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48화 (48/82)
  • 48화. 세 가지 가능성

    성후와 다정 사이에 찾아든 침묵.

    성후는 절벽으로 떨어진 심정이 되었다.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떨어진. 까마득한 높이에다가, 지나는 이도 없어 누구도 그를 발견해주지 않을 것처럼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고요가 곧 공포다. 따라서 입을 떼려고 했지만, 복잡한 심경은 말 비슷한 것을 내놓지 못했다.

    -들으셨나 봐요.

    웃음기가 거세된 다정의 목소리.

    “언제까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말투가 묘해지고 말았다. 다그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그녀에게 의지가 되고 싶었고 지켜 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무균실을 박살 내서 다정을 끌고 나오고 싶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냐고. 없던 병도 옮겠다며 깽판을 치고 싶었다.

    상식?

    그런 건 모른다.

    하지만 그녀 삶의 터전은 병원이고, 그녀가 한 선택에 대해 존중은 해야 한다.

    적어도, 다정의 말을 다 들어보기 전까진.

    -혹시, 한국에 오셨어요?

    “그렇습니다.”

    -병원에도요??

    “밑에 있어요. 무균 병동이 보이는 곳에.”

    이미 병동 앞까지 찾아왔다는 것을, 다정도 예상한 눈치다. 다정이 낮게 한숨을 내쉰 뒤 물어왔다.

    -…치료는요?

    “나한테 지금… 그딴 게 중할까.”

    -중요하죠. 하고 말고요.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손 하나 치료해보겠다고, 당신을 혼자 둔 그 며칠이 저한텐 상쇄 불가능한 죄책감으로 남았습니다. 또, 미치게 후회됩니다. 역시 얼굴을 먼저 봤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혼자 두지 않았을 텐데. 왜 나를… 무능한 남자친구로 만듭니까.”

    -무능하지 않아요.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성후가 반박했다.

    “합니다, 지금은.”

    -성후 씨.

    강직한 목소리다. 성후는 불안해졌다. 그녀가 씩씩하게 굴 땐 절대로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으니. 때문에 자신이 나설 자리가 없으니 말이다.

    “…네.”

    -아셨다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병원에, 오지 말아요. 아니. 이 근처도 오지 말아요.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아니죠. 특히나 성후 씨 같은 특권계층의 사람은 여기에 들어올 수 없을 거예요. 가세요.

    이윽고 전화가 끊겼다. 성후는 벤치에 앉은 채 좌절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해로 붕대가 칭칭 감긴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는다.

    이제야 시작했는데….

    그러기까지 꽤 오래 걸렸는데….

    기적처럼 찾아온 행복의 순간이 그를 조롱하듯 단숨에 떠나갔다.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 * *

    환자는 점점 늘어나고 의료진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원하는 이도 역시나 없었다. 혹시나 강제로 차출될까 싶어, 혹은 가족의 강권으로 사표를 던진 간호사도 벌써 몇 명 된다 들었다.

    “선생님….”

    습기 찬 방호복 안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간호사였다. 그녀는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이팅게일 정신으로 제일 먼저 이곳에 지원한 간호사였다.

    “네, 신규 쌤.”

    직감이 왔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신입의 끓는 열정으로 이겨내기엔 현실은 훨씬 버겁고 혹독했다. 다정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흔들려선 안 된다. 가슴은 태풍 앞 나뭇가지처럼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렸지만, 티 내선 안 된다.

    “무서워요….”

    외면했던 다정의 진심이 신규 간호사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다정은 신규 간호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희망을 버린다는 건 죽음을 받아들인단 말이에요. 환자들도, 저희도, 그래선 안 되잖아요.”

    “아는데…”

    다시 토닥이는 다정의 손길. 그것은 곧 자신에게 건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무균 법 잘 지켜요. 음식 잘 챙겨 먹고, 집에 가면 잠 잘고요. 면역 관리만 잘해줘도, 무사할 거예요.”

    신규 간호사를 등지고 다시 27명의 환자에게로 향했다. 아직 에번 바이러스 확진을 받지 않은 환자의 열을 재는 것으로부터 시작이다. 벌써 두 번째 사망자가 나왔고 그 시체조차 가족들에게 인계되지 못하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비말 감염이 우려되는 가래를 뽑을 때마다 피로와 긴장으로 방호복 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평소보다 많은 일은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하느라 수 배는 더 힘들었다.

    연애감정에 빠져있을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핸드폰이 없어 근무할 동안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이 내려앉고,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느낌이 싸늘했다.

    부재중 112통.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였다. 병동 밖으로 나가자,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붙잡히는 순간 까마귀 앞에 버려진 고기처럼 물어뜯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정은 단단히 긴장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뉴스에선 에번 바이러스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찼다. 긴급 재난 방송도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왔다.

    정부에서 에번 바이러스 공식 병원으로 은명 대학 병원을 지정한 것이었다.

    “하아….”

    다정은 결심한 듯 굳어진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마치 숨이 찬 듯한 우석의 목소리. 기봉에게 전화하려다 서울에 있는 우석이 낫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모호한 감정 같은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기도 했다.

    “우석아.”

    -어떻게 지내는 거야? 괜찮은 거야??

    갑자기 마음속에 안도감이 퍼진다. 다정은 우석에게 차근차근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멀쩡한데, 네 걱정을 좀 사야겠어.”

    -후…. 솔직하게만 말해.

    “뉴스에서 떠들던 무균 병동에 차출됐어. 며칠째 그곳에 있어.”

    -……다정아.

    “사표 쓰란 말은 하지 마.”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때야??

    우석의 목소리에 짙은 짜증이 배 있다.

    “어. 할 때야. 난 간호사잖아.”

    -온다정!

    씩씩거리는 우석의 숨소리가 거칠다.

    “사실은, 감염자랑 접촉했어. 그때는 감염자인지 모르고…. 나도 피 검사해뒀어. 외주로 맡긴 터라 곧 결과 나올 거야. 대한민국이 이렇게 느리다야.”

    -…….

    “그래도 희망적인 건, 일반적인 징후가 아직 내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야.”

    -잠복기도 있다고 들었어.

    다정이 피식 웃는다.

    “뉴스 참 꼼꼼하게도 봤네.”

    -그래서 이렇게 솔직한 이유가 뭔데.

    “나 정말 멀쩡하고 병원 기숙사에서 잘 지내.”

    다정이 제 방을 훑으며 말했다. 이럴 때 보면 거짓말도 제법이다.

    “그런데 말이야…. 부모님이 마음에 걸려. 부모님 목소리 들으면… 나 무너질 거 같아….”

    돌아오는 우석의 대답은 명료했다.

    -알아서 할게.

    다정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고마워…. 고마워…”

    * * *

    “여보!”

    명정이 핸드폰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경환도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다시 전화해 봐요.”

    “봤으면 오겠지. 내가 다정이 집에 가 볼 테니까.”

    그때 벨이 울렸다. 우석이었다.

    “다정이랑 통화했니?”

    전화를 받으며 동시에 물었다.

    -잠깐요.

    경환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든.”

    딸이 뭐라고 했는지보다, 딸이 괜찮은지가 훨씬 중했다.

    -씩씩했어요. 건강해 보였고.

    짧은 말이었지만, 우석이 거짓말을 할 아이가 아니란 걸 안다. 융통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바위에 깨지는 달걀이라도 피하기보단 부딪치는 쪽을 택하는 투명한 아이라는 걸, 알았던 것이었다.

    “…하, 다행이구나.”

    -부모님 목소리 들으면 더 속상할 것 같다고. 몇 가지 당부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우석아.”

    -네, 아버님.

    “다정이 마음이야 백 번 알겠는데, 자식이 부모를 걱정하는 마음이 자식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에 비하겠냐. 나는 지금 병원으로 향하련다. 혹 다정이 연락되거든, 그리 전해다오.”

    -…아버님. 말리지 않을게요. 대신 내일 날 밝으면 같이 가요. 지금 다정이 녹초 돼서 기절했을 거예요.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잘 자야 하잖아요.

    “괘씸한 녀석….”

    우석이 아니라 다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일 모시러 가겠습니다.

    “지금 가요, 응?!”

    명정이 채근했다. 경환은 명정의 손을 꼭 겹쳐 잡고서 우석에게 말했다.

    “그러자꾸나.”

    “여보!”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명정이 소리쳤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에 팔을 꿰었다. 명정이 멍하게 서 있자 경환이 재촉했다.

    “뭐 해. 채비하지 않고.”

    같은 자식을 둔 동료의 눈빛이 엄하게 빛난다.

    “여보….”

    당신 마음이 내 마음이야.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리나. 당장 가서 확인해야겠어.”

    * * *

    종일 전화를 받지 않았던 다정이었다. 성후는 거실을 초조하게 맴돌다 급기야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버렸다. 연석은 그것을 주워 소매로 닦은 뒤 다시 성후에게 건넸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습니다.”

    성후는 씩씩거리며 재차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전화기는 꺼져 있다.

    “너는 이게… 무슨 상황인 거 같아.”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되묻는 연석의 목소리도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 일까.”

    자신의 머릿속을 공유한 사람처럼, 성후가 말했다. 연석은 최대한 냉철하게 추렸던 가능성을 입 밖으로 꺼내 놓기 시작했다.

    “일 번. 뉴스가 보도되고 전화가 폭주해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하필 연장 근무로 충전할 여유가 되지 않았다.”

    끄덕. 성후가 생각했던 가설 중 가장 믿고 싶은 가설이었다.

    “이 번. 세상과의 자가격리. 상황을 모두 알게 된 주변 사람들에게 잠적한다. 남친이라고 예외는 없다. 선생님은 현재, 죽음… 정정하죠.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거의 탈진 상태로 주변을 돌볼 여력이 없다. 걱정이나 격려를 들을 자신도 없다. 일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끄덕.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망의 삼 번.”

    …꿀꺽.

    “선생님의 검사 결과가 최악으로 나왔다.”

    마지막 말이 정답인 양, 성후의 심장을 관통했다. 성후는 비틀거리며 제 머리를 짚었다.

    “안 되겠다. 병원에 가봐야겠어.”

    “퇴근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안 했을 수도 있지.”

    “형님.”

    연석이 거실 통창 밖 새카만 정원을 응시하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지금 영하의 날씨입니다. 혹한기라고요.”

    “차 안에 있으면 돼.”

    “형!”

    “퇴근했든 안 했든! 언젠간 병원에서 나올 거 아니야! 나는 다정 씨를 만나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그놈의 바이러스인지 뭔지 보다, 내가 먼저 죽겠다고!”

    “… 같이 가시죠.”

    잔뜩 흥분한 성후를 대신해서 연석이 운전대를 잡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카메라와 기자들이 병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일반인들의 그림자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시락이라도 사 올까요….”

    온종일 굶은 성후와 그런 그 곁에서 함께 굶었던 연석이 겨우 입을 열었다. 성후는 연석이 안쓰러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낯익은 중년 부부가 병원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얼굴은 경직된 채였다.

    “어?”

    기자들과 대면하기까지, 불과 50m도 남지 않았다. 성후는 깜짝 놀라 차에서 튕겨 나갔다. 연석은 그런 성후를 부르려다, 혹시 들을 귀를 의식하고 조용히 따라 내렸다.

    “어머님, 아버님!”

    성후가 다정의 부모 앞을 가로막고서 가쁜 숨을 골랐다.

    “성후 씨…?”

    흐린 얼굴의 시선이 성후의 얼굴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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