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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38화 (38/82)

38화. 오늘은 양보 못 해

가까워진 발걸음 소리를 먼저 들은 건 다정이었다. 성후의 목을 감싸고 나른한 키스에 취해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틀었다. 허둥지둥, 성후를 밀어내며 멀어진다.

당황해하는 그녀의 행동에 성후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여전히 그녀에게 취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순간, 웬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온 선생 여기서 뭐 하나.”

까칠한 표정의 의준이었다. 성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엔 불쾌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다정은 젖은 입술이 신경 쓰여 고개를 내렸다. 손등으로 꾹꾹, 입가를 닦아 본다.

“뭐 하고 있었냐니까?”

아무리 봐도 수상한 두 남녀의 모습에 의준의 눈빛이 엄해졌다.

“뭘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성후가 대신 되받아쳤고,

“성후 씨!”

다정이 말렸다.

“아아, 마성후 님에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저와 함께 있던 여자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했냐고 따지고 드는 거 아닙니까, 지금.”

“허허, 아닙니다. 오해 마십쇼.”

의준은 입으로만 웃는 시늉을 했다. 의준의 원망스러운 눈길이 약자인 다정에게로 향한다. 그때 성후가 쓱- 다정의 몸을 가로 막고 서서 의준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빛과 굳은 턱. 그 냉랭함 앞에 일순 경직되는 의준이다.

“전부터 상당히 거슬렸는데, 하나 물어봅시다. 대체 이 여자한테 못되게 구는 이유가 뭡니까? 가급적이면 성격이 원래 그 모양이란 대답을 듣고 싶군요.”

날카로운 질문에 의준이 반사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시간을 버는 것이다. 다정이 슬쩍 성후의 옆으로 나오려던 걸 한번 더 막고서 성후가 머리를 굴렸다.

언젠가 연석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정에게 차였던 의사에 대해. 그가 누구냐 물으니, ‘주치의’라고만 대답했고 ‘주치의’가 여러 번 바뀌었던 성후는 다정을 짝사랑했던 남자가 누군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또 지난 일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직감이 가리키는바, 그자는 바로 눈앞에 있는 저 의사라는 것을.

“그게 병원 내에서 문란한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근래 저희 병원이 떠들썩했다는 거, 성후 님도 알지 않습니까. 다 같은 식구끼리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의준에게 성후가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지금 유부남 의사의 더러운 불륜과 젊은 남녀의 연애사를 동일시한다는 말씀입니까?”

차라리 냉정할 때가 나았다. 노골적으로 구긴 성후의 얼굴은, 같은 수컷이 보기에 몹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의준의 등골이 삽시간에 싸하게 식었다. 허공에 손을 바쁘게 휘저으며, 무슨 말이든 일단 하고 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저 병원 내에서 일어나는 남녀 관계는……”

성후는 의준의 말을 끊지 않고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뭐라도 좋으니 그럴듯한 변명을 해보라는 뜻에서. 또 다르게 풀이하자면, 헛소리는 곧 죽음이란 압박이 담긴 눈빛이었다.

의준은 시든 풀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성후의 뒤에 숨겨져 있던 다정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됐어요, 그만 해요.”

성후는 대답 대신 다정의 손목을 한 번 꾹 눌렸다.

“본인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편협한 사고를 했는지, 이제 아시겠죠?”

“…….”

의준은 자존심이 상해 대답하지 않았다. 이쯤 했으면 그만할 법도 한데, 성후는 이때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집요했다. 사람이란 망각의 동물이어서, 밟아줄 때 확실히 밟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전에 얼마나 옹졸한 사람인지 아는 게 먼저겠군요.”

“마성후 님!”

“왜 그러세요? 이 닥터. 씩씩대는 얼굴이 꼭 예쁜 여자에게 차인 표정 같습니다?”

그 순간 의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올라가시던 중 아니셨나요? 어서 가던 길마저 가시죠?”

꺼지라는 말을 나름 고급스럽게 순화한 성후다.

의준은 성후에게 짧게 묵례한 뒤 다정을 쳐다도 보지 않고 위층으로 올랐다. 다음으로 거칠게 비상구 문을 연 다음 길게 늘어선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순간 숨통이 트였고, 동시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몇 걸음 떼다 말고 애꿎은 벽을 사정없이 발로 찼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발가락이 부서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의준은 제 발을 감싸고 쪼그려 앉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가엔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마성후… 이 빌어먹을 놈……!

* * *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다정.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트를 훑어보던 중, 냉정해진 부연이 다가왔다.

“너무 기고만장하진 마.”

“안 합니다, 전혀.”

다정은 담담하지만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하기 싫다는 마음이 역력했다.

“날 불쌍하게 생각하지도 마.”

다정의 눈길이 차트에서 부연에게로 옮겨갔다.

“뭐?”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픽 웃음을 터트린 뒤 고개를 희미하게 저었다.

또 혼자 땅굴 파다 울었네, 울었어. 여러 터져서는.

“뭐?! 그 웃음 뭐야? 나 비웃는 거지, 지금?”

부연의 날카로운 음성에 다정이 방긋 미소 지었다.

“어쩜 세상이 다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인공 아닌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비꼬지 마!”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는 다정이다. 예쁜 눈썹을 꿈틀거리다 이내 시원하게 웃는다. 다정이 주머니에서 쏙 꺼낸 건, 아까 웬 할아버지 환자에게 받았던 사탕이었다.

“자, 이거. 너 주려고 아껴둔 거야.”

조그마한 아이를 달래는 마음으로 사탕을 건넸다. 저가 부연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라서 건네는 위로가 아니다. 부연의 감정이 얼마나 스펙타클하게 요동치는지 아는 다정은, 부연이 안타깝고도 답답했다.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틀어 보면, 작지만 행복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이 사탕처럼 말이다.

“짜증 날 땐 단 게 최고거든.”

부연의 손에 사탕을 꼭 쥐여주고 탈의실로 향하는 그녀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탈의실에서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

우석이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뭐야? 오면 온다고 말하지.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눈앞에 있잖아.”

어깨를 으쓱하는 우석을 보며 졌다는 듯 다시 웃는 다정이다.

“약속 있어?”

우석의 눈빛에 연유 모를 긴장이 서려 있다. 다정은 그 미묘한 긴장을 모른 척 대답했다.

“으아니? 내가 맨날 일 집 일 집 하니까 울 엄마가 분통을 터트리시잖냐.”

“그랬지, 참.”

피식 웃는 우석에게서 남자의 내음이 폴폴 났다. 아무리 봐도 잘 컸단 말이야. 꼭 자신이 키운 듯 괜히 뿌듯해지는 다정이다.

“데려다줄게.”

“데려다만 주게? 저녁도 같이 먹자. 배고파.”

“그건 봐서.”

“응?”

먹으면 먹고 말면 마는 거지, ‘봐서’라는 뭘까.

하지만 다정은 따져 묻지 않았다. 성주도 아니고 우석의 모호함이라면 다 이유가 있을 터이니 말이다.

비상구 계단을 밟고 로비로 내려오자 이번엔 성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몹쓸 데자뷔. 팽팽한 긴장감. 두 남자의 눈치가 보이는 건 이상하게도 다정의 몫이 되어버렸다.

성후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우석이 다정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양보 못 해.”

묵직한 목소리의 연유도 모르고서, 다정은 빠른 긍정을 했다.

“아, 알았어.”

가까이 다가온 성후가 곱지 않은 눈으로 물어왔다.

“퇴근합니까.”

내 것을 낚아채 가는 도둑을 쳐다보듯, 우석을 힐끔거리며.

“네.”

“저녁… 같이 먹을까 했는데.”

성후의 말에 퍽 곤란한 기분이 드는 다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우석과 굳건히 약속한 뒤였다. 그녀는 입맛을 몰래 다시다 겨우 말을 꺼냈다.

“…다음에요. 오늘은 안 되겠어요.”

“절대로?”

“네, 절대로.”

두 번째 대답은 단호했다. 성후는 몇 초간 다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호한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더 흔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뜻을 받아들인 성후가 천천히 발을 뗐다. 다정의 가슴이 먹먹해진다. 공기에 스치는 그의 옷깃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늘한 기분이 들었지만, 선약은 먼저다. 미묘한 공기를 가르고 지나치려는데, 성후가 말했다.

“집에 잘 도착했는지, 전화, 할 겁니다.”

다정은 그를 응시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요.”

저를 보내는 성후의 눈빛이 어떤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뜨거운 눈을 마주하는 순간 우석과의 약속을 단숨에 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남자에게 미쳤어도 아직까진. 그래, 아직까진. 자제가 필요했다.

성후가 완전히 멀어지자, 다시 우석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는 극명하게 다른 분위기. 애써 잘했다고 자위한다. 친구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옳다고 말이다.

* * *

일 층 비상구 안. 성후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계단의 중간층에 서 있다. 통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다정과 우석이 보인다. 침잠한 눈이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 뒤를 밟는다.

“후…….”

보내지 않겠노라고, 곁에 있어 달란 말은 왜 못하는 걸까.

바보 머저리처럼.

꼭 보내면서 후회하고, 보내고 나서 불면을 겪는다. 피아노의 자리를 다정이 차지한 것처럼. 온 정신이 그녀에게 쏠려 있다. 폭발적인 에너지가 그녀에게만 향한다.

“마성후 병신….”

성후는 조용히 자신을 욕했다.

왜인지 자꾸 어긋나는 기분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이 밀려 나왔다.

* * *

“자. 어서 말해 봐.”

자주 오던 포장마차. 친숙한 안주. 예쁜 여가수 사진이 붙은 소주병.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러나 우석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였다. 다정은 답답하다기보다 걱정이 밀려들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거야?”

여태 별다른 걱정을 끼친 적이 없는 우석이었는데. 때문에 우석의 심각한 얼굴은 다정의 가슴을 더욱 가쁘게 뛰도록 만들었다.

“우석아…”

우석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다정을 쳐다보았다. 눈이 꽤나 깊고 진지해 다정이 움찔한다. 하지만 이내 다정의 눈빛도 침착하게 가라앉는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고 경청하겠다는 눈이다.

“나 말이다.”

우석이 침묵을 깼다. 무거운 눈빛만큼이나 신중한 목소리다.

“그래, 너 말이야.”

다정이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그때 돌변하는 우석의 눈빛. 잠시 성후와 겹쳐 보이는 사내의 눈빛을, 다정도 똑똑히 목격한 순간-

“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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