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음…?”

다정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다정의 손목을 잡고 레스토랑 입구로 끌었다.

“밖에 나갑시다. 여긴 너무 더워요.”

레스토랑을 나와 찬 바람을 가르며 성후가 걸었다. 다정은 그의 코트 자락 안에 숨겨져 있는 꼴로 잰걸음을 걸었다.

“상쾌합니다.”

다정은 성후의 체온에 의지하며 툴툴거렸다.

“뭐래. 완전 춥거든요…!”

“큭큭.”

“어쩐지, 좋아 보여요. 성후 씨. 더 어른이 된 거 같아요.”

“나보다 어린 주제에.”

건방지다는 투의 그의 목소리엔 웃음이 묻어 있었다.

“정신적으론 훨씬 우위에 있죠.”

“뭐?”

우뚝. 성후의 걸음이 멈췄다. 이윽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다정이 코를 찡그리며 웃는다.

“오빠가요.”

그녀의 반박에 성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시원한 웃음에 다정의 속도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행복하다.

“당신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손가락이요?”

성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잇는다.

“이것도 그렇고. 내가 물고 태어났다던 화려한 수저도 그렇고.”

진심이 아니란 걸 알지만, 연을 끊겠다고 엄포를 높던 아버지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다.

“걱정하지 맙시다.”

“네?”

다정은 다른 걱정에 쓸 정신이 없었다. 앵글 부츠를 뚫고 들어오는 혹독한 겨울바람 때문에 걸음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먹여 살릴 거니까.”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진지한 그의 말 앞에 다정은 무방비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상냥한 얼굴로 되묻는 거 같았다.

“나 오늘 어땠습니까.”

“…오늘요?”

“네. 쇠주를 못 드셔서 미웠습니까.”

성후의 목소리로 듣는 ‘쇠주’가 재미있어 다정이 키들거렸다. 그러다 헛기침 뒤로 웃음을 삼킨 뒤 대답했다.

“그러네요. 그래도 그런 아쉬움을 다 상쇄시킬 만큼 근사했어요. 연주요. 초반엔 걱정으로 집중을 잘 못 했지만…. 후반에는 한 번 더 반했어요.”

“그래서 몇 점입니까.”

다정이 입안을 오물거리다 이내 답을 내놓았다.

“99점. 1점은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로 뺐어요.”

“자만하지 않을게요.”

“그래요.”

다정이 성후의 몸통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볐다. 그때 다정의 위로 낮은 성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99점이면 1등급 아닙니까.”

“뭐, 그런 셈이죠.”

어디라도 들어가고 싶다. 제 뜻을 피력하려는 순간 성후가 말했다.

“보상해주셔야죠.”

“보상?”

“하는 거 봐서.”

몇 시간 전 다정이 했던 말을 성후가 그대로 복제했다.

“그 말, 지키기로 했잖아요.”

“그, 그래서, 당장 호텔이라도 가시겠다?”

얼음장 같은 공기. 말할 때마다 번지는 입김. 깨끗하지만 외진 골목 안 그들을 비추는 유일한 가로등. 조금만 더 가면 대로변으로 택시가 줄을 서고 있을 터였다.

…꿀꺽.

다정이 은밀히 침을 삼키는 순간, 성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커다래진 성기에 갖다 댔다.

“…헉…!”

“조여서 터질 것 같습니다.”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이한 목소리에 다정의 온몸이 옅게 떨렸다. 동시에 체온이 오르고 속옷이 젖는 게 느껴졌다.

“물론, 당신도 젖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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