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36화 (36/82)

36화. 저희, 했나요?

“일어났습니까.”

적당히 허스키한 목소리가 다정의 온몸을 휘감는듯했다. 방금 눈을 떴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지만, 내색하긴 어렵다.

“저, 여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는데, 깨끗하지만 저렴한 모텔의 분위기가 가관이었다.

“제가, 여길, 마성후 씨랑 왔다고요?”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다. 어렴풋이 남은 마지막 기억은, 분명 조금은 아담한 남자의 인영이었다. 그녀도 성후의 맨몸을 본바, 그렇다면 더더욱 그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꿈이라도 꾼 걸까.

“보시다시피, 모텔입니다.”

성후는 긴박했던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애가 타 죽도록 찾아 헤맸던 다정이 웬 동행자와 병원을 나가는 것을 보았고 급히 미행을 붙였다. 물론 노련하게 따라붙었던 자는 연석이었다.

제 전화는 꿋꿋하게 받지 않는 다정이 웬 남자와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다는 얘기를 실시간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럴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니까.

그런데.

‘형님. 온 선생님 지금 모텔에 들어가는데요?’

‘모텔?’

단박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네, 그런데…… 의식이 없는 거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성이 휘발된 성후는 병원을 뛰쳐나왔다. 환자복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말이다. 문제의 모텔에 도착해, 카운터에 대고 말했다.

‘202호. 키 주세요.’

‘예에? 말도 안 되는! 당신들이 누군데요?!’

두꺼운 입술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 앙칼진 목소리에, 조금의 불안도 담겨 있었다.

‘202호에 의식 없이 들어간 여자, 제 여동생이란 말입니다.’

가족 문제라면 모텔 주인이 나설 바가 아니다. 여자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여동생이든, 남동생이든, 가족사는 나중에 가서 얘기하시고요. 저희는 키를 내드릴 수 없습니다. 가세요.’

밉게도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 여동생. 미성년자란 말입니다. 연석아. 신고해.’

그러자 사색이 된 여자가 카운터 옆으로 달린 문을 밀고 뛰쳐나왔다. 얼굴은 저승사자를 만난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여기요!’

그렇게 그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문을 따고 들어왔을 때 보이는 풍경은 처참했다.

침대에 뻗은 다정은 의식이 없었고, 태풍이라는 자는 나체에 샤워가운만 걸친 채 놀란 얼굴로 튀어나왔다.

‘어?!’

태풍이란 남자가 나오자마자 성후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아니, 앞뒤를 가릴 필요도 없었다. 얼마간 맞던 태풍과 그것을 지켜보던 주인아줌마. 그리고 그 아줌마를 처리하러 나간 연석.

얼굴이 엉망이 된 태풍이 성후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온 선생이…… 제 옷에 토를 하는 바람에….’

꽤 억울한 목소리로.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았다. 태풍은 쭈뼛쭈뼛 욕실로 다가가, 그가 쪼그리고 앉아 빨고 있었던 자신의 얼룩덜룩한 옷가지를 보여주었다. 울먹이는 표정이 결백을 잇달아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심이 없었다는 것까지 믿을 순 없는데 말이야.’

저도 모르게 코를 찡그린 성후가 말했다.

‘네. 저 그리 괜찮은 놈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의식 없는 여자한테까지 손댈 만큼 쓰레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태풍이 나간 뒤, 성후가 밤새 다정의 곁을 지킨 것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이 미웠다. 동시에 벅차게 사랑스러웠다. 긴장감 없는 여자라 생각하며 밤새 뜨거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절대로 미워하지 않는 눈빛으로 말이다.

고장 난 심장은 상황과 별개로 거세게 뛰었다.

다정의 이목구비를 뜯어보며.

다정의 숨결을 바라보며.

그 곁을 지키며.

“저희, 했나요?”

문뜩, 되지도 않는 물음을 꺼내는 다정이었다. 홀로 앓은 것에 대한 복수심일까. 성후는 짓궂은 마음이 일었다. 제 변명은 듣지도 않고 꼭꼭 숨어버린 다정에게.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왜죠?”

“미워서요. 기억에 의존하던지, 몸에게 묻던지. 온다정 씨가 편하실 때로 하시죠.”

“저 완전히 취했었다고요. 그런 사람을 건드린 거라면…”

“건드려요? 누가요?”

“그럼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죠?”

확실히 하란 다정의 눈빛이 사나워, 피식 웃음이 나오는 성후다.

“술에 취해 날 건든 건 당신이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발칙한 미소의 저의를 알 수 없는 다정이었다. 일순 넋이 나갔다. 성후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의식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그 어떤 사고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바보 멍청이가 되는 것이다!

“기억에 없다니 실망이군요.”

그가 던진 말이 다정의 불안을 더욱 가증시켰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연석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봉투가 걸려 있었다. 성후는 그것을 받아들며 환자복 단추를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연석도 미련 없이 물러난 뒤였다.

“저기요? 뭐 하세요…?”

엄마, 진짜 잤나 봐. 어떡해. 저 남자 왜 이렇게 거침없는 거야? 2차전…? 그래! 2차전이라도 하자는 건가? 온다정, 이 바보! 기억해! 기억해내!

“나가야죠. 여기서 살겁이니까.”

까칠한 말투에 주눅이 팍 든다.

“아아. 씻고는 나가야겠군요. 온다정 씨 여벌 옷도 사 왔으니, 씻으세요. 술 냄새 밴 그 옷은 이만 벗고.”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뭐든 야했다. 생각의 회로가 느려진 다정이 머뭇거리자 그가 한 마디를 더 보탠다.

“아아-. 혹시 씻겨주길 바랍니까?”

완전히 상의를 벗어 던진 성후가 성큼성큼 다정에게 다가갔다.

근육이 우람하게 조각난 몸이 다정의 세계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그녀는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그대로 욕실로 달렸다. 도망이었다.

얼마 후, 진짜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후는 기가 막혔다.

“저렇게 긴장감이 없어서야.”

졌다는 생각이 든다.

저런 물소리와 지금 이 상황이 남자를 얼마나 긴장시키는 알기나 할까.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얘기일까.

성후는 입술을 짓이겼다.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무방비한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다는 생각과 탐욕을 통제하라는 엄격한 이성이 격렬하게 충돌한다.

“하아….”

주먹이 터질 듯 말아 쥐었다. 어차피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할 것이다. 귀로, 상상으로 극심한 고문을 당해도 다정의 솜털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욕망보다 귀한 그녀를 감히.

성후의 눈이 꼭 닫힌 욕실 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몸을 훑고 있을 투명한 물줄기가 새삼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

연석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다정과 성후에게서 묘한 기운이 흘렀다.

“그런데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온 거예요? 전 분명 계 선생님이랑 마셨는데.”

솔직한 건지. 뻔뻔한 건지. 모든 걸 꿰고 있던 성후의 입에서 불쑥 곱지 않은 말이 튀어나온다.

“누가 무방비하게 모텔로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어서.”

“제 뒤도 캐세요?”

다정의 눈빛이 날카롭다.

“캐다뇨. 걱정.”

그는 강조해서 정정했다.

“그런 건 걱정이라고 합니다.”

확실한 각인을 위해 한번 더.

“아니 마성후 씨가 뭔데 제 뒤를…”

“제가 아니었다면, 감당, 되셨고요?”

다정이 은밀히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그녀가 곤란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모습이 귀여웠다. 완전히 미쳐간다. 아니면 저도 몰랐던 변태 같은 취향이 그녀로 인해 발현된 것일까.

성후는 속에서 번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시선을 돌렸다. 인상이 써진다. 간질거리는 감정을 참는 일은, 엄청난 인내력이 필요했기에.

정형외과 병동에 도착했을 땐 입구부터 어수선했다. 연석이 부드럽게 잠시 정차했고, 다정은 자연스레 차에서 내렸다.

다정의 눈이 무리 진 사람들을 훑었다. 다음으론 제 옆자리에 시선을 획 돌렸는데 언제 사라졌는지 성후는 자취를 감추었다. 불현듯 어제 보았던 ‘키스’에 대한 변명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온다정 선생님?”

웬 불독처럼 생긴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웃는 모습은 희한하게도 살찐 고양이와 같다.

“아 네.”

“반갑습니다. KBC에서 나온 다큐멘터리 방송 <우리 이웃은>의 정 감독입니다.”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다정이 예의 차린 미소를 지었다.

“네, 말씀 들었습니다.”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저희 방송 콘셉트가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것인데. 이거 간호사 역할을 맡은 여배우 같은 느낌이 나면 어찌합니까?”

칭찬인 듯한데 확실히 해석하기 힘든 말투였다. 웃는 것을 보아 나쁜 저의는 없어 보여 다정도 덩달아 웃음 지었다.

“너스레 떨어봤습니다. 긴장하지 마시라고요. 워낙 일을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평소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앞에 말했던 외모 칭찬보다 다음 이야기가 훨씬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걸, 이 사람은 알까. ‘평소처럼’. 최상층 권력에 응한 순간부터 가장 많이 들었고,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다정은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촬영은 온종일 이어졌다.

출근과 동시에 정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인계, 간호사 라운딩, 교수회진 라운딩을 따르고 그 후 떨어진 처방을 이행했다. 늘 하던 일인데도 긴장이 되었다.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이 어색해서가 아니었다.

종일 마성후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카메라가 포착할까 봐 겁이 났다. 때때로 제 머릿속에 마성후라는 불청객이 잠입할 때마다 업무 효율이 떨어진 건 명명백백했으니까.

‘기억에 없다니 실망이군요.’

일하다 말고 제 두 눈을 덮는 다정이다.

미쳤어, 진짜. 이건 키스가 어쩌고 따질 수준이 아니잖아?? 내 몸에 묻기엔, 숙취 말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찰나의 브레이크 타임. 감독이 다가와 물었다. 걱정스러운 눈빛과 마주하자 다정은 금세 미소를 찾고 대꾸했다.

“일상입니다.”

잘도 포장한다며 자신을 타박하면서 말이다.

* * *

어수선한 촬영 팀을 피해 성후의 병실 앞을 서성거리던 부연은 이내 제풀에 지쳤다. 힘없는 걸음으로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했는데 이내 싸늘한 눈빛들과 마주친다.

“사람을 왜 그렇게들 보세요?”

여우 같지만 그래도 선한 미소를 짓는 부연에게, 한 간호사가 말했다.

“신 선생님 강원도 깡촌 출신이라면서요? 제 대학 동기가 우리 병원 왔다가 신 선생님 봤대요. 같은 마을에서 컸다던데, 무슨 무슨 리라고 불리는.”

부연의 얼굴이 벌게졌지만, 표정은 도도했다.

“그게 뭐 문제 있어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바짝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 같았다. 그러자 간호사가 더욱 사납게 대꾸했다.

“문제요? 네! 없습니다! 그럼 적어도 온 선생님을 뒤에서 씹는 짓은 하지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골 출신이라느니 뭐니. 두 분 대학 동기라면서요? 전부터 지켜봤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같아 제가 다 성질이 나네요!”

“…본인 일이나 잘하세요!”

말문이 막혔지만, 자존심에 한 번 더 소리를 지르는 부연이다. 간호가 픽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그 얼굴도 다 뜯어고친 거라면서요. 자연산 행세는. 기가 막혀서. 과대 포장한다고 낮은 자존감이 어디 갈까. 전 이제 신 선생님이 매주기로 콩을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서 제 곁을 휙 지나치는 간호사.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글 도는 부연이었다.

울지 않기 위해 주먹을 꼭 말아 쥐고 꾸역꾸역 걸었다. 소리를 죽여 울더라도 복도는 아니다. 간호사들이 빈번하게 들락날락하는 탈의실도, 간호사실도 아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화장실 앞에까지 다다랐을 때 남자 화장실에서 젖은 손을 닦으며 나오던 남자와 부딪히고야 말았다.

“…죄송합니다.”

얼굴도 들지 않고 꾸벅 인사를 하는데 부연의 눈앞에 웬 손수건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감정 없는 얼굴의 연석이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