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43화 (43/82)
  • 43화. 부모의 마음

    “뭐 한다고 며칠째 연락이 안 돼. 전화기는 왜 또 꺼져 있어. 계집애. 세상 환자 저 혼자 다 돌보는 줄 알겠네.”

    답답해진 명정이 가슴을 몇 번 두들기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고객이 왔음을 알려주는 벨이 울렸다. 누구인지 보기도 전에 화사한 미소가 먼저 지어졌다.

    “어서오… 우석아!”

    명정의 눈이 반가움으로 크게 떠진다.

    “어쩐 일이야? 이발하려고?”

    “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이리로 앉아.”

    우석이 의자에 앉자, 명정은 손에 익은 커트 보를 탈탈 털며 우석의 몸에 둘렀다.

    “어떻게. 시원하게 밀어줘?”

    “네. 그냥 깔끔하게요.”

    우석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느낀 명정이지만, 이미 다 자란 우석을, 어린아이 취급할 순 없었다. 아직 속없는 승주면 모를까. 우석은 명정이 보기에도 근사한 사내로 자랐다.

    “다정이 연락돼?”

    수다의 물고는, 자신이 먼저 트는 쪽이 맞다 여겼다. 원체 말수도 없는 우석인 데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연락을 안 해봐서.”

    거울 속 우석의 눈동자가 명정을 바라보며 단정하게 대답했다.

    “하긴. 걔가 연애하고 나서부터 연락이 뜸해. 바쁘다 이거지. 원래 사랑이 또 사람을 미치게 하잖아. 후후.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아….”

    “다정이 남친 봤니?”

    물이 든 스프레이를 분사하며, 발랄하게 물어오는 명정이다.

    “…네.”

    “근사하지? 상대방도 나이가 있을 테니, 장난삼아 만나는 건 아니겠지? 음. 아닐 거야. 우리 다정이가 알고 보면 얼마나 매력 덩어린데~. 너희는 같이 자라서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오잖아. 안 그래?”

    “그렇죠. 그런데 어머님에게 인사도 시켰어요? 남자친구.”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했던 우석이다. 감정이 없는 건 아닌 듯 보였지만 아직 확실한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셋이 함께 있었던 순간들을 집요하게 곱씹어 보았더랬다.

    성후는 다정을 놀리고, 다정은 일렁이는 감정을 추스르며 당황해 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반적인 연애라면, 조금 더 안정적인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다.

    또.

    힐끔. 명정의 눈치를 보던 우석. 명정이 입 모양으로 왜? 라고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님에겐 죄송하지만, 세상의 기준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성후에 비하면 다정은 평범하고 또 평범했다. 그런 다정의 마음을 뒤흔드는 마성후. 과연 진심일까. 혹, 다정이 상처만 받고 끝나는 관계가 되는 아닐까.

    “네가 보기엔 성후 씨 어땠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가위질하던 명정이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일순 가위질이 멈춘다.

    “뭘 모르겠는데?”

    친절한 음성이지만, 묘한 불안이 베여있었다. 거기에 휘둘릴 우석이 아니다.

    “마성후 씨 마음이요. 진심인지, 어떤지. 저는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콕 짚어 말하지 않았지만, 우석이 말하는 의미를 단박에 알아챈 명정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다분히 합리적인 걱정이, 꼭꼭 숨겨 두었던 마음속 계산기를 두드리게 했다.

    명정은 다정을 시집보내기 위해, 딸의 견적 아닌 견적을 꽤 많이 내보았다. 다정이 만날 수 있는 남자의 기준은 잘나도 대기업 회사원이나 회계사 혹은 공무원 정도였다. 그런 다정이 세계적인 재벌 집 아들과 만남을 시작했다니. 마냥 좋다고 방관할 일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으흠….”

    우석이 움찔했다. 저 역시 다정의 소식을 듣고 싶어 왔던 명정의 미용실에서, 괜히 그녀의 어머니를 걱정하게 만들었단 자책이 들었다.

    생각이 짧았다.

    “저의 짧은 생각일 뿐이니, 어머님은 너무 괘념치 마세요.”

    그 순간 우석이 참 듬직해 보였다. 동시에 그럴수록 우석의 말에 신뢰감이 실렸다.

    하지만 명정은 생글 웃으며 마음을 숨겼다.

    “그럼. 걱정 안 해. 어련히 알아서들 할까.”

    굳이 우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불안한 건 사실.

    우석이 떠난 후, 명정은 급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

    -음?? 왜? 무슨 일 있어??

    “다정이가 연락이 안 돼요!”

    -난 또…. 다 큰 애를 걱정하고 그래.

    빌미일 뿐인 핑계를 들이밀며 명정이 알고 싶은 것은 한 가지. 딸의 연애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새 이별하고 어딘가에 홀로 아파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해야 할 터이다.

    “다 커도, 딸이잖아요. 세상도 흉흉하고. 일 마치는 대로, 다정이한테 가 봐요. 네?”

    미용실은 영업 종료 시각은 아홉 시. 가게에 매인 명정이 할 수 있는 건 남편을 재촉하는 일뿐이다.

    -오늘 중이나, 늦으면 내일 낮에라도 가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이따 전화하지.

    * * *

    날씨는 한국의 초봄과 비슷했지만, 성후의 요새 안은 따뜻했다. 계절을 망각한 해가 통창 유리를 관통하자 다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모이는 미간이 사랑스러워, 그대로 관망할까 싶던 성후는 인심을 쓰기로 한다.

    성후는 해를 등진 채로 다정의 곁에 누워있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에 알맞은 그늘을 만들어주자, 다정의 미간이 점점 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똘똘한 성격과 꼭 닮은 아치형의 눈썹과 과하지 않게 오뚝하면서 작은 코. 조금 도드라진 윤기 나는 광대. 적당히 얇은 입술. 가만히 있어도 올라가 있는 예쁜 입꼬리.

    흔히들 말하는 인형 같은 이목구비는 아니었다. 눈이 동그랗게 크지도, 코가 아찔하게 높지도, 입술이 도톰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다정은 예뻤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눈이 부시게 예뻤다. 해를 가려도, 이미 태양을 머금고 태어난 여자처럼 주변도 환히 밝혔다.

    “예쁘다….”

    턱을 괸 채로 유심히 바라보던 성후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뚫어지겠어요.”

    다정이 눈을 감은 채로 느리게 말했다. 자다 깬 첫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관능적이었다. 조금은 허스키하고, 조금은 낮은 사적인 목소리.

    아마 지금 이 음성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세상의 저 혼자뿐일 거란 우월감이 성후를 급습했다.

    “깼습니까? 더 자지.”

    그제야 다정이 느리게 눈꺼풀을 올렸다. 매일 잠을 제대로 재우지 않아, 조금은 부은 얼굴이 영 앳되어 보인다.

    “갑자기 배려남인 척. 그럼 일찍 재우면 되잖아요….”

    여전히 졸린 눈을 하고서 검지로 성후의 코를 콕 집는 다정이다. 이내 눈을 반달로 휘며 예쁘게도 웃는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정이 다시 피식 웃는다.

    “언제까지 불가능할까요.”

    성후가 바짝 다가와 몇 초간 지그시 바라본 뒤, 짧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에 행복이 번진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한.”

    “연애가… 불면이 동반되는 거군요….”

    느릿느릿 말하는 말투가 몹시 사랑스럽다. 그녀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안도감 혹은 짜릿함도 함께 들었다.

    “음, 나는. 시작도 전에 불면을 겪었습니다. 걱정돼서, 안달 나서, 가지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부끄럽지 않으세요? 그런 얘기.”

    “더 말할 수도 있는데. 꿈속에서 당신과 얼마나. 어떻게 뒹굴었는지에 대해. 너무 생생해, 잠에서 깨고 나면 늘…”

    “그만!”

    역시. 잠 깨우는 데는 마성후만 한 게 없다. 알람 소리보다 훨씬 강렬한 그의 음담패설에 단박에 수마가 물러났다.

    “씻어야겠어요!”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푹 누웠다. 햇살이 고스란히 밝히는 나체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또 두려웠다. 능글맞게 웃으며 저를 보고 있는 저 남자가, 또 자신을 덮칠까 봐서.

    이곳에 온 뒤로, 하체는 계속 뻐근한 상태였다. 작열감에 더는 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이끌면 거부할 수 없었다. 벌써 며칠째. 자고 먹고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밤낮이 없으니 시간 개념도 흐려졌다.

    다정은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

    “진짜로 안 돼요.”

    성후가 잠시간 생각하는 듯 혀로 입술을 핥다 이내 끄덕인다.

    “…오케이. 먼저 씻고 오겠습니다. 이제 한국으로 가야 하니까.”

    “휴….”

    “휴?”

    그의 잘생긴 눈썹이 삐뚤어진다. 그의 마음마저 삐뚤어질까 다정이 헉하고 숨을 삼켰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성후가 어깨를 가늘게 떨며 웃었다. 웃음은 곧 커져, 침실을 가득 채웠다.

    시원하게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자 다정의 얼굴이 멍해졌다. 늘 봐도 수려한 외모가 넋을 잃게 만든 것이다.

    그때 성후가 큰 손을 내밀어 다정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대체 그런 귀여운 건 어디서 배운 겁니까.”

    “하지 마요…”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가 그의 손에 완전히 산발이 되었다.

    “큭큭큭…”

    잔악하게 웃던 그는, 이불 위로 리모컨을 툭, 던졌다.

    “씻을 동안, 잠 깨고 있어요. 재미없는 프로그램들뿐이겠지만.”

    “바다 위에서 방송을 본다니. 전파가 닿는다니. 그저 신기하네요.”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모니터. 한 번도 켜볼 생각을 못 했던. 성후가 욕실로 사라지고 다정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겨냥했다. 마침 뉴스가 나왔다. 앵커의 목소리와 함께 곧 화면이 전환됐고 초록색 눈을 가진 기자의 목소리는 몹시 심각했다. 기자는 커다란 병원 건물을 등진 채 가열차게 떠들었다.

    “어…?”

    다정의 분야이므로 절로 집중되었다. 영어라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자막을 열심히 따라 보며 내용을 이해하려 애썼다.

    “에번(E.born) 바이러스?”

    사람들의 우는 소리.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 공포에 질린 시민 인터뷰.

    다정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낯선 명칭인 것으로 보아, 신종 바이러스가 분명하다.

    “테러라도 일어났답니까?”

    수증기와 함께 욕실에서 나온 성후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걱정은 텔레비전 세상이 아닌 다정에 한한 걱정이었다.

    “아, 아니에요.”

    경직된 얼굴을 풀고 웃어 보이는 다정이다.

    “저도 씻고 올게요.”

    어쩐지 건드리기 힘든 분위기가 그녀를 아우르고 있다.

    *

    “나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어요.”

    비행기 창 밖을 내려다보던 다정이 조금은 섭섭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후는 다정의 어깨에 턱을 괴고서 말했다.

    “또 오면 됩니다. 내 섬은 도망 안 가니까.”

    동화 속 세상과 안녕 하는 시간.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는 걸 알지만, 이 남자와 함께라면 영원히 꿈속에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 다음에는, 섬에만 있지 말고 재미있는 일도 해요. 다른 곳에 구경도 가고. 길거리 음식도 먹고.”

    때문에 낙관적으로 미래를 얘기할 수 있었다.

    “나는 재미있었는데. 당신이랑 잠들고 눈 뜨는 생활.”

    그러면서 씩 웃는 성후의 입꼬리. 하지만 공정한 시선은 진심을 말한다. 두근두근. 그가 주는 울림이 다정의 속에서 공명하게 커져만 간다.

    * * *

    “그래, 다 왔다니까. 다정이랑 통화했어. 아, 어제는 내가 바빠서 못 왔고, 오늘은 약속 잡고 왔으니까 어긋나지 않을 거야. 뭘 집에 들어가. 그래도 엄연히 딸내미 집인데. 아 그러니까 그건… 여보, 이따가 전화합시다.”

    저 멀리, 검은 세단에서 다정이 내리는 것을 발견한 경환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체구가 큰 남자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다정.

    저벅저벅. 경환은 핸드폰을 파카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정에게로 향했다.

    사실은 어제도 이곳에 왔었다. 딸 아이는 만날 수 없었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아내의 걱정이 더 깊어질 성싶어 하얀 거짓말을 했다. 오늘은 일도 접고 아침부터 다정의 집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행여라도 종적을 알 수 없으면 내일은 병원으로 찾아갈 심산이었다. 그다음은 상상도 하기 싫지만, 실종 신고라는 순서가 남아있었다.

    “다정아.”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 안도가 되면서도, 화가 났다.

    “…아빠?”

    세상 모든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늘 온화하기만 하던 경환이 표정이 침잠하다. 아무것도 어려있지 않은 표정에, 굳은 입매가 평소의 그라고는 여길 수 없었다.

    “남자친구니?”

    차분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다정은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였다. 묘한 기류를 읽은 성후도 재빨리 몸을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마성후입니다.”

    성후보다는 한 뼘은 작은 키. 고개를 들어 가만히 자신을 직시하는 경환의 눈빛 앞에 식은땀이 쭉 났다. 경환의 입이 열렸다.

    “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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