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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44화 (44/82)

44화. 우연일까, 인연일까

명정과 부부지만, 다정의 모친이 주는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물론 그때보다 더 커진 성후의 감정이 이 긴장에 한 몫 더 했을 터다.

“술 좀 하나?”

성후는 몇 초 눈을 깜빡이다 씩씩하게 대답했다.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

조용한 일식집. 생긴 지 오래되어 깔끔하거나 세련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맛이 뛰어나고 단골이 많아 유지되는 가게였다. 또 경환이 다정과 자주 오던 가게여서 이 집 주인과 잘 알았다.

“어? 인물 훤한 총각은 누구예요? 아들도 있었어요??”

인사를 생략하고 환하게 맞이하는 주인에게, 경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 비었습니까?”

무거운 분위기를 읽은 주인이 행주에 손을 슥슥 닦고 나와 정중하게 대답했다.

“<하나> 방이 비었어요. 늘 드시던 대로 세팅할까요?”

“네. 그래 주세요.”

미닫이문을 밀어 열자 좌식 테이블이 나왔다. 좌식 테이블 밑바닥이 움푹하게 들어가 있어 실제론 일반 테이블과 다른 바 없었다.

“앉지.”

경환이 먼저 앉으며 성후에게 자리를 권했다.

성후는 경환을 따라 오는 동안,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질문도 그에 맞는 답도 떠올려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더랬다. 하지만 평온은 찾아오지 않았다. 상상하면 할수록 긴장은 고조될 뿐이었다.

“다정이가 있으면 얘기를 편하게 못 할 것 같아서, 둘만 왔다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말도 좀 편하게 하지.”

“물론이죠. 아버님.”

성후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잠깐의 침묵. 종업원이 들락날락하며 푸짐하진 않아도, 깔끔한 한 상을 차려냈다.

“며칠간 다정이와 연락이 안 되더군. 자네와 같이 있었나.”

경환이 호리병에 든 술을 내밀며 말했고, 성후는 양손으로 도자기 잔을 공손히 받았다.

“네.”

“…어린애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남녀가 만나는데,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아네. 그것도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라는 것도.”

그러면서 제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성후가 얼른 붙잡았다.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꼴꼴꼴. 미색의 맑은 술이 잔을 채웠다. 호리병을 테이블에 내려두고 성후가 말했다.

“걱정시켜서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둘이 있는 게 좋아,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경환은 술을 들었다 다시 내려둔다. 말이 곧 인격이라면, 다정의 남자친구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내였다. 또 어쩌면 솔직함을 무기로, 저도 모르게 주변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딸 가진 자의 욕심이라면, 조금 더 푸근하고 선량한 느낌의 사내를 만났으면 했다. 그래서 다정의 부족한 점이 있다면 너그럽게 안아줄 수 있는 상대였으면 했다.

경환은 생각이 많아졌고 그것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자네는 뜨거운 사람이군.”

성후도 움찔한다. 경환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미래마저 속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네, 그런 편입니다.”

“어떤가. 뜨겁게 달아오르다, 금방 식지는 않는가.”

성후는 잠시 말을 아꼈다. 남이라면, 자신의 기분은 건드리는 질문이었겠지만, 마음에 품은 여자의 아버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겨우 고른 말을 꺼내 놓았다.

“저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억에 까마득할 때부터, 건반을 두드렸습니다. 매 순간 뜨거웠습니다. 그럼에도 조금도 권태로워지지 않더군요.”

“그건 피아노지.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성후는 잔을 쥐고서, 강하게 말했다.

“한잔하겠습니다.”

경환도 마시라는 손짓과 함께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힐끔 시선을 돌리니, 등을 돌려 시원하게 술을 먹는 성후가 눈에 들어왔다. 셔츠 안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이 느껴지는 게, 남자가 봐도 남자답고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정의 남자친구에 관해선, 이미 아내에게 들었었다. 유명인이라기에, 인터넷에서 정보도 찾아보았다. 대단한 집안에다가 멋진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후의 실물은, 실제 그가 주는 분위기는, 그가 가졌다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느낌이었다.

너무 잘났다.

그래서 더 걱정이 앞선다.

“아버님의 걱정은…, 감히 다 알지는 못해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후가 시선을 들어 경환의 눈을 곧게 직시한다.

“다정 씨가 아니면 안 됩니다. 장난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난 자네 마음이 장난일 거라 추측한 적 없었네. 단지,”

경환은 다시 술을 급하게 마셨다. 눈앞에 젊은 청년과 달리, 직설적으로 되기 위해선 술이 필요했다.

“우리 다정이가 만나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의 검증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네.”

“어떤 남자가 되면 될까요.”

성후의 눈이 진심으로 반짝인다. 조금은 찌푸려진 미간에서 애타는 심정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뭐…?”

“남들 눈에 괜찮은 사람보다, 소중한 여자의…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음에 들고 싶습니다.”

“…정말 솔직한 청년이군.”

다시 혼자 술을 따르려는 경환의 손을 제지하는 성후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술잔을 채워주었다.

수려한 얼굴에 듬직한 덩치, 그리고 섬세한 손짓. 직관적이긴 해도 둔한 사내는 아닐 거란 느낌이 들었다.

“우리 다정이는 말일세…”

술 위로 동동, 어린 다정이 방긋 웃는 것이 보였다.

“우리 부부가 힘들 때 낳은 딸이라네. 나는 죽어라 성실히 살아도 일이 풀리지 않았고 아내는 없는 집에 시집와, 미용실 허드렛일을 거들며 기술을 배웠네. 형제는커녕, 다정이를 키우기도 힘든 입장이었지. 가난이, 그래. 가난이 참 무서웠어.”

경환은 술잔을 만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시골에 사는 어머니에게 어린 딸을 맡겨두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딸인데 저 홀로 저리 잘 컸어. 착해. 바르고. 사람들에게도 잘하지만, 부모에게도 참 잘하지….”

“제가 봐도, 간호사가 천직인 사람입니다.”

성후의 말에 경환이 움찔한다.

“자네. 우리 다정이가 왜 간호사가 된 줄 아나?”

“잘… 모릅니다.”

“무탈하게 컸지만, 다정이는 꿈이 없었어. 어릴 때부터 현실이 어떤 건지 알았던 아이라, 꿈다운 꿈을 꿔볼 겨를도 없었던 거야.”

말을 뱉는 족족, 다시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경환의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가 간호사가 되겠다고 하더라고.”

성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유를 물었지. 어려서부터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를 도우며, 보람을 느꼈다고 하더군. 할머니처럼 아픈 사람을 많이 돕고 싶다고 했지. 기특했어.”

성후도 퍽 그녀답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군. 언젠가 다정이가 친구랑 전화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네…. 그때 딸아이가 말했어. 취업 걱정도 없고 원서비도 싸서 지원했다고.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말이지.”

“…!”

“그때 나는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렸네. 저 어린 것이 세상에 나가도 보기 전에, 이미 타협을 한 거야….”

“하지만 다정 씨는 지금 누구보다 훌륭한 간호사입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도 책임감도 느끼고 있고요.”

“알지. 간호사로 취직하고 현장에서 사명감이 생긴 모양이더군.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 시작점은, 무능한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경환은 다시 술을 한잔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자. 그럼 그 영리한 딸이, 두 번째로 타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성후의 머릿속에도 유추해볼 수 있었다.

“결혼… 입니다.”

“자네를 만나는 게 타협이라고 생각하나?”

승복이라고 생각했다. 밀어내면서도, 결국 커지는 감정을 받아들인 승복.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됐네. 아껴주게. 만나는 동안, 진심을 다해 위해주고 예뻐해 주게.”

더 예뻐해 주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는 말은, 삼켰다.

“네.”

두런두런. 술이 세 병째 비워지면서, 꽤 많은 얘기가 오갔다. 성후는 수험생의 마음으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거의 경환의 말을 듣는 입장이었고 종종 자기 검열을 끝낸 소신을 드러내곤 했었다.

주제는 다정이었고, 그녀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인지. 얼마나 귀한지. 얼마나 영리한지. 그리고 부모로서 얼마나 미안한지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언젠가 해외여행을 갔다가… 다정일 잃어버린 적이 있었거든. 다정이가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가려던 때였어.”

“놀라셨겠습니다.”

성후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철렁했고말고.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처음 가본 해외이지 않나. 요란한 옷을 입은 퍼레이드에 정신이 팔려 그걸 그대로 따라갔던 거야. 아직도 잊을 수 없어. 그때 다정이 옷차림까지 생생해. 어여쁜 원피스 위로 하늘색 니트를 겹쳐 입었었지. 그날 아침에 치마 같은 거 입기 싫다고 통 난리를 부렸었거든.”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어 보이는 경환이다.

순간 성후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온다. 그리고 떠오르는 조각난 장면들. 머릿속 퓨즈가 수없이 깜빡거렸다.

“그… 해외라는 곳이 어딥니까.”

물으며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럴 리가 없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때, 경환이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서 거기에 꼭 어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프라하.”

* * *

다정은 한숨도 못 잤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니까, 실수 같은 것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다정은 언제나 신사적인 부친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아빠일 때 얘기다.

“하아….”

다행히 성후의 연락 한 통이 와 있었다. 전화는 아니고 문자였다.

[아버님과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이따가 전화할게요. 출근 잘 해요] 05:07.

대체 언제 헤어진 거야. 얼마나 마신 거야.

부드럽지만,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정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출근길로 나섰다.

병원으로 돌아오니, 잠깐 성후가 잊혔다. 병원 입구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딴 입간판 때문이었다. 로비 안으로 들어와 시선을 들자, 제 얼굴이 프린트된 플래카드가 높이도 걸려있었다.

「가족처럼 따뜻한 병원, 은명 대학 병원. 모든 환자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하….”

숨이 턱 막혀왔다. 이러려고 휴가를 보내준 거였어?

우선 병동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뛰어다닌 터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동료들. 산처럼 쌓인 차트.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신규 입원 환자. 입간판이나 플래카드에 관해 물을 새도 없었고,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겨우 화장실을 들릴 여유가 되었다. 때마침 성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다짜고짜 말했다.

-만나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후의 말을 들으며, 화장실 조그마한 창밖을 내려다보는데, 비틀거리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어머…!”

-다정 씨. 듣고 있습니까?

남자가 휘청거리며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일단 끊어요!”

다정은 급하게 전화를 끊고 비상구로 달렸다. 누리가 잠깐 불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일 층으로 황급히 내려가자, 환자가 기어오듯 힘겹게 병원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 발견한 경비와 다정이 재빨리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괜찮으세요??”

다정이 능숙하게 남자의 겨드랑이 밑을 받치며 제 어깨 위로 손을 둘렀다.

그때였다.

“욱, 욱…!”

남자가 피가 섞인 토사물을 다정의 옷 위로 쏟아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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