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50화 (50/82)

50화. 당신 없는 나는

「납니다. 마성후.

혼자 둬서 미안합니다.

무능해서 미안합니다.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거뿐이라 미안합니다.

열악한 환경도 힘들고,

바빠서 힘들고,

출퇴근하는 것 역시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티끌 같은 도움이라도 되는 애인이 되고 싶습니다.

기사는 못 되어 주어도, 당신을 모시고 싶습니다.

제 가슴 덜 아프게, 저를 위해서, 받아 주세요.

그리고 우리 곧 만납시다.

내가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남자 마성후.」

얼마나 힘주어 썼는지 강한 필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편지를 끌어안으며 다정은 한참 울었다.

원래는 병원 간부 전용 주차장이었던 이곳은 이번에 무균 병동 의료진들에게만 개방된 곳이었다. 누구나 지하층으로 내려와도, 누구나 다닐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에번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난 후 외부인은 훨씬 막강하게 통제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성후에 발자취가 남겨져 있었다.

이 모든 게 그의 힘.

그의 마음.

“흐으윽…. 흐윽….”

정신없이 지내다가도 문득, 성후 생각이 났더랬다. 그럴 때가 아닌 줄 알면서도 물 한 잔 마실 때조차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날 선 눈빛과 도발적인 말들이 듣고 싶었고 커다란 품에 안기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그레이트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불과 얼마 전의 일임에도 아주 오래된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혹 잊을까 봐 그날의 기억을 얼마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그의 모습이 흐려질까 봐….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펼쳐져 있던 편지를 고이 접었다. 눈물로 뿌예진 시야에 뒷장에 적혀져 있던 짧은 글귀가 하나 들어온다.

그의 마지막 흔적.

「버팁시다. 버티고 또 버팁시다. 나도 그리할 테니, 당신도 그럽시다. 온다정 간호사의 위대함을 믿어요.」

“흐윽… 네. 네, 성후 씨. 나 버텨서… 독하게 버텨서… 꼭 당신에게 갈게요.”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 올라간 체온. 가빠진 호흡으로 차창엔 하얗게 김이 서렸다. 눈물을 가려주는 작은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 * *

지옥 같은 이틀이 잘도 흘렀다.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온 가르니크 일가는 성후를 중심에 두고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얼굴은 굳어 딱딱했다. 뜨문뜨문 말 비슷한 걸 내뱉는다는 걸 알지만, 성후에 귓가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병원장에게 들었던, 그리고 CCTV로 보았던 다정이 처한 상황. 그 일련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필름처럼 이어졌다. 그사이 중간중간 두려운 상상도 끼어든다.

“성후야…….”

모든 말을 흘려듣던 성후의 정신을, 선화가 겨우 깨웠다.

“무슨 얘기라도 해보지그래…?”

“얘기라뇨.”

“여태 뭘 들은 거야. 네가 만난다는 그 여자애 얘기 말이다.”

성후는 슬쩍, 주방에 서 있는 연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연석이 매우 결백한 얼굴로 두 손을 바쁘게 저었다. 적어도 자신이 범인은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면 예상가는 인물은 뻔하다.

바로 병원장.

언론의 눈치를 보면서도, 가르니크와 척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불이익을 줄까 봐 불안했겠지.

성후는 확신했다. 불이익을 받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슬쩍 흘렸을 거라고. 부당한 일을 겪지 않도록. 또는, 부당한 일을 당했을 시 당신의 아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청탁했다는 사실을 발설할 수도 있다는 시시한 패를 보여 준 셈이다.

곰의 탈을 쓴 뱀 같으니라고.

형식적인 입단속이라도 할 걸 그랬다. 언뜻 후회가 들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이었다. 다정의 걱정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이런 상황을 만든 것 역시 자신이라 생각됐다.

“다 관둬라.”

마 회장이 묵직하게 말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 오빠. 난 항상 오빠 편이지만…, 그분이 계신 곳이 에번 바이러스 지정 병원이라며.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감염자들 돌보고 계신다며. 어쩌면 감염이 되었을 수도…”

“유리야.”

선화가 엄한 말투로 말을 잘랐다.

“아버지 얘기하시잖니.”

유리의 발언권을 빼앗으면서도, 딱히 가족들과 생각이 다른 건 아닌 듯 보였다.

성후는 선화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였다.

웬만해선 성후의 뜻을 지지했고 마 회장과 마찰이 생길 때마다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후를 위협한다면, 사랑은 선화에게 있어 ‘고작 사랑’일 뿐이었다. 성후를 사랑하기에, 엄마이기에, 아들의 열병을 잠재우고 싶었다.

“아직 결과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

마 회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막혀 잠시간 말문도 막혔다. 유리는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고 선화는 입술을 은밀하게 깨물었다.

“잠복기라는 게 있지 않으냐. 설령 아니라고 해도, 나는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마 회장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후가 발끈한다.

“직접 보신 적도 없지 않습니까.”

제 것을 지키고자 하는 남자의 눈이었다. 원래도 온순한 아들은 아니었다. 뜻을 관철할 땐 대체로 반항적인 태도였고 종종 돌발 행동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성후의 눈빛은 그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가족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겠노라는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건 광적이었고 꽤나 위험해 보였다.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 직감하면서도, 마 회장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뜻을 굽히지 않겠다면…, 나도 더는 너를 보지 않을 생각이다.”

강경하게 말했지만, 속으론 바짝 긴장한 탓에 애가 타들어 갔다.

성후는 눈을 내리깔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공손하게 현관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잘 가십시오, 마 회장님.”

‘아버지’가 아닌 ‘마 회장님’.

“이 녀석이…!!!”

단박에 선을 긋는 아들의 태도에 마 회장이 목덜미를 잡았고 놀란 선화가 남편을 부축했다. 유리는 걱정과 원망 어린 눈으로 성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소름이 끼쳤다.

텅 빈 오빠의 눈빛 앞에.

성후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빛으로 가족들을 쳐다보며 조용히 쐐기를 박았다.

“회장님 집은 곧 비워 드리겠습니다.”

다정 씨, 나는 결심했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당신 남자로 살겠다고.

*

어찌할 줄 모르는 가족들을 두고서 성후는 병원으로 향했다.

이제는 손이든 피아노든… 아니. 사지가 다 망가져도 좋으니 다정의 곁에 있겠노라 다짐했다. 흙탕물처럼 지저분했던 마음이 양자택일을 강요받자, 무거운 흙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뽀얀 물만 남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진심.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뉴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태블릿 크기의 작은 모니터 안에는 격하게 흥분한 앵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급박한 말투임에도 귓가에 담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침잠한 시선 안으로 익숙한 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집중도가 무섭게 상승했다.

-온다정 간호사님 안녕하세요?

“…!”

이윽고 갈망했던 인영이 화면에 잡혔다. 몇 마디 이야기를 짧게 주고받다, 기자가 다정에게 마지막 각오를 물었다.

방호복 차림의 화장기 없는 다정이 카메라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 공정한 눈빛과 꼭 어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환자들을 지키겠습니다. 제 환자가 쉬이 삼도천을 건너도록 두지 않겠습니다. 간호사의 사명감을 걸고 에번 바이러스와 맞서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들 모두 희망을 잃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를 믿어주세요. 이상입니다.

성후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작은 화면 속에 빨려갈 듯, 평면적인 다정의 얼굴을 매만지던 그의 어깨가 결국, 떨리기 시작했다.

* * *

이렇게 큰 관심을 받을 줄 몰랐다. 은명 대학 병원으로 간호사를 향한 열렬한 응원이 쏟아졌다. 메일, 편지, 전화, 그리고 각종 선물까지. 병원 사이트는 마비되었고, 업무적인 이유로 전화선을 뽑지 못한 데스크에선 종일 응원의 전화를 상대해야 할 정도였다.

다정은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덕분에 의료진들의 사기도 많이 충전되었다. 비단 무균 병동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이 병원에 다닌다는 이유로 한 전공의의 부모가 찾아와 난동을 피우며 아들을 데려갔고, 산부인과 여의사의 어머니는 경로당에서 쫓겨나는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손가락질을 받거나, 약혼자에게 파혼을 당했다는 의료진도 있었다.

갖은 고초를 겪었던 의료진들 마음에 따스한 햇볕 한 줄기가 내린 것이다. 바이러스보다 더 독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들었길 다정은 소망했다.

눈물을 훔치며 방호복을 입고 있는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또 누군가의 가족이 나타나 소란을 피우는 것이라 여기려던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비키라고 했잖아…!!!”

그러자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다정 씨…! 온다정!! 들어가는 거 봤습니다. 나와요! 나와서 얼굴 좀 봅시다…! 이거 안 놔?? 어??!”

다정은 떨며 제 입을 막았다. 생생하게 들려오는 성후의 목소리에 방금과는 다른 이유로 눈물이 흘렀다.

“당신이 안 나오면 나 당장 여기 창문에서 뛰어내릴 겁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탈의실 문을 여는 순간,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후가 맨주먹으로 무균 병동 앞 복도 유리를 깬 것이었다.

씩씩거리는 성후의 주먹은 유리 조각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다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뼈 사이로 파편이 깊게 박히면 영영 손을 못 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성후 씨!”

성후가 턱에 고인 땀을, 피로 젖어가는 팔등으로 쓸었다. 그리고 웃는다.

“다 좋습니다. 딱 한 번만… 안아 보게 해주세요.”

일순 홀린 듯 발이 움직여졌다. 미치게 보고 싶었던 그가 환영이 아닌, 꿈이 아닌 제 앞에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망각하고 달려가려던 때였다.

그 순간 참혹한 현실의 깨달음이 다정의 뇌를 관통했고 동시에 온몸이 돌처럼 굳는다.

“가세요…! 제발…”

흐르는 눈물을 훔칠 새도 없다. 아니. 눈물이 흐른다는 거 자체가 인지되지 않았다.

“흐윽, 가시라고요…!”

성후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천진하게 웃었다. 그의 곧은 시선이 다정에게 닿는다.

“내 영혼을 당신 곁에 두고 어딜 갑니까. 어차피, 빈껍데긴데.”

보는 이들도 더는 관여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을 때, 간이 데스크 위에 놓인 전화가 앙칼진 소리를 내며 울렸다. 당황한 담당자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다. 그의 눈이 크게 떠진다.

성후가 다정에게 점점 다가가는 순간, 남자가 말했다.

“온다정 선생님, 검사 결과 나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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