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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37화 (37/82)
  • 37화.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부연과 멀어지며 괜히 그녀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연석이었다. 예쁘장한 외모완 달리 늘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아는 인물로 비교하자면, 다정의 경우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느낌이었지만, 부연은 인사이더가 되고 싶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결국, 외면받는 외로운 사람. 모두 서툴러서다. 사람을 대하는 법에 서툴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에 서툴고. 그녀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변보다 자신을 보는 일일 터다.

    부연의 가녀린 등이 완전히 멀어지자, 연석도 발길을 돌렸다. 지금 자신이 가여워해야 할 대상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일개 간호사가 아니라, 성후라는 것을 한번 더 상기시켰다.

    성후의 병실 앞.

    똑똑.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연석은 태연하게 문을 열었다. 성후는 핸드폰으로 예능 따위를 보면서 속없이 웃고 있었다.

    “형님.”

    얼마 전까진 술에 절어 살더니, 이제는 아예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텔에서 온다정 간호사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형님!”

    한번 더 힘주어 부르자 성후가 얼마나 웃긴 영상을 봤는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어어, 말해.”

    연석은 몰랐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도피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당장 생각을 골똘히 해본들, 무슨 해답이 있을까. 그저 다정에게 시간이 날 때까지, 마음의 조그마한 여유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시간을 버리기엔, 우스꽝스러운 예능프로그램을 따라올 것이 없다.

    “회장님이 제법 심각하신 거 같습니다.”

    “심각?”

    심각한 내용은 듣고 싶지 않은데.

    그의 마음이 좁아진 미간에서 드러났다.

    “네, 형님 장가보내고 싶으신 거 같은데요.”

    “뭐 설마? 드라마에서나 보던 구닥다리 정략결혼이라도 시키겠다는 거야?!”

    이번엔 대놓고 질색하는 성후다.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배필을 찾아주시고 싶으신 거 같았습니다.”

    “그런 문젠 알아서 한다고 전해. 멍청한 파파보이가 되기 싫으니까.”

    “네, 은근히 흘려보겠습니다.”

    “대놓고 흘려.”

    “그럼 저희 부친이 곤란해질 듯하여.”

    “아아.”

    “그리고 유리 아가씨 말입니다.”

    여동생 얘기가 나오자 성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걱정에서 기인한 긴장이었다.

    “유리가 왜.”

    “아 별일은 없고 이번에 갤러리 전시하신다고.”

    “…직접?”

    “아뇨, 중국 문화 재단에서 유리 아가씨에게 먼저 컨택이 왔다고 합니다.”

    “개인전?”

    “너무 큰 규모라 아쉽게도 단체전입니다.”

    “그래도 그 나름대로 큰 성과군.”

    어려서부터 작업실에 틀어박혀 죽어라 그림을 그렸던 유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은 늘 엉망이고 유리의 얼굴 역시 언제나 물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성후는 방을 좀 치워가며 하는 게 어떻겠냐, 물으며 유리의 그림들을 훔쳐봤었다. 작은 여자아이에게서 태어난 그림들은, 선명한 색채에 비해 깊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습니다. 들으시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기특하긴 하네.”

    “가보실… 겁니까?”

    연석의 물음에 성후가 은근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느리게 대답했다.

    “……아니.”

    “포기… 안 하신 거 맞죠?”

    주어는 ‘온다정’이다. 포기하고 수용했다면 여기에 남아 계실 이유도 없었겠죠.

    “내 사전엔 포기란 없지.”

    겨우 정신을 다른 곳에 돌려놓았는데, 연석의 물음에 유예하고 있었던 일이 떠올라버렸다. 다시 가동할 인내심 같은 건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연석아.”

    “네, 형님.”

    “유리한테 가장 예쁜 꽃과 선물, 그리고 카드를 보내줘.”

    “……무슨 글을 넣을까요?”

    그는 강인하게 웃으며 검지로 연석을 척 가리켰다.

    “마 남매 사전엔 포기란 없다. 오빠도 힘내고 있으니까 너도 힘내. 자랑스럽다. 내 동생.”

    그리고 성후는 어딘가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 * *

    자존감이 낮았던 역사가 길어도 너무 길다.

    “흐윽…!”

    늘 잘나고 싶었다.

    모든 것이 평범했던 부연은 안 되는 머리로 죽을 둥 살 둥 공부해 서울 내 대학을 갈 수 있었다. 그것도 헬이라고 소문난 간호대학에.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자신을 받아줄 대학이 이곳뿐일 것 같았고 또 간호사가 되면 시집을 잘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직군으론 ‘유치원 교사’도 고심해 보았지만, 아이가 싫어 망설임 없이 이 길을 택했다.

    그 뒤로 내내, 홀로 다정과 비교하며 앓았다.

    시작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다. 딱 봐도 싸구려 옷만 입고 다녔던 다정은 이상하게 인기가 많았다. 시간적 여유도 없어 보이는데 학점 관리도 완벽했고 교수들의 칭찬도 자자했다. 한번은 모두가 동경하던 선배에게서 대대적인 고백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부연은 그것이 보기 싫었다.

    주말마다 아르바이트에 허덕이면서 중고가 브랜드로 치장하는 이유도 낮은 자존감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흡….”

    대학만 졸업하면 안녕할 줄 알았던 다정을 은명 대학병원에서 다시 조우했을 때, 부연은 절망했다. 그때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평생 온다정의 들러리 인생이 되리라고.

    “…진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신 선생님?”

    탈의실 구석 커튼 뒤에 숨어 울던 부연이 움찔한다.

    “저 누리예요….”

    부연은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확 걷었다. 그리고 한껏 울어 붉은 눈으로 누리를 쳐다보았다.

    “흡.”

    “모른 척해. 나 울었다는 거.”

    “네네, 물론이죠. 그런데, 왜 울고… 계세요?”

    자신을 걱정하는 누리의 얼굴이 어쩐지 다정과 겹쳐 보여, 부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쌤.”

    누리가 한번 더 부연을 불렀다. 부연의 부은 눈이 누리의 얼굴로 향한다.

    “남자… 소개… 받으실래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누리의 소처럼 예쁜 눈이 이유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히스테리 부리는 거, 다 연애를 안 해서랍니다.

    혼자만의 추측일지라도, 기분이 팍 상했다.

    “나 그렇게 궁하지 않거든??”

    더군다나 부연의 눈은 아주 높았다. 평범한 남자들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돌멩이쯤으로 여겨왔다. 나이 서른. 어쩌면 완벽한 왕자님 같은 건,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염원했다. 이 세상 어딘가엔 반드시, 보잘것없는 제 삶은 구원해 줄 상대가 있으리라고. 그 희망을 놓으면 부연의 고인 삶은 결국 썩을 것만 같았다.

    “아아 네….”

    신경질적으로 탈의실 문을 닫고 나가는 부연을 보며, 누리가 고개를 저었다.

    “……온 선생님이 힘드시겠어.”

    * * *

    “다정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다정도 다큐멘터리 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당장의 분위기 때문인지, 꼭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감독이 얼굴 앞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다정 씨 성형 하나도 안 했죠?”

    “아하하….”

    다정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해야 했나요? 저도 듣기는 했었는데…… 카메라 속에서는 더 살찌게 보인다고…. 제가 광대가 조오금 나온 편이긴 하죠?”

    “아~니! 실물도 예쁘지만, 카메라 속에 있는 모습은 더 예뻤어요. 난 오늘 내가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니까. 방송 타면, 이슈 좀 되겠어요. 피곤해져서 어떡합니까.”

    걱정을 웃음에 섞어 말하는 감독이다.

    “후후. 그래도 금방 가라앉겠죠. 잠시니까요.”

    “뭐, 거야 그렇지만. 아무튼, 대단해요. 떨지도 않고.”

    “왜요? 저 아까 떨려서 주사 놓을 때 손 달달달 떨었는데. 못 보셨어요?”

    칭찬이 낯간지러워 농담으로 슬쩍 때우는 다정이다. 감독이 씩 웃었다.

    “예쁜데 성격까지 좋고. 본인도 본인이 얼마나 주변을 밝히는 사람인지 알아야 해요.”

    “…아하하. 감독님 자꾸 그렇게 칭찬하시면 저 헛꿈 꿔요.”

    “헛꿈?”

    “이제라도 오디션을 보러 다닐까…하고.”

    “하하하하. 그래, 어디 다녀 봐요! 내 적극적으로 추천해줄 테니!”

    그 순간, 병실 문이 확, 열렸다.

    장비를 정리하던 제작들이 깜짝 놀라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성큼성큼. 거침없이 다가오는 발걸음.

    “할 거 다 했습니까?”

    성후의 얼굴을 보던 감독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진다.

    “네에?? 저, 저기…”

    당황한 다정이 얼버무리자, 이번엔 성후의 날카로운 눈이 감독에게 향한다.

    “보아하니 상황 종료된 것 같은데… 맞습니까.”

    “저… 혹시…”

    감독의 눈이 희미하게 찌푸려지자 성후가 인상을 확 구겼다. 그러자 깜짝 놀란 감독이 질문을 삼키고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성후의 얼굴이 결심으로 굳는다. 이어 바로 다정의 손목을 끌고 병실을 등졌다. 성큼성큼. 다정은 그런 그의 커다란 보폭을 따라잡기가 힘들다. 때문에 쫓기듯 뛰었다.

    성후가 다정을 데리고 온 곳은 다름 아닌, 비상구 안 계단이었다. 그들에겐 이제 너무도 익숙해진 곳으로.

    “왜… 또 왜 이러시는 건데요.”

    성후는 잔뜩 화가 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포기하기도 싫고, 유예하기도 싫습니다.”

    “무엇을요…?”

    “그 빌어먹을 오해에 대해 묵인하면, 당신이 내게서 등질 것 같고. 그렇다고 자존심에 버티기엔, 난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다정의 눈빛도 무수히 흔들린다. 충분히 그의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무모했어요. 방금… 감독님이 성후 씨 알아보신 거 같은데.”

    “제가 당신에게 더 미쳐가나 보죠.”

    “…….”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거든요.”

    다정도 열기 띈 눈으로 성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움직여 당돌하게 말했다.

    “좋아요. 마성후 씨의 변명, 한번 들어보죠.”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뭔데요.”

    “난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놈이라는 거.”

    “그게 무슨…”

    되물으려는 순간, 성후의 입술이 다정의 입술을 삼켰다.

    “!”

    누군가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비상구라는 점이 다정의 온몸을 비틀게 했다. 꽤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성후가 양보하듯 멀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코끝이 닿는 거리에서 속삭였다.

    “당신인 줄 알고 키스했습니다.”

    “…!”

    “그 간호사, 당신으로 착각했다고.”

    “성후 씨….”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온다정 씨한테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애틋한 눈으로 다정을 내려다보던 그는 다시 그녀에게 몰아쳤다. 젖은 소리를 내는 입맞춤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아아, 거부할 수 없어…!

    이번엔 다정도 눈을 꼭 감고 성후의 목을 감쌌다. 그의 뜨거운 혀를 깊숙이 느끼며, 그녀도 속으로 말했다.

    ……당신만 미친 거 같죠? 아니요. 저도 당신에게 진작 미쳤어요.

    격정적으로 몰아치던 두 사람은, 서서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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