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미치게, 소중하죠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조치입니다.”
머리로는 이해되었다. 신종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타났고 그 사람과 접촉한 사람이 자신이고 자신에게 만약 문제가 생겼을 시, 자신이 돌보는 환자들마저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말 거라는 것을.
“당장… 가야 하나요?”
힐끔. 다정은 간호사 스테이션을 돌아보았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와 돌보아야 할 환자가 많았다.
“네.”
단호한 대답이 들려오자, 다정은 머리가 핑글 돌았다. 만감 중 단연 커다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전염병이 돌까 봐.
전염병에 걸렸을까 봐.
“온 선생님.”
이마를 짚고 있는 다정에게, 의료진이 나직이 말했다.
“지체할 시간 없습니다. 빨리요.”
그 목소리가 엄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간호사야. 일반 시민이 아니고 간호사. 정신 차리자, 온다정.
* * *
미국까지 날아온 보람이 있었다. 브라이언 아놀드 박사는 성후에게 다소 희망적인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의학에 무지한 사람도 이해에 무리가 없는 설명이었다.
포컬디스토니아에도 경중이 있는데, 심각한 경우엔 손가락 근육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완전히 굳어버린다고 했다. 그렇게 됐을 시, 문제는 훨씬 심각해진다. 피아노는 둘째고 일상생활 자체에 큰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후는 그런 유형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덧붙여, 해당 질환은 ‘뇌’의 소관이기 때문에 근육 재활 치료의 도움은 미미하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뇌’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질환을 데리고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일반 사람들처럼 자유롭게 손을 쓰진 못해도, 얼추 비슷한 수준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을 거란 장담도 잊지 않았다.
즉, ‘뇌’에 착각을 일으키면 병을 부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잘됐습니다. 형님.”
“잘됐고말고.”
성후는 병원을 등지고 제 몸을 더듬었다. 빨간 타탄체크 남방과 경량 구스 조끼를 마구마구 더듬었다.
“뭐… 하십니까?”
연석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내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갔지?”
“아. 차에 흘리셨던데, 가지고 올까요?”
“당장 가지고 와.”
성후는 얇고 널따란 계단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한국의 11월에 비하면 훨씬 따뜻한 날이었다. 찬 기운은 머금고 있지만, 더없이 화창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기분이 날씨를 감별한 건지도 몰랐다.
놓고 있었던 희망.
희망은 입 밖으로 새어 나와, 미소로 번졌다.
성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그 손을 쥐락펴락한다.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아도 돼.
“청춘 영화 코스프레?”
핸드폰을 불쑥 내미는 손길의 주인. 연석이 말했다. 성후는 개의치 않고 크게 웃었다. 연석 따위가 오늘 제 기분을 망칠 수는 없을 터다.
연석은 말 대신 두 손을 오그렸다. 얼굴 역시 매를 부르는 표정이었지만, 오늘은 너그럽게 봐주기로 한다.
“전화 한 통만 하고 밥 먹으러 가지. 전에 갔던 파란 간판의 브런치 집. 거기가 괜찮더군.”
성후가 핸드폰을 슬쩍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때 수란 비리다고 역정을 내셨잖아요.”
“아. 그럼 그 옆에 수프 집이었나 보군.”
“거긴 감자가 텁텁하다고 얼마나 질색을 하시던지. 감자가 원래 텁텁하지, 미끈거릴까 봐서? 어휴.”
연석이 이마를 짚고 까다로운 상사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성후의 발이 연석의 엉덩이로 날아들었고, 뒤이어 얄짤없는 목소리도 날아들었다.
“그럼 맥도날드 햄버거나 먹든지.”
“…!”
“차에 가 있어.”
파리를 내쫓듯 손을 저은 성후가 마침내 통화 키를 눌렸다. 얼마 후 듣고 싶었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연석의 뒷모습도 꽤나 멀어져,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납니다.”
-압니다만. 쿡쿡. 상담은 잘 했어요?
자신의 소식을 먼저 들은 사람처럼, 다정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게 들렸다.
“아무래도… 조금은 호전될 것 같습니다.”
-정말요??
“완치까지는 힘들어도, 잘 다스리고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너무… 잘됐어요….
다정의 목소리가 조금 젖은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웁니까.”
성후의 마음도 뭉클해졌다.
-하하. 설마요. 너무 잘 됐어요. 축하해요!
“그래서 한동안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몰라요. 길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요. 치료에 전념해야죠.
“보고 싶으면 어떡하죠…”
-피. 자가용도 아니고 전용기 가진 남친인데. 보고 싶으면 언제든 날아오겠죠. 예고 없이 불쑥불쑥. 마성후 씨 특기 아니었어요?
분명 웃음이 밴 목소리지만,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감지한 성후다.
“다정 씨 말이 맞습니다.”
-제가 원래 옳은 말을 잘…
“지금 가겠습니다. 목소리만 자꾸 들으니 감질나서 안 되겠어요. 다정 씨 얼굴 한 번만 딱 보고, 한 번만 딱 안아 보고…”
-그건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다급했다.
“……네?”
-너무 뜨겁게 굴지 말아요. 때로는 당장의 것부터 해결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좋아… 하는 사람은요.
“며칠이라도 머물 줄 알았다면… 보고 올 걸 그랬습니다.”
성후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흘러나왔다.
-성후 씨.
“…네.”
갈 수 있어도 갈 수 없다. 다정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다. 더욱이 다정이 바라는 남자가 그런 상이라면.
-나, 소중해요?
또다. 물기 어린 목소리.
“미치게, 소중하죠.”
-그렇다면, 당신을 소중하게 여겨줘요. 그게 날 소중하게 여기는 거니까.
* * *
성후가 미국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니. 오히려 잘 됐다. 며칠이 흐르면, 혈청검사와 DNA 검사 결과 모두 나올 것이다.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치료라는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경험상, 빠를수록 좋다.
그가 좋아서, 그가 보고 싶어서, 같은 연애 감정으로 처신해선 결코 안 된다. 아무리 두렵고 고독해도, 성후를 흔들어선 안 된다. 그건 사랑을 빙자한 이기심이니까.
“그래도…”
보고 싶다.
끓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겹다. 다정은 핸드폰을 가슴팍에 꼭 안다가 UV 소독기에 넣었다. 입고 있는 방호복 안에서 땀이 비처럼 흘렀다. 지쳐서 처지지만, 아직 보편적인 감염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온 선생님, 식사하셨어요?”
특별히 꾸려진 무균 병동 근무를 자처했던 박 간호사가 말을 걸어왔다. 잠시지만, 연애 감정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일순 부끄러워지는 다정이다.
“아뇨.”
“에구구. 이럴 때일수록 드시고 힘내야죠. 의료진이 힘이 있어야 환자도 돌본다고요. 물론, 자동문으로 보급되는 도시락 맛이 끔찍하긴 하지만요.”
“잘 챙겨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박 선생님.”
같은 질병끼리 묶는다는 코호트 격리가 되자마자, 가장 가까워진 사람이기도 했다. 알뜰살뜰, 환자를 비롯한 의료진까지 챙기는 박 간호사를 보며 다정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박 간호사는 중환자실 간호사여서 그런지, 생사가 오가는 갈림길 앞에서도 누구보다 의연하게 대처했고 다정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몇 시간 뒤 질병관리본부에서 방문했다. 그들은 첫 번째로 방문했던 환자가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확진 소식과 함께 바이러스 명을 알려주었다. ‘에번(E.born) 바이러스’라고 말이다.
낯설지 않은 병명에 다정의 팔로 오스스 소름이 끼쳤다. 언제가 뉴스에서 봤던 사람들의 곡소리가 빠르게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두려워할 틈이 없었다.
“의료진들은 잠시 이쪽으로.”
다정을 포함한 의료진들은 철저한 행동 수칙에 대한 교육을 들었다.
웬만해선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 것. 화장실 갈 때도 마스크를 벗거나, 방호복을 벗지 않을 것. 되도록 대중교통은 피할 것. 마스크를 꼭 끼고 다닐 것. 같은 것이었다. 병원에 간이침대가 있는 당직실이 있었지만, 그곳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참 비합리적인 요구사항이었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건, 택시 안에 갇혀 있으란 뜻과 같았다. 자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출퇴근 차량을 지원하지는 않나요?”
다정이 용기 내 물었다.
“서울권에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의료진들을 모시고 다닐 만큼, 병원에 남아도는 인력은 없습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분노를 느낄 여유도 없다.
“방법이 대중교통뿐이라면요?”
다정이 다시 말했다.
“N95 마스크를 끼고 다니면 별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심각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모호해서 더 안일한 대답. 방호복 안에서 은밀히 입술을 잘근 씹는데 박 간호사가 다정의 어깨를 지그시 만졌다.
그 작은 손짓에 위로가 되었다.
“또 질문 있습니다.”
“뭐죠?”
“환자 가족들의 면회는… 어떻게 진행하는 겁니까?”
“당연히 불허합니다.”
단호한 대답에 다정은 침묵을 지켰다.
혹시나 여기 있는 환자 중, 세상을 등지고 가는 사람이 발생하진 않겠지, 그래서 가족을 못 보고 가는 일은 없겠지, 하는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상상을.
“고생했어요.”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일체형으로 된 방호복을 입고 벗기가 불편해 간호사들은 목이 말라도 웬만해선 물을 마시지 않았다.
다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다정이 방호복을 벗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핸드폰을 확인하는 것이다. 물보다 늘 성후가 먼저였다.
[(사진) 날씨 끝내주죠? 다음에 여기 와요. 새로 알아낸 맛집인데 꽤 먹을 만해요.]
예쁘게 플레이팅 된 접시를 들고 환하게 웃는 성후의 셀카 사진이었다. 뒤로는 뾰로통한 표정의 그의 비서도 보였다. 괜히 복받쳐 오른다. 웃음과 함께 눈가가 젖는다. 이럴 때가 아닌데 말이다.
[여윽시~ 완전 잘생겨쓰~ 난 퇴근해요!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둠을 급습하는 범죄자처럼 사람들을 피해 집으로 돌아왔다.
친숙하고 안락한 공간과 허락된 자유에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익숙한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마음을 다졌다.
“좌절하지 말자. 괜찮을 거야.”
에번 바이러스 치사율이 20~55%나 된다는 얘길 들었지만, 기죽지 않고 맞서기로 다짐한다. 간호사가 우직해야, 환자에게도 희망의 빛이 들 것이다.
저승사자와 싸우려면, 각오가 필요했다.
그러나 각오는 바로 다음 날 뿌리째 흔들렸다.
“선생님….”
나이트 근무를 했던 박 간호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첫 번째 감염 환자분…. 오늘 새벽에 사망하셨어요.”
하늘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