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39화 (39/82)
  • 39화. 버거운 하루 끝에

    다정의 예쁜 미간이 모인다. 듣고도 해석이 되질 않는다. 연신 두 눈을 깜빡거리며 빤히, 정말 빤히 우석을 응시했다. 그러자 친구의 입에서 다시금 비현실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온다정 너 좋아한다고, 내가.”

    다정은 소주를 삼키지도, 당황한 얼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당황하는 모습이 어쩌면 우석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깊게 생각해 꾸민 행동이 아니었다. 그건, 본능이었다.

    하지만 심장은 심하게 벌렁거렸다.

    전의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빛에서, 여태 알았던 우석의 성격으로,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몰랐던 진심 앞에 덜컥 두려워진다.

    친구로 지냈던 그 많은 세월이 엎어지려 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진지하게 생각해 봐.”

    “될까, 진지하게.”

    “힘들어도 해. 생각.”

    “친구야.”

    다정의 부름에, 우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한테만 친구였지, 난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는 내내 친구였잖아.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 내 기분이 어떨까? 갑자기 가장 소중한 친구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네?”

    딱딱하지 않게 정색하며 말하는 다정의 말을 우석은 잠자코 들었다.

    “너 나 좋다며. 그럼 내가 얼마나 슬플지도 생각해줘야지. 네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는 게, 그게 좋아하는 거니?”

    “……나 정말 독하게 참았어.”

    이 역시 진심이란 걸 안다. 때문에 울컥하는 다정이지만, 빠르게 공기를 환기시킨다.

    “이왕 참는 거 하루만 더 참아. 이모!”

    다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소주 일 병! 아니, 아니, 이 병!”

    그리고 그녀의 눈길이 다시 우석에게 닿았다.

    “딱 하루만 더 인심 써. 하루아침에 쓰레기통에 처박을 우정이 아니잖아. 어?”

    마침 포장마차 주인이 소주를 내왔고, 다정은 제 잔과 우석의 잔에 넘칠 듯 가득 소주를 부었다.

    “너 아무렇지도 않냐?”

    우석은 물으면서도, 그녀의 직설적인 성격을 잘 아는 터라 바짝 긴장되었다. 다정은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고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겠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지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말… 정말 혼란스럽다고.”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최대한 진솔하게 말했다.

    “단 한 번도 날 남자로 생각해 본 적, 없는 거야?”

    “그 생각은 내일부터 해볼게. 말했잖아. 오늘까진 우리 친구라고.”

    그러자 우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빌어먹을 친구……, 너 혼자 해. 나, 간다.”

    “앉아. 기우석.”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라.”

    “앉으라고, 이 자식아!”

    버럭 소리를 지른 다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우석을 노려보는 눈빛엔 노기와 함께 원망이 서려 있었다.

    날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너만 쏙 빠지겠다고? 안 되지. 그건 아니지!

    “얘기해 봐.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하자 우석이 다시 착석했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여자로서 듣는 거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 친구로서 듣는 거야. 하나도 숨기지 말고 말해줘.”

    친구가 되겠다는 말이 그런 뜻일 줄이야.

    다정은 저도 혼란스러웠지만,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우석이 혼자 앓았을지, 알고 싶었다. 그를 잃지 않으려면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하에.

    “후….”

    우석은 소주잔을 내려다보다 이내 단숨에 삼켜버렸다.

    “엄청 오래됐어.”

    “근데 왜 지금 고백한 건데?”

    “내가 자리 잡고 나면… 그때 하려고 했어. 번듯할 때. 적어도 현실적인 문제로 차이지 않을 때. 그런데…”

    “그런데?”

    다정은 안주를 입에 넣으며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애썼다. 최대한 평소처럼 구는 것이다.

    “그게 좀 급해졌다. 너, 완전히 마성후한테 가버릴까 봐.”

    “…내가 왜 좋은데? 선머슴 같았던 시절부터 찌질했던 모습들까지, 너 다 봤잖아.”

    “그러게. 다 봤는데도 네가 좋다.”

    “미쳤구나, 기우석. 너 정말 돌았어.”

    단아한 외모에서 나오는 거침 없는 언사. 그런 모습에도 우석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네 말이 맞아. 네가 욕하는 모습까지…”

    “말하지 마!”

    낌새를 눈치챈 다정이 안주를 집어 빠르게 우석의 입에 넣었다.

    “…오늘은 친구니까. 적어도 오늘까지는.”

    저도 모르게 슬픈 눈을 해버린 다정과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웃는 우석의 관계 속에 기묘한 바람이 불었다.

    “고마워.”

    “뭐가.”

    “적어도 화내거나… 외면하지 않아서.”

    술맛처럼 쓴 우석의 말에 다정이 다시 소주를 삼켰다. 마음보다 입안이 쓴 편이 낫다.

    “어떻게 그래. 몇 년을 혼자 앓았을 널 생각하니…… 그 상대를 떠나서 속이 다 상해, 난. 물론… 오늘은.”

    소주가 여러 병 비워지고 나서도 다정은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오늘은…

    오늘만…

    오늘까지는…

    다정은 알까.

    반복되는 그 말이 모진 거절만큼이나 우석의 희망을 거세했다는 것을.

    그래서 첫 고백의 기억은 숨 막히는 긴장보다 미지근한 좌절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 * *

    -아빠 전화, 계속 안 받았다며.

    얼마 전까지 구슬프게 울던 유리가 평소의 냉정을 찾고 말했다.

    “자꾸 중국에 들어오라고 하셔서. 근데 왜 전화했어?”

    -실망스럽겠지만, 같은 이유로 전화했어.

    “…….”

    -아빠가 긴히 할 얘기가 있으시대.

    “얼마 전에 보고 가셨는데.”

    -그 이후로도 생각이 많으셨나 봐. 나도 오빠 얼굴 보고 싶고. 우리 안 본 지 너무 오래됐잖아. …그냥 와주면 안 될까. 나를 봐서라도.

    유리의 말을 들으며 성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있는 연석에게 손을 휘저었다. 성후를 보필하는 덴 연석을 따를 자가 없다. 그는 알아서 척척 짐을 싸기 시작했다.

    퇴원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

    간호사 스테이션을 스치며 늘 그곳에 있던 다정이 떠올랐다. 성후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얼마간 그곳에 두었다. 환히 웃는 미소. 올라간 동그란 광대. 그 맑은 웃음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형님?”

    연석의 부름에 다정의 환영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가자.”

    공항에 도착하자, <가르니크> 전용기가 성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별나시긴.”

    기장과 승무원이 간단하게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후는 눈썹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비어있는 자리 중 아무 곳에나 대충 착석했다. 곧 비행기가 달리더니, 금세 날아올랐다.

    가위로 하늘을 자르듯 새카만 밤이 갈라졌다.

    *

    “오빠!”

    중국 공항에 도착하자,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성후는 단숨에 유리에게 달려가 옷깃을 여며 주었다.

    “왜 나왔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병약한 자신을 걱정하느라 찌푸려진 성후의 얼굴이 유리 마음에 들었다. 늘 여전한 나의 오빠.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좀 더 일찍 보려고, 이렇게 나왔지.”

    가까이서 들리는 차분한 유리의 목소리는 적요했던 세상과 하나인 것처럼 녹아들었다.

    외모는 모친인 선화와 똑 닮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시원시원한 분위기의 선화에 비하면 유리는 훨씬 차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아우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때론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뭐가 되었던 성후에게는 예외지만 말이다.

    남매는 그만큼 서로를 특별히 여겼다.

    “어서 가자.”

    성후는 자연스레 유리의 어깨를 감싸고 대기 중이던 롤스로이스 차량에 몸을 실었다. 애초에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완벽히 여동생을 에스코트했다.

    본가로 가는 동안, 고맙게도 유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손가락, 피아노, 연주회 등. 예민해질 수 있는 주제는 완벽히 피하고 일상적인 대화만을 이끌었다.

    “아빠도 깨어 계셔.”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유리가 말했다. 성후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일찍 말했으면, 딴 길로 샜을 거 아냐.”

    웃음기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가 성후의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젠장.”

    “맞췄지? 아 다 왔다.”

    도착한 성채 같은 저택 앞. 풍수가 좋기로 유명한 자리에 으리으리한 저택은 생태 밀림을 끼고 있어 특별히 공기가 맑았다. 저택의 정문엔 승천하는 용이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둔탁한 문이 열리자 잘 관리 된 잔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는 석재로 된 산책로가 깔렸었다.

    차에서 내린 남매는 이슬에 젖은 석재 바닥을 밟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유리의 말처럼, 아버지는 아직 잠을 이루지 않고 계셨다.

    “결혼해라.”

    아버지의 서재 안. 고풍스러운 소파에 앉은 지, 일 초도 되지 않아 들린 얘기다. 인사보다 빠른 권유에 성후가 픽 웃었다.

    “갑자기요?”

    “충분히, 결혼할 때가 됐잖아. 자. 여기 신부 후보다.”

    “아버지…. 실망스러운데요. 적어도 자식 장사를 하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일부러 꼬아서 말하는 성후에게 일침을 날리는 기태다.

    “네가 알아서 했으면 내가 나섰겠느냐.”

    “어쨌든, 싫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 여자들이랑 무슨.”

    기태의 기품 넘치는 눈썹이 일그러졌다.

    “말이 왜 안 통해? 네가 몇 개 국어를 하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우라는 뉘앙스다. 성후는 변명 거리가 곤궁해졌다. 다정을 거론하기엔 아직 이르다.

    기태가 낮게 한숨 쉬었다.

    “잔말 마. 손가락 상태 보니, 더는 무리다. 듣기에 거북하겠지만, 현실을 직시해.”

    “재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가업 이어받아. 어차피 다 네 것인데, 마다할 게 있느냐.”

    “돈만 보고 사는 거 아닙니다.”

    아들의 말에, 기태가 낮게 웃는다.

    “돈 없이 살아본 적은 있고?”

    부자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흘렀다.

    * * *

    “술이 있어야~ 인생이지~ 아- 인생아~”

    이제는 냉장고에 쟁여 놓은 숙취 음료를 들고 집을 나섰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마신 뒤 병원으로 향했다. 어젯밤 우석의 모습과 말들이 다정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 동안, 다정을 힐끔대는 시선이 많았다. 왜지? 의식하지 못할 때, 한 여자가 나타나 말을 붙였다.

    “저… 온다정 간호사님 되시죠?”

    …!

    아차. 바로 어제, 다큐멘터리 방송이 나가는 날이었다. 매일이 정신없어 놓치고 있었다. 다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인했다. 어떻게 편집되어 방영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시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출근길에서 몇몇, 병원에 도착해서도 힐끔대거나, 아는 척하는 이들이 늘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업무가 급한데, 위에서 호출이 왔다. 병원장은 기쁘게 웃으며 휴가를 제안했다. 인심 쓰듯 덧붙였다.

    “당장 내일부터 떠나세요. 나이트까지 붙여 넉넉히 6일. 온 선생은 푹 쉴 자격 있습니다. 아 물론, 휴가비도 넉넉히 주겠습니다.”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병원장. 아무래도 방송 이후 반응이 좋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다정은, 달갑지만은 않았다.

    병원장실을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비어있는 칸에 들어와 어제 방영되었던 방송분의 기사를 훑었다. 무수한 댓글에 숨이 턱 막혔다. 대부분 호의적인 댓글이었음에도, 쏟아지는 관심에 당황스러운 기분을 추스를 수 없었다.

    간호사들의 동경 어린 눈빛을 받으며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성후의 병실이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

    놀란 다정은 황급히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신규 간호사는 간밤에 성후가 급히 퇴원했다고 알려주었다. 아직 일지를 확인하지 않아서 몰랐다. 또,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케어가 필요한 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리 듣지 못했고,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성후로 인해 충격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우석도, 성후도.

    모든 것이 제게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세요?”

    누리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다정은 태연을 가장하고 생글 웃어 보였다. 환자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괴로운 시간은 쏜살처럼 흘렀고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버거워, 모처럼 택시에 올랐을 때 벨이 울렸다. 눅진하게 들러붙은 피로. 머리를 꽉 채운 번민. 기대 없이 핸드폰을 들었는데, 다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보세요?”

    -납니다.

    갑자기 눈물이 핑글 돌았다.

    -지금, 어디입니까.

    멀어진 줄 알았던 성후의 차분한 음성은, 힘겨운 하루의 보상이라 여겨도 좋을 만큼, 따뜻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 무참하게 버려진 것과도 같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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