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사랑이 익을수록 허리가 굽는다
“안녕하세요.”
성후는 우선 명정과 경환에게 묵례했다. 명정이 성후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다정이 보려고… 왔어요?”
딸 이름을 뱉자마자, 코끝이 매워졌다.
“네.”
“아직 못 봤나.”
경환이 묵직하게 묻자, 명정이 팔꿈치로 경환을 툭 밀었다.
“아니, 왜 반말을 하고 그래요.”
어느새 젖은 눈가도 훔치면서.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지금은 병원으로 가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방송국 차량 한 대가 스쳐 지나갔고 연석은 빠르게 성후의 등을 막아섰다. 상대적으로 작은 연석이 그의 큰 덩치를 가려줄 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어째서죠….”
명정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며 나왔다. 성후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그녀를 달랬다.
“어머님 마음이야…, 제가 다 안다고 말씀드리기도 죄송합니다. 그런데…”
“형님. 더는 길가에 서 있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연석의 말에 힐끔, 주변을 살피는 경환이다.
“우선 차에 타시면 어떨까요. 날도 상당히 추운데.”
성후가 얘기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번졌다. 명정의 코끝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경환의 어깨는 경직돼있었다. 연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네 사람은 후끈한 차 안으로 이동했다. 성후는 연석에게 따뜻한 차를 사 오라 시켰고, 그 사이에 성후가 말했다.
“지금 가셔도 외부인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어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모인데도?”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다정이에게 별일 없겠죠?”
이제는 완전히 흐느끼며 말하는 명정이다. 성후는 명정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없어야 하고 말고요. 있다 해도,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다정 씨는… 반드시 저희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경환은 성후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 섣부른 약속보다는 스스로 하는 다짐 같아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리고 저는 다정 씨 편입니다.”
성후의 말에 경환이 설핏 미간을 찌푸린다. 그때 연석이 따뜻한 차를 가지고 등장했고 뒷좌석에 앉아 있는 어른들에게 나눠주었다.
명정은 음료를 마시지 않고 꼭 쥐었다. 경환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뜨거운 것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끓고 있어, 얼음 샤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정이 편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끊긴 흐름을 경환이 이었다.
“두 분이 무방비하게 병원균에 노출되는 거…, 막을 겁니다. 다정 씰 더 힘들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러는 자네는.”
경환의 말에 성후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씩 웃었다. 이런저런 말로 포장했지만,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단박에 간파당한 것이다.
성후는 잠깐 고민했다. 핑계를 대볼까 하고. 망설임의 시간을 길지 않았다.
“저는 병원장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병원장실?”
명정의 눈이 커진다.
“네. 어떻게 친분이 조금 있게 되었습니다. 말은 꽤 통하는 사람이라서, 우선 다정 씨에 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얘기 말인가.”
“코호트 격리에서, 다정 씨만 배제하든. 권고사직하든. 그게 뭐든요. 안전할 수만 있다면 무슨 방법이라도 쓸 겁니다. 아니.”
성후의 눈과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사위가 고요해지더니, 그가 입술을 떼는 게 더욱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정 씰 지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지저분한 거래라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되는대로 휘두르겠다고 고백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듣는 이의 몫으로 남았다.
“같이 가면 어떻겠나.”
성후가 고개를 저었다.
“병원장 체면이라는 것도 있으니, 은밀하게 얘기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연락… 해줄 수 있나?”
경환이 물러나겠다는 뜻을 비쳤다. 부창부수라고, 명정의 고집도 단박에 꺾였다. 당장 만나지 못하는 딸을 그리며 감정만 앞세울 것이 아니다. 힘없는 부모가 나서는 것보다 세상은 영향력 있는 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법이니.
입안이 쓰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물론이죠. 연락드리겠습니다.”
“우리 다정이 잘 부탁해요.”
“아무것도 아닌 저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몫까지요.”
“성후 씨.”
잠깐 놓았던 성후의 손을 명정이 다시 꼭 잡는다.
“고마워요….”
울먹이면서도 웃는 얼굴에서 얼핏 다정이 보였다. 그러자 성후의 가슴이 멍이 든 듯 아파졌다. 성후는 최대한 웃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며 입꼬리를 올렸다.
“별말씀을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닐세. 우린 택시 타고 가면 되네.”
성후의 시선이 점점 더 북적거리는 병원 앞을 응시했다가, 다시 경환을 쳐다보았다.
“날도 춥고, 제 마음도 무겁습니다. 또, 두 분께 다정 씨 얘기를 들으며 잠깐 함께하고 싶습니다. 동행해주시겠습니까?”
감출 수 없는 도발적인 눈빛이 다정의 얘기만 나오면 부드럽게 휘어진다.
“이 사람은 눈물이 많아 어렵겠지만, 재미없는 내가 해주는 얘기라도 괜찮겠나.”
“네, 좋습니다.”
병원을 벗어나며 다정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었다. 그냥 어린 시절도 아니다. 시간은 그녀가 막 세상에 나왔을 무렵으로 되돌아갔다.
갑자기 양수가 터져 급히 119를 불렀던 이야기. 응급 수술로 다정을 꺼냈던 이야기. 세상에 나오자마자 우렁차게 울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떴던 갓난아기는 지독하게 치마를 싫어하는 어린이에서 새카만 사내 녀석들과만 어울리는 털털한 숙녀로 자랐다며 낮게 웃었다.
회상하는 동안, 잠시간 시름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성후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연석도 따라 굽혔다. 명정과 경환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사라졌다. 두 사람이 완전히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목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성후는 두 분에게 감사했다.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고, 믿어주고 또 뜻에 따라주어.
“이제 가시죠, 형님.”
연석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종일 굶어 기력도 없는 연석이 칼바람과 맞서 서 있기엔 몹시 버거웠다. 구두 속 발이 얼고 볼이 찢길 것 같은 고통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지.”
성후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전쟁을 나가는 무사의 그것처럼,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하게도 무장했다.
*
밤을 꼴딱 새웠다. 동이 트고 얼마 후, 병원 입구만 지키느라 눈알이 시큰시큰했다.
“좀 주무시죠.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괜찮아.”
성후는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 있기를 몇 분. 얼마 뒤 시원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성후도 깜빡 졸았는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세상모르고 잠든 연석을 보며, 참 믿을 놈 못 된다고 생각한 순간, 다정으로 보이는 여자가 병원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흩날리는 다갈색 머리칼과 눈에 익은 분홍색 코트. 연청바지 아래로는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특색 없는 듯해도 다정이 자주 입던 패션이었다.
성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여자의 모습은 온대 없이 사라지고 제법 근거리의 기자들만 흘긋흘긋 성후를 바라보았다.
성후는 모자를 꾹 눌러쓰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안 되겠어. 병원장 좀 만나고 올게.”
연석은 자다 깼음에도, 절대로 자지 않았다는 얼굴로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전화 넣을까요.”
“아니, 내가 알아서 들어갈게.”
지천에 깔린 기자들 사이로 성후는 몸을 던졌다. 더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병원은 바이러스에 관한 소문으로 오가는 환자는 없었다. 그사이에 몹시 훤칠한 성후가 지나가자, 기자들은 떠들다가도 힐끗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언뜻 알아본 눈치다.
상관없었다. 귀찮아져서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을 뿐.
성후는 다시 모자를 꾹 눌러썼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걷다 승강기가 내려온 것을 보고 그대로 달려 승강기에 올랐다. 조심조심 그를 따르던 기자들도 당황해 황급히 달려보았지만,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노크와 함께 병원장실을 찾았고, 돋보기를 낀 채 인터넷 뉴스를 보던 병원장이 깜짝 놀라 떨어뜨렸다.
“오랜만입니다.”
성후는 병원장이 앉아 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와 불쑥 본론부터 꺼냈다.
“온다정 선생님 격리, 풀어주십시오.”
“아… 그것은, 저…”
“그렇게 처리해주십시오. 병원에서 원하는 지원금이든, 홍보든, 뭐든 돕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성후는 깍듯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병원장은 난감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그의 상체를 붙들어 세웠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부탁입니다. 병원장님.”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는 성후에게 병원장이 질끈 눈을 감고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죄송… 합니다.”
성후보다, 아니, 가르니크보다 언론이 더 무섭다는 뜻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병원 내에서도 존재감이 큰 다정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건, 그것도 감염자일 수도 있는 그녀가 사라진다는 건, 비밀유지 자체가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상식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감염자일지도 모를 사람을 빼돌리다니.
하지만 도저히, 그녀를 병원 안에 머무르도록 둘 수가 없다.
“이러면 안 되지만… 마성후 님에게는, 무균 병동 CCTV 관람을 허가하겠습니다. 음. 지금 온 선생님은 잘 계신 거로 아는데, 직접 확인하시면 마음이 좀 편치 않겠습니까.”
병원장은 모니터로 무균 병동 화면을 띄었다.
“허.”
성후는 숨이 턱 막혔다. 모든 의료진이 방호복을 입고 있어 모두가 다정처럼 보였고, 또 모두가 다정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영영 그녀를 놓칠까 봐 두려운 성후의 가슴이 서늘하다.
“저들이 일하는 환경에 대해, 얘기를 해주십쇼.”
“환경이요…?”
병원장의 목덜미 뒤로 긴장의 칼날이 단단히 박힌 것만 같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다.”
* * *
또 사망자가 발생하면 뉴스에서는 환자를 병균 취급하며 떠들 것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숨을 쌕쌕 몰아쉬며 말했다.
“나 같은 늙은이야 언제 가도 아쉬울 것 없지만… 여기 간호사 선상님, 의사 선상님은 웬 날벼락입니꺼…”
다정은 불현듯 자신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할머니 손을 잡았다. 거칠거칠 주름진 손은 놀라 움찔했다.
“이렇게 데이면(닿으면) 안 된다고 캤는데…”
구수한 말투까지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다정은 울컥했다.
“할머니도 저도, 괜찮을 거예요.”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말뿐이라니. 죄송하고, 또 죄송했다.
“그랴. 그럴 테지.”
밤 근무가 지나가고 녹초가 되었을 때, 죽어 있던 핸드폰을 오랜만에 켰다. 무수한 연락 사이에, 성후의 음성 메시지가 보였다.
-이제 온다정 씨 없으면, 나도 죽는 겁니다. 보러 갈게요. 간다면 정말 가.
다정은 너무 놀라 통화키를 눌렀다. 연결되지 않는다. 방호복을 마저 벗고 통제된 승강기에 올랐다.
승강기를 타는 게 죽을 만큼 힘겨웠지만, 전염병 담당 의료진에게 다른 길은 허용되지 않았다.
층수를 누르는 것을 깜빡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승강기 앞으로는 막 출근 중이던 박 간호사가 보였다.
“오셨어요.”
“온 선생님! 인터뷰는 잘하셨어요? 오늘 하신다고 들었는데.”
“네, 출근과 동시에 해치웠어요.”
다정은 작게 브이를 하며 웃어 보였다. 마지막 에너지를 쥐어짜 꾸민 미소였다.
“총대 메고 힘드시겠어요. 어쩌겠어요. 저희 병원 마돈나인 것을.”
박 간호사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눈가의 잔주름이 다정을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하. 마돈나의 왕관이 무겁네요.”
“그러게요. 다른 선생님이었으면, 부러워서 배가 좀 아팠을 텐데, 온 선생님은 열외입니다.”
박 간호사가 윙크를 해 보이며 말했다.
“달콤한 애정 공세 받을 자격, 충분하단 얘기예요.”
“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다정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저기.”
박 간호사의 눈이 에번 바이러스 담당 의료진들에게만 허락된 주차 공간으로 향했다. 새하얀 벽 앞에 매끈한 아우디 A5가 서 있었다. 리본을 예쁘게도 매단 빨간색 차가.
다정은 가늘게 뜬 눈으로 차를 응시하며 다가갔다.
거대한 리본에 새겨진 글귀가 다정의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온 선생. 이 차 타고 어서 나 만나러 옵시다.」
차 문을 당기자 딸깍하고 부드럽게 열렸다. 운전석 위로 펼쳐져 있는 투박한 필체의 편지가 보였다.
그가 남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