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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45화 (45/82)
  • 45화. 폭풍 전야

    다정의 퇴근 시간은 멀었지만, 성후는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주치의와의 상담이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세 번째로 바뀐 주치의지만 병원을 옮길 마음은 없다.

    성후가 알기로도, 이 병엔 큰 방도가 없기에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고 해서 눈에 띄는 차도를 보일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정이 있는 병원이 나았다. 운 좋으면 그녀를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미국이요?”

    그런데 주치의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함께 듣던 연석의 눈도 희망을 품고 빛났다.

    “네. 완치까지는 아니지만, 독특한 방법으로 증상을 많이 완화시킨 박사님이 계시더라고요.”

    “박사라.”

    저가로 제작한 듯한, 검은색 표지의 책을 내밀며, 주치의가 말했다.

    “이거 보십시오. 아직 한국으로 유통되진 않은 서적입니다. 뭐, 미국에서도 유명한 서적은 아니지만, 내용이 꽤 흥미롭습니다. 설득력도 있고요.”

    “이 책이, 그 선생님이 쓰신 겁니까.”

    성후는 불신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네. 브라이언 아놀드 박사님입니다. 일생을 다 바쳐 포컬디스토니아를 연구하신 분이라더군요. 의학계에서 주목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으셨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알아봤더라면, 대응했더라면, 주치의에게 듣기 전에 알아냈을 것이다. 그 생각은 성후보다 연석이 먼저 했다. 연석은 성후의 큰 등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혹시나 해서 지난주에 브라이언 박사님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마성후 씨 진료 자료도 함께요.”

    성후는 주치의 입에 지중하여 경청했다.

    “빠른 시일 내로 내방하시길 희망하시더군요.”

    “당장 오라는 얘깁니까.”

    성후의 물음에 주치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얘기한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진료실을 나와 연석에게 물었다.

    “다정 씨는?”

    성후는 감추는 것을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 감출 마음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드디어 두 사람이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을, 연석은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아침, 며칠 만에 만난 성후의 얼굴은 후광으로 번쩍했다. 분명 밤새 술을 마시느라, 한숨도 못 잤다고 말하면서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피식, 피식, 웃을 때마다 연석의 등 뒤가 괜히 오싹해졌지만, 짐작은 쉬웠다.

    말투도 그렇다.

    자신에게도, 다정을 지칭하는 것도 역시나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알아보진 않았습니다.”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다정이 오늘 근무를 한다는 걸, 이들 중 모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병원 어딘가에 계시겠죠.”

    “흐응…”

    입원 병동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연석의 말이 성후를 붙잡는다.

    “두 분. 만나시는 거죠?”

    성후가 설핏 미간을 구기며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것도 보고 해야 하나?”

    “눈치껏 알았습니다.”

    “그런데.”

    “확인이 필요해서요.”

    이유 있는 물음이 아니란 걸 느낀 성후가 완전히 몸을 돌리고서 팔짱을 꼈다.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네가 뭔데 내 발목을 잡냐는 노골적인 불쾌함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이제 온 선생님은, 그냥 간호사 선생님이 아니니 형님께서 배려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배려라. 그건 또 자신이 못 하는 것이었다. 성후는 조금 더 들을 의지가 생겼다.

    “자세히 말해 봐.”

    “모르시겠지만, 병동은 늘 인력이 부족한 곳입니다. 거기에다 강압적이었다고 해도 위에서 내려온 갑작스러운 선생님 휴가는 동료들에게 치명적이었을 거예요. 담당 의사 입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게 간호사들 역할이니까요.”

    “그래서.”

    “온 선생님은 지금 업무의 파도에 쓸려 계실 겁니다. 어쩌면 동료들의 싸늘한 눈치를 받으면서도.”

    “그건 다정 씨 잘못이 아니잖아.”

    “아니죠. 아니지만, 사회는 그런 겁니다.”

    원래도 딱딱했지만, 오늘따라 연석의 말이 더욱 딱딱하게 들렸다.

    “이렇게 바쁜 시국에, 대뜸 남자친구가 찾아와서 말 몇 마디 시켜보세요. 예전이었다면 ‘마성후 환자가 멋대로 저래요. 난 몰라!’할 수 있었겠지만…”

    연석이 가는 목소리를 내며 새침한 연기를 했다.

    “윽. 다정 씨는 그런 역겨운 말투 안 써.”

    연석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내용 전달에 크나큰 방해물이라 느끼며 인상을 구기는 성후다.

    “어쨌든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죠. 누군가 눈치 준다면, 비난한다면, 선생님 성격에 형님 탓할까요?”

    “흠….”

    “묵묵히 듣고 형님에겐 절, 대, 전달하지 않겠죠.”

    “그러니까 병동에 가지 말라?”

    “네.”

    “그걸 왜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거야.”

    안 봐도 될 발연기 보느라 눈만 버렸네.

    “심플하게 얘기하면 가겠다고 우기실 테니까요. 보고 싶다고 떼쓰실 거니까요.”

    가끔 연석은 성후보다 성후를 더 잘 알았다.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성후가 끙 앓자, 연석이 촌철살인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어른의 연애란 그런 겁니다. 상대방의 입장까지 헤아려서 행동해야 하는. 물론, 헤아려 본 적… 아하. 텐션이 올라 자꾸 입이 방정을….”

    갑자기 사납게 번뜩이며 쳐다보는 성후의 눈빛 앞에 연석은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했다.

    성후가 발길을 돌렸다.

    “기어이 가십니까?”

    “안 가!!”

    성후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연석의 시야에서 벗어나 핸드폰을 들었다. 다정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맴돌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의 시도 끝에도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다.

    “젠장….”

    기역 자 코너에서 불쑥, 연석의 고개가 튀어나왔다.

    “형님.”

    “으에엑!”

    “…오. 놀라셨나 봅니다.”

    이제는 몸까지 마저 튀어나왔다. 괜히 징그럽다.

    “뭐야?!”

    “놀라게 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성공이군요. 그런데 방금, 온 선생님께 전화 걸었던 거?”

    “그런데.”

    “형님 똥줄이 많이 타신 것 같아 정형외과 병동에 다녀왔는데 말입니다. 눈알이 튀어나오게 바빠 보이던데요?”

    “…….”

    “그리고 너무 매달리면 질리는 법입니다. 이쯤 하시고 미국부터 다녀오시죠.”

    “미국이 이태원이냐? 이 새끼는 아주,”

    “그래서 가자는 겁니다.”

    연석이 성후가 계속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익살을 뺀 연석의 덤덤한 목소리는, 묵직했다.

    “그 머나먼 땅까지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형님의 상태를 진단받도록. 별다른 지시가 없었어도 제가 먼저 챙겼어야 하는 부분인데, 면목 없습니다.”

    연석은 답지 않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성후는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차분해졌다. 연석의 어깨를 툭툭 누르고서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 사과하지 마.”

    바로 곁에 있는 네모난 간의 소파에 털썩 앉은 성후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수신인, ‘마이쩡’.

    “마이쭈도 아니고…”

    역시나.

    두 남자의 감동적인 장면이 오래갈 턱이 없다.

    훔쳐보던 연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성후가 팔꿈치로 연석의 배를 강타했다. 빠르고 둔탁하게 말이다. 동시에 윽, 하고 들리는 연석의 신음이 마음에 들었다.

    성후는 흡족한 미소를 입에 걸고 다정에게 보낼 메시지를 입력했다.

    [손가락 박사가 미국에 있답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갔다 와서 만나요.]

    연석은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성후가 쓰는 메시지를 은근슬쩍 다시 훔쳐보았고 몰래 인상을 구겼다. 손가락 박사라니. 읍어 보이게. 쯧.

    성후는 ‘전송’ 버튼을 누른 뒤, 다시 메시지 하나를 더 작성했다. 묻고 싶었던 말을 애정 표현으로 대신한다.

    […쪽.]

    * * *

    “비켜주세요! 응급환자 지나갑니다! 비켜주세요!”

    “선생님 여기!”

    응급실 입구에 있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 빈자리로 안내했다. 협소한 응급실 침대에 중년 남성을 눕힌 뒤, 다정이 소리쳤다.

    “엔도(Endo_내시경)가 급해 보입니다. 상태를 보아하니 랩(Lab_혈액검사)도 나가주세…”

    “온다정 간호사님 되시죠?”

    응급의학과 의사가 건조한 투로 다정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요?”

    “저희가 알아서 진행합니다. 정복부터 갈아입으셔야겠는데요.”

    위급 상황을 숨 쉬듯 보는 의사의 목소리엔, 익숙한 권태가 깃들어있었다. 생사가 오가는 응급실 의사의 초연함이라 볼 수도 있겠다. 혹은, 그에게 더 위중한 환자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아…”

    다정은 무기력하게 피로 얼룩진 정복을 내려다보았다. 이딴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여기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만 가보세요.”

    경비도 힐끔, 안쓰럽게 다정을 쳐다보았다. 의사가 경비에게도 말했다.

    “경비 아저씨도요.”

    “네네.”

    터덜터덜 응급실을 나와, 야속한 응급실 문을 쳐다본다. 경비가 말했다.

    “간호사 선생님 애쓰셨수다.”

    피가 말라붙은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정형외과 병동으로 돌아왔다. 다정을 발견한 동료들이 놀라 물어왔지만, 그녀는 힘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탈의실로 향하는 기분이 몹시 흐리다.

    * * *

    “랩(Lab)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지방간? 고지혈증? 급성 폐렴?”

    추측 가능한 질병을 이것저것 던져보는 교수였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외주를 보내봐야겠는데요. DNA 검사도 필요해 보입니다. 어쩌면… 보건복지부에 신고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무감했던 교수의 얼굴이 신문지처럼 구겨졌다.

    “제 의학적 지식으론 여태 본 적 없는 양상입니다.”

    “결과지 줘 봐!”

    담당 교수가 전문의가 들고 있던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설마, 신종 바이러스?”

    “배제할 수 없지만, 속단하기에도 이릅니다.”

    “일단 외주 넣어보고 결과 나오면 그때 다시 회의를 열도록 하지. 외부로 새어나가면 절대 안 돼. 절대! 가뜩이나 병원 구설이 많아 위에서 예민하니까 말이야.”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일단 격리 조치시켜.”

    “이미 1인실에 입원해 있는 상태입니다.”

    “방문자들도 철저히 단속해. 접촉한 사람은 없지?”

    “그게…”

    그때였다. 교수의 방을 무섭게 두드리는 전공의가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벌컥, 문을 열었다.

    “교수님. 큰일 났습니다!”

    “뭐야!”

    “4-1번 환자와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두 명 더 실려 왔습니다!”

    “뭐??”

    “이번엔 어린아이와 70대 할머니입니다!”

    “…젠장!”

    “어떡할까요.”

    “긴급회의 소집해야겠어. 일단 모두 같은 병동으로 옮기고 접촉한 의료진도 차출 명목으로 격리해! 설명은 오후에 한다!”

    “격리 기준이라면?”

    “말해 뭐 해! 신종 바이러스라면, 비말이나 공기 중으로도 감염될 수 있지 않나!”

    “직접 혈토가 묻은 이들은요.”

    교수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런 사람이 있어?? 뭐 얼마나??”

    “완전히 뒤집어썼습니다.”

    “누구야?!! 의료진?? 가족??”

    “입구 경비랑 정형외과 온다정 간호사입니다. 첫 번째 환자를 부축해서 응급실에 왔다고…”

    교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당장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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