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40화 (40/82)

40화. 그가 선물해준 이 밤

“휴가받았다고요.”

성후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말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놀라 조용한 줄 알았는데, 곧 예상외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벌써 적응했어요?”

-적응이요?

“나요. 마성후라는 인간한테. 아니면 벌써 내가 뻔해졌습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저는 여전히 당신을 모르겠어요. 하나도요. 한번도 제대로 가르쳐 준 적도 없잖아요. 가르쳐 줄 의무가 없다고 할까 봐, 묻지도 못하겠어요.

다정의 목소리에 안도와 함께 희미한 원망이 깃들었다. 성후의 기분이 이상해진다. 다정의 감정을 눈치챘음에도, 그녀가 어째서 이런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후는 늘 제멋대로 살아왔다. 그를 상대하는 여자들은 언제나 수동적이었고, 작게라도 불만을 토로하는 순간 바로 이별을 맞았다. 애초에 여자라는 상대에게 정성을 쏟아본 적이 없으니 그 복잡한 마음에 대해서도 배운 적이 없는 것이다.

생경한 감정에 끌려 무식하게 돌진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정을 서운하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성후가 파악한 다정은, 기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기분을 드러냈다는 말은, 그 원인 바로 자신이라는 뜻이 된다.

“말해 봐요. 왜 기분이 나쁜지.”

성후는 평이하게 말했지만, 심장은 그러지 못했다. 덩치만 컸지, 여자 마음 하나 제대로 못 봐주는 당신 같은 남자, 이젠 질렸어. 연락하지 말아요, 같은 말이 돌아오지는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으로 조그마한 창밖의 하늘을 내려볼 때였다.

-너무도 불친절한 당신을…, 알고 싶어요.

그런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 불안으로 흔들리던 성후의 세계가 차차 고요해진다. 그리고 뚜렷이, 다정의 존재를 심장으로 느낀다.

성후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마치 그녀가 제 앞에 있기라도 하듯이.

“알려줄게요. 내가 어떤 놈인지.”

다정에게로 향하는 전용기 안. 유능한 비서가 어젯밤 보지 못했던 다정의 방송분을 건넸다. 17인치 노트북 화면 안에는 다정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편집도 깔끔해다. 절제한 자막, 빠르지 않은 장면 회전, 나긋나긋한 내레이션. 모르는 이에겐 얼핏 지루하게 보일지 몰라도, 성후는 다정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꼭 종일 다정을 쫓아다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그녀가 하는 일을 알 수 있어서도 좋았다.

“아…. 이 감독….”

환자를 보며 웃는 다정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클로즈업. 모두가 아는 것이다. 다정의 꾸밈 없는 웃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소도 근사했지만, 격의 없이 코를 찡그리며 화창하게 웃는 모습은, 그래서 바짝 올라가는 광대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얼마나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지.

“연석아.”

방송을 세 번째 돌려 보고 있을 때, 비행기가 착륙한다는 안내를 들었다.

“네, 형님.”

“이 방송, 시청률이 얼마나 돼?”

“6%라고 들었습니다.”

“젠장.”

“왜 그러시죠?”

성후는 심각한 인상으로 말했다.

“온다정 씨가 얼마나 예쁜지, 너무 많은 사람이 봤다는 말 아니야.”

연석을 말을 아끼고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였다. 며칠간 성후를 감금해 텔레비전만 보여주는 상상.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세상에 예쁜 여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졸 때마다 이쑤시개로 허벅지를 찌르며. 집게 손으론 억지로 눈을 뜨게 하면……

“으흐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고, 곧바로 성후의 따가운 눈초리가 연석에게 닿았다.

“왜 웃어?”

라이벌을 보는 수컷의 눈이다. 연석은 흠칫 놀라, 바쁘게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네네. 예쁜 온다정 선생님 모습을, 사람들이 많이 봤겠죠. 저 방송이 나갔을 당시, 은명 대학병원이나, 온다정 선생님이 실시간 검색어로도 올랐다고 할 정도니. 큰 이슈가 된 건 아니지만, 여론도 좋습니다. 시사 교양국 안에서는 2부 촬영 얘기도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기분 나빠.”

성후의 기분은 늘 짐작할 수 없게 좋고, 짐작할 수 없게 나빠서 연석은 잠자코 성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째서 세상은 늘 온다정 씨를 주목하고, 내려다보는 거지?”

“그건 온다정 씨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서민의 삶이란 무릇 타인의 평가 아래 꾸려나…”

아차. 반박할 타이밍이 아니었거늘. 연석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그럼 형님이 내려다보게 해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냥 던진 말이었다. 구체적인 계획 혹은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털리고 싶지 않았을 뿐.

그런데. 성후의 눈가 맹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바로 그거야. 당장 인허가받아.”

연석의 가슴이 뛴다.

“…무엇에 대한 인허가를?”

불안으로.

* * *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조금 전, 성후에게 전화가 왔었다. 집에 도착해 깜빡 졸고 있을 때였다.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자신도 그리로 가고 있다고. 잠결에 대답했고 전화를 끊자 정신이 깼다. 병원??

병원에 도착했지만, 정형외과 병동으로 올라가진 않았다. 일 층에 서서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거야?

그때였다. 일층 정문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는 성후의 비서가 보였다. 그는 곧 다정을 발견하고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연석이 흐트러진 슈트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가시죠. 마성후가… 아니, 성후 형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기다려? 어디서?

연석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다시 병원 건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무감한 표정에 촐싹거리는 손짓이 압권이다. 다정은 조용히 연석을 따랐다.

연석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처럼 당연히 비상구로 향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정형외과 병동에 다다라갈 때, 다정이 외쳤다. 동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연석은 헉헉거리는 숨을 최대한 죽이며 대답했다.

“옥상이요.”

다정은 옅게 미간을 구기다 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가보면 알 터다.

무수한 계단의 끝이 보일 때 강렬한 소음이 다정의 귀를 때렸다. 태풍 같은 바람 소리였다. 그런데 패턴이 일정하다.

옥상 문을 열어젖히자, 훨씬 생생한 소리와 파도 같은 바람이 다정을 덮쳤다. 풀려 있는 머리가 여기저기 흩어지고 잠시간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손 갓으로 눈 앞을 가리고 겨우겨우 눈을 떴을 때 익숙한 향이 났다. 희미하게 눈꺼풀을 뜨자, 헬리콥터를 등지고 서 있는 성후가 씩 웃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었습니다.”

슈트 위의 진회색 코트. 그의 목에 둘린 버버리 머플러가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결을 따라 휘날린다. 성후는 그것을 벗어, 다정의 목에 둘러주었다. 긴 머리칼과 얼굴이 파묻히듯 머플러에 감겼다.

“너무 가냘파서, 날아가겠어요.”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다정의 손목을 잡고 성후가 끌었다.

“성후 씨!”

“내가 어떤 놈인지 알려준다고 했잖습니까. 뭘 망설이세요. 꽁으로 생긴 시간, 나한테 좀 씁시다.”

그리고 다시 성후가 앞장섰다. 그의 손목엔 다정의 손목이 단단히 갇혀 있는 채였다.

기진력에, 정말로 다정이 날아갈 성싶은 성후가 온몸으로 바람을 막았다. 저항에 강한 그에겐 쉬운 일이었다.

헬기에 올라 성후가 능숙하게 다정의 핑크색 코트 위로 구명조끼를 입혀주었다. 이어 귀마개도 잊지 않고 씌워 주었다.

“불편하겠지만, 의무라.”

지금 상황을 열심히 파악하며 깜빡이는 다정의 큰 눈이, 성후의 가슴을 울렸다. 자신이 입히는 대로 고분고분, 인형처럼 있는 모습이 꼭 겁먹은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그런데 온다정 씨한테는 잘 어울리네요. 이런 이상한 조끼도.”

성후도 귀마개를 쓰며 말했다. 커다란 소음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만으로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다정이었다. 안전벨트를 확실히 착용하자 서서히 헬기가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병원이 조그마해졌다.

그 아래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의사가운 차림의 인영이 보인다. 아마도 당직 근무 중인 의사들일 터.

그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처럼 선명했다. 얼이 나갔겠지. 갑자기 날라온 헬기. 소음. 거기서 내리는 마성후. 그리고 그와 함께 탑승한 웬 여자.

“갑자기 웬 헬기예요?!”

다정은 근사한 도심 야경을 배경에 두고서 물어왔다. 춥고 시끄러워,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성후에겐,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씩씩하게 들렸다.

“드라이브한다고 생각하세요!”

성후도 소음에 묻힐세라, 소리쳤다.

“드라이브?”

그의 말을 잠깐 곱씹던 다정이 한번의 헛웃음 이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남다른 스케일 앞에, 황당한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분명 비현실적인 순간이지만, 눈앞의 성후는, 제 손을 겹쳐 잡는 성후는, 생생했다.

잡은 손을 꾹 누르며 성후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외쳤다.

“놀라긴 이릅니다.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던 진상 환자 마성후의 아주 작은 일면일 뿐이니까!”

다정은 시선을 돌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놀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연속적으로 나오는 헛웃음이었다. 이왕 그가 선물해준 이 밤을, 다정도 마음껏 누리기로 해본다.

헬기 위로는 지면에서 잘 보이지 않은 별들이, 그리고 그 아래로는 화려한 조명으로 만든 별들이 흩어져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디즈니 만화. 저 신비한 양탄자를 한번 타봤으면. 저런 궁전에 가봤으면. 저런 드레스를 입어 봤으면. 화려하고 웅장한 애니메이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봤던 어린 다정.

그 별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전쟁 같던 병동에 사로잡혀 있던 영혼이 해방을 맞은 것이다. 잠깐의 일탈이래도, 다시 없을 순간임은 확실하다.

다정의 망막에 헬기 아래 세상이 새겨졌다. 소음은 멎었고, 추위도 잊었다. 커다란 손이 주는 체온만을 느끼며 이 황홀한 순간을 가슴에도 새긴다.

태어나 처음으로 시력을 갖게 된 아기처럼, 다정은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성후는 그런 다정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성후의 가슴이 뿌듯해진다. 다정에게 조망적 시선을 선물해줬음에.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달게 즐기고 있음에.

“어?”

창에 손바닥 자국을 남긴 다정이 드디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핑크빛 입술이 열렸다.

“헬기가 착륙하려고 하는데요…? 어? 그런데 병원이 아니에요.”

눈을 찌푸리고서 창밖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공항…?”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환자를 떠나면 큰일이 날 것처럼 굴던 열혈 간호사 다정이 고개를 세차게 지었다.

“절대 아니요.”

그녀가 개구쟁이처럼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놀고 싶어요. 마성후 씨랑.”

성후는 홀린 듯 손을 뻗어, 다정의 윤기 나는 입술을 검지로 훑었다. 서늘한 기온임에도 촉촉한 감촉이 느껴져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 예쁜 입술에서, 모처럼 괜찮은 대답이 나왔군요.”

성후가 먼저 땅을 밟았고 이윽고 다정을 번쩍 안아 세웠다. 어린아이를 지켜주듯,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그가 등을 굽혔다. 낮아진 상체 덕분에 시선의 높이가 얼추 맞다.

성후는 열기 띤 시선을 치켜들어, 다정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갑시다, 휴가.”

이내 사악하게 웃는다.

“단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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