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가 허락한 침대에서
거짓말 같았다. 늘 흐르던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눈을 떴을 땐 늘 보던 곳이 아니었다.
도착한 곳은 롱아일랜드 파밍데일의 리퍼블릭 공항.
활주로를 달리는 경비행기가 보편적인 상식보다 크게 진동하며 울렸다. 조금 무서워진 다정이 약하게 몸을 떨자, 성후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조금 더 길고 상냥하게 위로해줄 법도 한데, 그다웠다. 성후는 오랫동안 이러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고목처럼 빳빳하고 우직하게 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사람들이 흔하게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기 때문일까?
다정의 대답은 ‘No’였다.
“가죠.”
마성후의 곁에 있다는 것은, 그 무엇이든 통과할 수 있는 황금 키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오늘 병원에서만 보던 친숙한 나이론 환자가 아니라, 세계적인 부호의 아들이었고, 당연한 듯 그것을 누리며 살아온 이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공항 밖은 황량했고, 택시도 부족했다. 성후는 익숙하게 두 배의 요금을 지불하고서 목적지를 말했다. 롱아일랜드 해협에 도착했다.
녹초가 된 다정은 은근히 그가 안락한 방으로 이끌길 바랐지만, 성후는 묵묵히 해변을 거닐었다. 드넓게 펼쳐진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는 것을 바라보던 성후가 다정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새 핏빛 하늘이 두 사람을 껴안았다. 넋을 놓고 보게 될 만큼, 근사한 하늘이었다.
저를 따르던 다정의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느낀 성후가 씩 웃었다.
“여긴 이 시간 때 하늘이 멋지거든요. 여행자들은 곯아떨어질 시각이라, 유명하지는 않죠.”
“…확실히. 예쁘네요.”
당장의 목적지는 요트항. 하지만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성후다.
“숙소… 가는 거 아니었어요?”
요트항에 도착해 다정이 물었다.
“숙소 같은 거 예약해둔 적 없습니다만.”
“그럼 여긴 왜 왔어요…”
다정은 당황스러웠다. 아직 새벽이라 말할 수 있는 시각. 요트항은 당연히 텅 비어 있었다. 성후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그 여느 때처럼 태연했다.
대책 없이 따라온 미국 북동부.
그때, 성후가 개구쟁이처럼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대책 없어 보이는 이 남자.
다정이 한숨을 푹 내쉬다가, 아담하고 하얀 요트에 풀쩍 오르는 성후를 보며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다정은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조그맣게 소리쳤다.
“마성후 씨! 뭐 하세요! 빨리 와요!”
나쁜 짓을 하다 곧 들이닥칠 어른을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다급한 외침이었다. 저는 애가 타들어 가 미칠 것만 같은데, 성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타요. 태워 줄게요.”
다정의 얼굴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진심?”
“완전 진심.”
웃음을 뚝 그친 성후의 얼굴은 ‘완전 진심’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다정이 누군가. 올곧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대한민국 열혈 여성이 아닌가. 법을 위반하는 짓은, 그녀의 상식으론 무리다.
“…드디어 미쳤어요?”
다정은 의심 없이 확언했다. 그녀의 머리 옆으로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손이 있었다.
성후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국제적 도둑이 되고 싶진 않네요!”
공범이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성후가 훌쩍 다정에게 다가왔다. 턱,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달렸다. 다정도 타의로 달리게 되었다. 성후는 지체 없이 도움닫기를 시도했고 얼떨결에 다정도 함께 뛰어올랐다. 결과적으로 요트에 안착.
흔들흔들.
파도가 없는 바다지만, 갑작스러운 무게가 실리자 크게 울렁거렸다.
다정은 성후의 품에 안긴 채였다. 바들바들, 겨우 중심을 잡고 있는데 위에서 평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보트입니다.”
다정이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세 사태를 파악한다. 하긴, 전용기도 있는 집안인데, 이런 째깐한 요트 하나 없을까.
“운전 습관이 별로라, 메스꺼워도 참아요. 금방 도착할 테니까.”
“자, 잠깐. 운전은, 할 줄 알고요?”
다정의 목소리에 불신이 가득했다. 성후는 태연히 제 턱을 긁으며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글쎄. 면허 따고 이제 두 번째 운행인가.”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이었다. 순식간에 소름이 끼친 다정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내릴게요. 그럼 다녀오세요.”
꾸벅 묵례하고 돌아서는데 성후가 그녀를 운전석 옆으로 앉힌다. 요트 실내엔 작지만 안락한 테이블과 소파 등도 보였는데 굳이 옆에. 바람과 두려움을 모조리 맞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말이다.
“쫄지 말아요.”
“어떻게 안 쫄아요?”
노려보는 눈이 살벌하면서도 귀엽다. 성후의 눈에 다정의 감정 변화는 귀여움 그 자체였다. 정복에 갇힌 감정이 개방되는 이 순간, 다정을 대신한 자유를 성후가 느꼈다.
“내 이성 건드리면 무사하기 힘들 텐데.”
“…….”
다정은 턱을 다물지 못한 채 성후를 올려다보았다.
“안 죽으니까, 견딥시다.”
뭐든 견디고, 뭐든 참으라고 말하는 남자다. 한결같이 불친절하면서도 어쩐지 저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느껴졌다. 이기적인데 치명적인 남자.
다정은 반박하지 않았다. 조용히 입술을 짓이길 뿐이었다.
그가 말없이 병원을 떠났을 때부터, 다정은 이미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섭섭함을 넘어 상처받았고 동시에 그가 보고 싶었다.
지친 하루의 끝에 성후가 자신에게 날아온 밤, 다정의 마음은 상처를 뒤로 물리고 열렬히 환영했다.
간절히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성이 상실된 것이다.
어딘지도 모를 목적지로 가는 동안, 마치 거센 바람이 다정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성후는 시원하게 웃었다. 펄럭이는 코트 깃과 흩날리는 머릿결. 떠오르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까지 더해지자 언젠가 봤던 광고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주연은 단독이고, 남자다.
“별로 안 무서웠죠?”
그레이트 아일랜드라는 아주 작은 섬에 도착했다. 너무도 작아, 한눈에 담겼다. 실제로 이 섬은 도보로 한 바퀴 도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바다 위에 웅장한 저택 하나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생경하고 신비했다.
“여기가… 숙소예요?”
다정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따랐다. 성후는 무심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럼요? 잠깐 들렸다가, 저희는 또 어딘가로 가는 건가요?”
완전히 파김치가 된 다정은 이곳이 서울역이래도 당장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피로를 똑똑히 목격한 성후. 잘도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생각에, 다정이 퍽 기특하게 느껴졌다.
성후는 웃음을 참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자고 갈 겁니다. 온다정 씨 휴가 끝날 때까지.”
“네??”
성후의 말에 어폐가 있다고 느낀 다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예쁜 미간을 검지로 밀어주며 성후가 말했다.
“숙소는 아니고, 별장. 음, 내 소유의 섬이라면 좀 쉽게 이해가 쉽겠습니까.”
다정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개인 소유의 섬?? 우와…!”
“지금 이런 것에 놀랄 때가 아닐 텐데.”
다정은 성후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았다. 미국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하얀색 목조 건물에 진회색 지붕이 덮어져 있다. 온 저택이 테라스로 빙 둘려 있고, 산책로, 적당한 크기의 수영장, 작은 공원 등. 확실히 분위기는 리조트보다는 단독주택에 가까웠다.
다른 건,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사실 뿐.
“진짜 어마어마한 부자군요…!”
다정이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자, 성후가 볼 안을 은밀히 훑었다.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이다.
“온다정 씨.”
그가 낮게 다정을 불렀다.
“네, 마성후 씨. 우와, 와… 와…”
감탄을 연발하는 다정의 시선은 여전히 작은 섬에 꽂혀 있는 상태였다. 내딛는 걸음도 저택에 홀린 영혼 같았다.
성후는 우뚝 선 채, 제 미간을 긁으며 말했다.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알려줄 게 있습니다.”
그제야 빙글, 몸을 돌린 그녀다.
“네?”
성후를 바라보는 눈이 서 대양의 바다를 머금은 듯 투명하다.
“여기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난폭한 운전자가 모는 요트밖에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군요.”
“…왜 날 긴장시키려 드는 거예요?”
다정도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저의가 뭐냐고 묻는 눈빛은 열기를 머금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성후는 다정의 불안을 읽었음에도 유유히 직격탄을 날렸다.
“남자와 단둘이…. 아니. 나와 단둘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그건 내가 너무 자존심 상하니까.”
성후의 경고가 이런 의도였다면, 그는 천재다.
다정은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주변 광경이 기억에 남질 않는다. 아홉 개의 침실과 두 개의 주방과 두 개의 욕실이 있는 이 저택 안에서 각기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앉았을 땐 날카로운 긴장감이 다정의 목덜미로 단단히 박힌 채였다.
갑작스럽게 오게 된 지구 반대편. 이름조차 낯선 섬. 다정은 여벌 옷이 없어, 예의 사악한 미소를 짓던 성후가 건넨 샤워 가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하얀색도, 비치는 소재도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크게 의미가 없을 거란 직감이 들지만 말이다.
와플 면으로 된 푸른색 샤워 가운을 걸친 채, 허락된 침대에 앉아 있자 같은 샤워 가운을 입은 성후가 곧 나타났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맘껏 헝클어트리며 나타난 그가, 말간 얼굴의 다정을 발견하고서 웃는다.
“씻으니 더 예쁘네.”
또. 반 토막 난 혀는 혼잣말을 가장한다. 다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성후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다.
그래, 그런 긴장. 그의 가늘어진 눈매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성후가 털썩, 다정의 곁에 앉는다. 침대가 조금 울렁인다. 다정의 심장처럼.
성후가 손을 뻗는다. 느리게 다정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촌스럽게 허락 구하지 않을 겁니다.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뜻이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진짜로 다정이 원했던 것은…
“하지만 모든 일엔 순서가 있겠죠.”
다시 부드럽게 뺨을 쓸던 성후가 웃었다.
“온다정 씨 입으로 말해 봐요. 나랑 뭘 하고 싶은지.”
잔악한 남자. 다정이 꿀꺽, 침을 삼킨 뒤 용기를 입 밖으로 뱉는다.
“연애요. 보고 싶은 마음이, 당신에 대한 호기심이, 걱정으로 무너지는 심정이, 그런 내 입장이, 이제는 그만 모호해지고 싶어요.”
“또. 더 말해 봐요.”
귓바퀴를 훑고 지나가는 다정의 말이 너무나 달콤해서, 성후는 한 번 더 재촉했다.
“처음에는요.”
다음으로 흘러나오는 다정의 말이 압권이다.
“그저 양아치인 줄 알았어요.”
뜨끔한 성후가 이내 재미있다는 듯 가늘게 웃는다.
“지금은요.”
“그냥 내가 원하는 남자. 내가 섭섭하면, 그것을 그대로…”
다정이 날카롭게 성후를 노려보며 말한다.
“쏟아내고 싶은 상대.”
노려보지만,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눈이다. 그녀의 고백에 성후는 전율이 흘렀다. 심장 고동은 이미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가빠진 상태였다.
“후…”
“마성후 씨는 어때요. 내가. 좋아요?”
이걸, 내 입으로 묻게 만든다니.
성후가 느른한 얼굴로 시인한다.
“알다시피, 저 그렇게 신사는 못 됩니다.”
말해 무엇하리. 다정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이번엔 다정이 그의 말을 들을 차례였다.
“예전에 모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내 생에 그토록 참아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조금은 원망하는 듯한 성후의 말투에 다정은 입술을 짓이겼다.
예상했었다. 그 밤의 기억도 없었지만, 몸에도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숙취로 지배당했던 몸으로,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쉽게 답이 나왔다.
진짜로 그에게 안겼던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또 전에 말했듯, 몸 쓰는 걸 즐기는 놈입니다. 그런 내가, 이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참았는지 모릅니다. 병원에서도 몇 번. 아니, 당신을 볼 때마다 수도 없이 참았습니다. 그건, 다른 의미에선 고문이었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놈은 괴물이다. 다정에게 향하는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는 속박되었다. 그녀를 꺾지 않는 선에서 지키고 아끼고, 때를 기다리도록 만들었다.
“그… 참았다는 게…”
“당당하게 안고 싶어서요. 그러기 위해선 반듯한 온다정 간호사와는 관계 정립이 우선이겠죠. 또, 물릴 수 없는 장소와 로맨틱한 분위기도 필수 요건이겠고요.”
그 순간, 성후가 훅 가까이 다가와 코가 닿는 거리에서 말했다.
“바로 지금처럼.”
기어이 입술이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