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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51화 (51/82)
  • 51화. 따끔한 것이 좋아

    일제히 남자를 주목했다. 무수한 시선 앞에 남자가 움츠러들었다. 그중에 가장 열기 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후에게 시선이 갔다. 그가 다정의 보호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음성이랍니다.”

    남자의 바로 옆에서 자신의 검사 결과를 듣게 된 다정은 지체 없이 성후에게로 달렸다. 성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다정에게 너른 품을 내어줄 준비만 했을 뿐이다.

    그토록 원했던 체온이 맞닿는 순간. 짜릿한 전율도 잠시, 이윽고 다정이 성후의 품에 쏙 들어왔다.

    속수무책 번져 드는 감격에 다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울음으로 덜덜 떨리는 턱.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입술만 깨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성후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다정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 손짓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꼭 비눗방울을 만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주하던 성후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자, 타인의 눈에는 그저 듬직한 사내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다정에게 닿는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때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더 이상의 감염자도 없답니다. 병마와 싸우고 계신 세 분은 다른 질병으로 판독 났고, 나머지 에번 바이러스 의심 환자들은 독감이나 가벼운 감기랍니다.”

    의심할 여지 없는 종전 선언이었다.

    * * *

    수간호사 정희가 밝지만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끝까지 할 일 다 하고, 이런 날은 회식… 이 아니라, 칼퇴근! 각자 집에 가셔서 가족들과 스킨십도 잔뜩 하고! 맛있는 것도 실컷 드시는 거예요. 아셨죠?”

    “예에에!”

    기쁨에 젖은 간호사들이 쑥덕거렸다.

    “단!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몇 주간 이어졌던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일각에선 완전히 안심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극소수의 음모론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많은 사람을 떨게 했던 바이러스와 드디어 이별을 맞게 된 의료진들은 그 환희를 다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은 달랐다.

    살인적인 업무량을 똑같이 처리하면서도,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랬다.

    딱 한 사람.

    다정만 빼고.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거예요…?”

    외과에서 유리 조각을 모두 제거한 성후의 손을 다정이 소독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 여느 때보다 엄했다. 외과라면, 자신의 분야도 아니었거니와 귀한 손을 스스럼없이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다정의 화를 산 것이었다.

    위기도, 그리움도 일단락된 탓일까.

    다정은 성후의 대책 없는 태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적어도 당장은 말이다.

    “화났습니까?”

    텅 빈 주사실. 성후가 침대에 걸쳐 앉은 채로 다정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다정은 말 대신 소독약을 퍼부었다. 과장이 아니다. 콸콸.

    “읏…”

    아픈지 성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정은 개의치 않고 집게로 솜을 집어 터프하게 환부를 꾹꾹 찍어 눌렀다.

    “으읏…”

    소독약이 손을 넘어 범람할 정도였다. 일시적으로 따끔한 감각에 만성이 생길 리 없지만, 성후는 다정의 화를 고스란히 받기로 마음먹었다.

    다정이 하는 일이라면 따끔해도 좋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은 따끔해서 더 좋다.

    그 모든 게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말이다.

    또. 걱정시켜 미안했다는 마음보다는, 제 걱정으로 인해 내는 화가 기뻤다. 좋든 싫든, 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다정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손은 따가운데 심장은 터질 듯 가쁘게 뛰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체온이 닿아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 성후다.

    하트를 담은 눈으로 다정을 빤히 올려다보자, 그녀가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의 쪽으로 성후의 손을 팽팽하게 당겼다.

    “아.”

    성후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웃으며 말했다. 다정이 소독 부위를 손짓으로 잠시 말린 다음 약을 펴 발랐다. 멸균 글러브도 끼지 않은 터프한 손짓에 성후가 말했다.

    “2차 감염이라도 되면 책임지실 겁니까.”

    그제야 다정이 성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둘만의 공간.

    완전히 닿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유지되는 근거리.

    그럼에도 다정의 눈동자는 폭풍이 지나간 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눈빛에 성후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환부의 통증조차 달콤하게 느껴질 만큼. 때문에 눈가에 웃음기가 마를 줄 몰랐다.

    그런 성후에게 다정이 서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손을 영영 못 쓸지도 모르는데, 고작 2차 감염이 무서워요?”

    질타하는 말투도 그저 사랑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더는 열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성후는 은밀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 곧 다정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잃을까 봐 떨었던 그 시간들이… 제 생에 가장 무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거즈를 붙이는 다정의 손이 희미하게 움찔했음을, 성후는 눈치챘다.

    그녀의 동요에 성후가 기꺼운 웃음을 흘렸다. 다정은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색했다. 그 어색함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에서, 성후는 이성을 붙잡기 힘들었다.

    “신경을 건드린 게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러면서 성후의 손을 꼭 붙들고 의료용 메딕스를 붙였다. 그리고 붕대를 꺼냈다. 붕대까지는 필요 없지만, 이 남자를 꼼짝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벌이기도 했고 마음이기도 했다.

    “당분간은 일상생활이 불편할 거예요. 자처한 일이니 알아서 잘 감수하세요.”

    남 일이라는 듯 뾰로통하게 움직이는 입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상처는 남겠지만, 할 수 없죠.”

    고의적 날카로운 말투가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것이 성후를 한계로 몰아붙였다.

    “듣고 있어요?”

    물음에 대꾸 없는 성후를 노려보며 고정용 클립을 입에 물었다. 행방불명된 의료용 테이프를 대신해서. 이제 클립으로 단단히 고정만 하면 드레싱 과정이 끝이 난다. 붕대를 반듯하게 피며 마지막으로 휘감는 순간, 성후의 남은 손이 다정을 끌어당겼다.

    “어??”

    완력이 대단했다.

    한 손에 온몸이 휘청이며 성후에게 쏠렸다.

    “꺄앗!”

    결국, 성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가슴팍에 쓰러졌다. 헉. 그의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에 다정은 깜짝 놀랐다. 그때였다. 성후가 서서히 손길을 뻗더니 그녀의 입가에 물려 있던 클립을 빼냈다.

    “다쳐요.”

    그러면서 예쁜 입술을 어루만졌다. 입술에 닿는 엄지가 주변의 산소를 훔쳐간 듯, 숨쉬기가 어려웠다.

    “긴장했습니까?”

    “…그럼 안 했을까요.”

    다정은 당황한 얼굴로 솔직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다. 주사실 밖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모습이 그녀다웠고, 그래서 몹시 사랑스러웠다.

    다정의 목덜미를 감싼 성후가 결국 다정의 입술을 삼켰다.

    주변을 보는 법이 없는 이 공격적인 남자와는 달리 다정에겐 먼지 같은 이성이 남아있었다. 잠겨져 있지 않은 저 문을 누군가 열어젖힐까 봐, 조금은 두려웠다.

    그러나 그의 혀가 안으로 침범하는 순간.

    걱정은 뜨거운 공기 중에 흩어져버렸다.

    “핫…”

    당장 혀를 핥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가 무섭게 몰아쳤다. 동시에 단단히 발기된 성기가 다정의 정복 위로 툭 하고 닿았다. 뜨겁고 꿈틀거리는 느낌이 과하게 생생하다.

    다정은 이대로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키스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아…”

    적당히 숨이 차오를 때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조금의 틈을 허락해주었다. 다정이 지치지 않도록 조절하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집요함이 여실 없이 드러났다. 물론 그는, 그조차 숨길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앗…”

    성후가 입술을 떼고서 물었다.

    “뜨거워졌어?”

    다정이 눈동자를 가늘게 떨다 붉게 익은 고개를 주억였다. 만족감에 기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갈까.”

    성후의 못된 손이 다정의 척추뼈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나도 못 참겠거든.”

    척주를 타고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다정이 맥없이 성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을 때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성후가 긴 다리를 뻗어 주사실 문이 열리지 않도록 막았다. 그가 허벅지에 힘을 줄 때마다 노골적으로 닿는 감각에 다정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럴 때가 아닌데.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빠지는 숨조차 정리하기 힘들었다.

    “어? 왜 안 열리지??”

    성후가 대꾸했다.

    “사람 있습니다. 엉덩이에 주사 맞고 있어요.”

    낮은 남자 목소리에 문밖의 간호사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사위가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미뤄야겠습니다.”

    다정은 수긍의 의미로 옅게 고개를 주억였다. 성후가 그런 다정의 귓불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낮게 말했다.

    “마치고 봅시다.”

    * * *

    뉴스는 온종일 ‘에번 바이러스’ 혹은 ‘은명 대학 병원’에 대해 떠들었다. 까마귀 사체 앞 하이에나처럼, 기자들만 겨우 보이던 병원 풍경은 의료진들의 걱정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세상이 어둠에 잠겼을 때 다정이 병원에서 나왔다. 성후가 모자를 고쳐 쓰고 차에서 내린 순간, 다정과 눈이 딱 마주쳤다. 서로를 향해 웃는다. 그 순간,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정아…!”

    명정이었다. 곁에는 경환, 우석, 승주 그리고 기봉까지 달려와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다정의 검사 결과까지 모두 들었던 이들의 얼굴이 눈물과 웃음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다정은 오전에 이미 진탕 운 다음이었고, 평소처럼 업무를 마치고 온 다음이라 많이 침착해진 상태였다.

    “어여 밥 먹으러 가자, 내 새끼. 뭐 먹고 싶어. 아니면 엄마가 해줄까? 응?”

    명정의 등 뒤로 멀찍이 서 있는 성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기꺼이 양보하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다정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린다. 다정은 엄마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명정의 손이 다정의 등을 쓰다듬는 순간, 다정이 말했다.

    “엄마 딸, 불효녀야.”

    “아니다, 아니야. 너로 인해 속 끓인 건 맞지만, 넌 절대 불효녀가 아니야.”

    맥락을 이해 못 한 엄마가 강하게 부정하며 말했다. 그러자 다정이 본론을 언급했다.

    “오늘은 저 남자랑…”

    다정의 시선이 가는 대로 모두의 시선도 옮겨갔다.

    “시간 보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었거든.”

    움찔한 경환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럼 다 같이…”

    그러자 명정이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무사한 거 봤으니 됐어. 가죠, 여보. 우리 다정이도 청춘사업 해야지.”

    “흐음….”

    잠시간 망설이던 경환이 지갑에서 지폐를 여러 장 꺼냈다.

    “두 사람 다 살 빠졌어. 맛있는 거 사 먹어. 꼭, 네가 사.”

    경환의 당부에 다정이 고개를 주억인다. 우석은 말없이 물러났고, 승주는 우는소리를 하며 다정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기봉은 다정의 어깨를 툭 잡으며,

    “다음에 정식으로 소개해도.”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해.”

    정말 먼 거리에서 온 친구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좋은 날이 또 안 있겠나.”

    멀어지는 사람들과 다가오는 한 사람. 스치며 성후가 공손히 묵례했다. 다정에게 완전히 다가온 성후는 검은 모자를 벗고서 잠깐 눌린 머리칼을 털었다.

    “뭐 먹고 싶어요?”

    내려온 앞머리를 대충 정리하다 손이 멈춘다. 그대로 다정을 내려다보았다. 그 뜨거운 눈빛의 의미를 읽어 버린 다정이 다시 한번 더 말했다.

    “고형물요. 꼭꼭 씹어 삼키는 거.”

    불신의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몹시 귀여웠다. 성후는 볼살은 은밀하게 깨물고 물었다.

    “그다음은요.”

    다정은 잠시 뜸 들이이다, 그에게 맞서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야릇한 목소리로 선수처럼 말했다.

    “하는 거 봐서?”

    살짝 콧소리도 섞였다. 성후의 얼굴에 천천히 잔악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말, 지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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