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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47화 (47/82)

47화. 이깟 손 따위

미국에 온 지 수 일이 지났다.

“좀 괜찮으신 거 같습니까.”

묻는 연석의 얼굴이 꽤나 침울했다. 괜히 께름칙해져 캐물으려 한순간, 핸드폰 벨이 울렸다. 성후의 얼굴에 기대 다음으로 실망이 번진다.

“네, 아버지.”

-미국에 있다며.

“그렇습니다.”

가족들과의 소통은 연석이 도맡았다. 그것이 편했다. 제 앞에서는 조잘조잘, 가리는 거 없이 떠들어도 가족들에게는 달랐다. 해야 할 말, 안 해야 할 말, 못 하는 말, 등. 영리하게도 구분했다.

-결혼해라.

“네, 할게요.”

대답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뭐?

성후의 눈에, 당황한 부친의 얼굴이 선했다. 죄송하지만, 고소해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결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구랑?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

-……얼마나 됐냐.

“사랑의 깊이가 시간에 비례할까요.”

-뺀질뺀질, 말본새하고는.

“제 말투가 가볍다고 해서…”

성후의 눈과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제 연애도 가벼운 건 아닙니다.”

핸드폰 너머로, 마 회장의 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후는 잠깐 부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언제 한번 자리 만들어 봐. 밥이나 먹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석의 표정이 구렸다는 건 벌써 까먹은 지 오래다.

“오랜만에 운동했더니 개운하군. 씻고 나오지.”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성후가 말했다. 맨몸에 트레이닝 바지만 대충 걸친 성후가, 연석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몇 걸음 걷다 욕실 불을 탁, 켜는 순간 침묵하는 연석이 다시 마음에 걸렸다.

땀으로 반질거리는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말해 봐.”

그가 기회를 주자, 도리어 망설이는 연석이다.

“말하지 않을 거면, 애초에 티도 내지 않았을 거 아니야.”

연석은 생각이 많은 듯 다시 입맛을 다셨다.

“…이연석.”

“네. 형님.”

“내 성질 엿 같은 거 몰라?”

성후가 욕실 바닥으로 수건을 버리듯 내팽개친 진 뒤 말했다. 조금 짜증이 이는지, 맨가슴도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경험상, 연석이 망설일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절대 좋은 소식이었던 적이 없다. 때문에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연석이 뜸 들일수록 위장은 더욱 바짝 조여졌다.

“온 선생님 말인데요….”

서론을 꺼내자마자 성후의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저벅저벅. 연석에게 다가오는 그다. 그 순간 공기가 모조리 그의 편인 듯, 연석을 압박했다.

“지금 좀 상황이 안 좋답니다.”

“상황이 안 좋다니.”

“에번… 바이러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에번 바이러스?”

낯설지만은 않다.

“신종 바이러스라고 하던데. 최초 감염자는 호주에서부터 시작으로, 최근 몇 개월 사이 전 세계 곳곳에서 감염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뉴스에서 봤던 거 같기도 하다. 성후의 머릿속에 순서 없는 장면들이 뒤섞였다.

“한국에도… 감염자가 나왔다는 말인가. 그것도, 은명 대학 병원에서 말이지?”

긴장은 이어졌다.

“더 심각합니다.”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더 심각하다면?”

“꾸려진 무균 병실에 온 선생님이 차출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성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분을 주체 못 해 연석의 곁에 있는 엔틱풍 의자를 거세게 발로 찬 뒤 애꿎은 연석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하나도 빼지 말고 똑바로 말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성후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살기를 연석은 똑똑히 목격했다.

“정확히는 코호트 격리되셨습니다.”

“격리라면… 설마…”

이번엔 성후가 저승사자를 만난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네, 말 그대로. 오늘 아침 사망한 첫 감염자를 온 선생님이 부축해서 응급실로 데려왔다고 하더군요. 아직 감염 매개체가 정확히 확인된 건 아니지만, 여러 전파 경로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라…….”

“부축만으로도, 격리조치가 된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성후는 성큼성큼 다시 욕실로 향했다. 어서 씻고 이 부조리를 박살 내겠다는 심정으로.

은명 대학 병원.

가도, 너무 멀리 갔다.

그러니까, 유능하고 직업정신이 투철한 간호사를 그런 식으로 차출시킨단 말인가.

“형님!”

성후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연석이 급하게 소리쳤다.

“사실은, 첫 감염자가 쏟아낸 혈토를 온 선생님께서 다 뒤집어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연석의 말은 곧 정이 되어 성후의 심장을 깨트렸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괴물이 성후를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겨우겨우 정신을 붙잡으며 다시 연석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절망 어린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린다.

“…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어. 한국 갈 준비해.”

얼마 뒤 쏴아-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석이 깜짝 놀라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성후가 주먹으로 벽을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흐르는 물에 새빨간 피가 섞이자, 물감처럼 번지는 모습이 연석을 굳게 만들었다.

“이 빌어먹을 손 때문에…!”

쿵. 쿵. 쿵. 쿵. 쿵!

연석은 겨우 정신을 붙잡고 성후에게로 다가왔다. 까지고, 피로 떡이진 주먹을 막으며 소리쳤다.

“온 선생님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형님한텐 이 손도 생명과 같다고요!!”

성후의 가슴이 흥분으로 들썩였다. 자신이 맛봤던 절망 중 가장 크고 두려운 것을 마주한 탓에 이성을 붙잡기가 힘겨웠다.

이깟 손 따위.

처음 다정이 제게 말했던 것처럼, 저는 적어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다정의 상태는……. 지금 그녀는…….

심연으로 빨려가는 듯 아득한 기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쉽지가 않다. 물에 젖은 얼굴을 하염없이 쓸어내린다. 불현듯 다정의 목소리가 속에서 되살아났다.

‘너무 잘됐어요. 축하해요.’

‘보고 싶으면 언제든 날아오겠죠. 예고 없이 불쑥불쑥. 마성후 씨 특기 아니었어요?’

‘나, 소중해요?

‘그렇다면, 당신을 소중하게 여겨줘요. 그게 날 소중하게 여기는 거니까.’

음성을 밝게 꾸미느라 얼마나 애썼을까. 홀로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까.

“형…”

연석은 조금 후회됐다.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걸 알았을 때 술보다 다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술은 성후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연애는 그의 고난을 잊게 해주고 조금은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주리라 믿었다.

때문에 말로 등을 밀었다.

부추겼다.

“제발….”

오산이었다.

연애는, 사랑은, 홀로 서는 것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 상대로 인해 끝없이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을, 성후를 통해 깨달았다.

“어째서…”

성후가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뉴스엔 나오지 않은 거야.”

“한국 뉴스에만 나오지 않았지. 보도는 되고 있었습니다. 현재로선 언론 통제가 이뤄진 모양인데, 아마 오늘 안에 보도될 것 같답니다.”

“그래 알았어.”

“형.”

연석이 조금 더 힘주어 불렀다.

“자해하지 않을 테니 나가 봐. 준비해.”

“…알겠습니다.”

*

또각또각. 망설임 없는 구둣발 소리가 병원 복도를 크게 울렸다. 어깨에 걸쳐진 코트. 큰 보폭의 걸음을 뗄 때마다 휘날리는 머리와 딱딱하게 굳은 입. 그를 에워싼 공기 밀도가 유난히 높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성후가 찾은 곳은 격리된 무균 병동이었다. 입구는 당연히 통제되어 있었다.

“온다정 선생님 좀 불러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외부인과 접촉 불가입니다.”

병동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도 방호복에 마스크를 낀 차림이었다. 그 모습이 보는 상대로 하여금 위압감을 조성했지만, 성후는 흔들림 없는 곧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가 들어갈까요, 온다정 선생님만 부를까요.”

성후의 말에 깜짝 놀란 건 연석이었다. 그때 사내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사람을 부를 수밖에 없어요.”

난처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태도에서 성후가 누구인지 알아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

성후의 한숨 소리에 연석이 다시 움찔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형님!”

난동은 금물이라는 주의가 담긴 눈빛은 그 여느 때보다 엄하고도 간절했다.

“엽시다.”

막무가내로 다그치는 성후의 곁으로 청원경찰과 경비가 몰려들었다. 사내가 무전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성후의 몸에 손대지 못했다.

그때 연석이 나섰다.

“의료진 중 감염 확정자가 나왔습니까?”

성후완 달리 공격적이지 않은 말투에 사내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직은 나오지 않을 거로 압니다만, 외부 발설은…”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네.”

“숙식은요?”

감정 없는 말투였지만, 역시나 사나운 말투를 상대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 사내가 다시 대답한다.

“식사는 물론 제공되고 있지만, 퇴근은 집으로 하십니다.”

“그렇다는데요?”

연석이 성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난동보단 기다리는 쪽을 택하자는 종용의 눈이다.

성후는 낮은 한숨과 함께 대상 없는 분노를 가까스로 가라앉힌 뒤 몸을 돌렸다. 병원 밖에서 무균 병동이 있는 방향으로 올려다보며 통화 키를 눌렸다.

운이 좋았다.

웬만해선 한 번에 연락되는 법이 없는 다정이 전화를 받았다.

-와우.

천진한 목소리에 목 안이 따끔거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겨우 삼키고 있을 때 다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재중 보고 깜짝 놀랐어요. 완전 스토컨 줄. 이렇게까지 나한테 푹 빠져서 현생은 어찌 챙기나요.

그러면서 웃는 목소리.

-아아. 듣고 계세요? 듣고 계신가요? 마성후 나와라, 오버. 오버.

다정의 밝은 목소리가 성후의 마음을 건드린다. 태연을 가장하는 발랄한 말투에 무력감이 무섭게 성후를 휘감는다.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내가 그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말했어야지. 의지, 했어야지.

참새처럼 연이어 재잘거리는 다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잘되지 않겠지만, 마음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손은 어때요? 매일 매일 좋아지고 있는 거 맞죠?

“다정 씨.”

-네?

심각한 성후의 목소리에 다정의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왜… 괜찮은 척하는 겁니까. 난 하나도 안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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