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꿈과 현실 사이, 그 모호한 경계선
“방해되니 나가줄래?”
술에 절인 오렌지처럼 나른하면서도 톡 쏘는 부연의 목소리가 다정의 심장을 관통한다.
“…그러죠.”
성후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리는 다정.
“그게 아니라…!”
변명할 기회 역시 주지 않고서 그녀는 매몰차게 떠나가버렸다.
성후가 재빨리 쫓아나갔지만, 다정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손목시계로 벌써 여덟 시가 지났음을 확인한 성후는 바로 비상구 방향으로 틀었다. 퇴근 중일 그녀를 무조건 잡아야 했다.
그대로 일 층까지 쭉 내려왔지만, 다정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탈의실로, 옥상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받으리란 기대보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성후의 애가 바짝 타들어 간다.
“제발, 받아, 받아, 받으라고…!!”
* * *
의도적으로 주사실에 숨어 있던 다정은 꽤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성후의 병실을 지나쳐 비상구 문을 여니 문뜩 며칠 전 퇴근길의 기억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친구 우석과 콩나물국밥 그리고 소주와 마성후.
그 암담했던 며칠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오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은 아침이었고 지금은 밤이라는 것. 일 층까지 내려와 비상구 문을 열어젖히자, 복도 끝 벤치에 앉아 있던 태풍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지금 퇴근하세요?”
하얀 가운을 벗은 태풍은 또래 남성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어쩌면 수려한 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낯설게만 느껴지는 다정이다.
“…네.”
“저돈데.”
“아. 그러세요.”
그렇게 말하고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다시 무음으로 해두는 걸 깜빡한 벨소리가 칼이 되어 다정의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안 받으세요?”
마침 어디에라도 자신을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고, 또 마침 태풍이 보였다.
“오늘 오프세요?”
그가 운이 나빴다.
다정의 물음에 태풍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네!”
목소리도 한껏 들떴다.
“술 한잔하실래요?”
날 것의 감정을 쏟아낸다면, 미안하지만 가벼운 거리의 사람을 선택하는 편이 나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소중한 사람들에겐 웃음 이외의 것들은 주지 못했다.
잠깐 스치는 아픔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휘두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건 그들에겐 고통이고 저에겐 미안함 혹은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어디로 갈까요?”
태풍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디든. 병원만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다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
태풍이 자신 있게 안내한 곳은 웬 일식집이었다. 추레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일식집은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였다.
‘술 한잔하실래요?’
흘러나왔던 목소리는 분명 침울했을 텐데. 연어회에 맥주라도 한잔하잔 뜻으로 받아들인 걸까?
“하아….”
독한 술을 원했던지라,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알아서 소맥이라도 말아, 진탕 마실 것을 다짐하는 그녀다.
그때, 앞서가던 태풍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가 의미심장하다.
“기대 해도 좋아요.”
그리고 불쑥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정의 눈이 놀라 커졌다.
그가 쉐프와 몇 마디 나누는가 했더니, 다정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주방으로?
선뜻 발을 떼지 못하자, 그가 무섭지 않게 미간을 모으고선 힘차게 손짓했다. 재촉의 손짓은 분주하게 허공에서 휘날렸다.
다정이 못 이기는 척 다가간다.
“이쪽으로.”
거구의 쉐프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도 덩달아 끄덕였다.
주방의 뒤편으로 나가니 아래로 내려가는 동굴 같은 계단이 보였다.
“음?”
계단 자체는 깔끔했지만, 이런저런 포스터가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벽들은 어쩐지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아 저, 이상한 놈 아닙니다. 믿고 따라오세요.”
태풍은 무고함을 증명하듯 경쾌한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다정은 그가 아닌 자신을 믿었다. 여차하면 도망나오면 될 터이니 말이다.
계단 아래까지 완전히 내려가자, 새빨간 벨벳 문 입구부터 희미한 음악이 새어 나왔다.
그 비밀스러운 문을 확 열었더니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이렇게 풍성한 재즈 음악이 지하에 숨어 있다니.
사운드가 참 좋다고 느낀 순간 작은 무대 위에서 홀로 노래를 부르는 흑인 가수가 보였다.
“?!”
라이브라는 사실에 다정은 더욱 놀랐다.
“오늘 기분 많이 안 좋죠? 제가 아주 가~끔 오는 곳인데요. 스트레스 받을 땐 직빵이더라고요.”
확실히 가슴을 울리는 노래 소리에, 우울감이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설령 그것이 아주 잠깐이라도.
“술은 어떤 걸로 할까요?”
누구에게나 보이는 개방된 자리도 마음에 들었다. 다정이 작정한 얼굴로 말한다.
“이 집에서 가장 독한 걸로.”
독해봤자 바카디였다. 그러나 태풍은 ‘음주’보다 ‘가무’를 즐기는 타입이어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양주를 택했다.
테이블이 세팅된 다음 태풍이 천천히 술을 따랐다. 그가 술을 따르는 속도는 다정이 마시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의사만 극한 직업이냐? 간호사도 완전 극한 직업이야~~.”
어느새 술에 취한 다정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받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은 극한 직업인데~ 온 선생은 왜~ 의사를 싫어하는 건데~~.”
기분 좋게 술이 오른 태풍이 대꾸했다.
“같은? 푸하핫! 아니지, 아니야~.”
다정이 검지와 함께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희들은 우릴 완전 무시하거든. 내가 한두 번 당했는지 알아? 너도 그랬지? 가벼운 맘으로 접근했잖아. 또! 그런 식으로 많은 간호사들 울린 거~ 내가 모를 줄 알냐고오~! 계태풍 너 조심해! 병원에 소문 도는 거 삽시간이다~? 사람을 살리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지, 나아쁜 너엄들! 너 말이야, 너! 너! 너!”
다정의 말에 태풍이 나른한 눈으로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확실히.”
조금 가라앉은 태풍의 말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여태까진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다정은 반사적으로 코웃음 쳤다.
“까고 있네. 네가 울린 여자들한테나 찾아가서 그런 느끼한 소리 늘어놔라! 바로 싸대기지! 그래도 너는 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굳이 다른 여자한테 그러고 싶지 않은데…”
다정의 험악한 말버릇은 멈추지 않았다.
“흥! 내가 의사 놈의 말을 믿을 것 같냐~?”
그때였다. 가방 속에서 환히 빛나는 핸드폰 화면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전화다. 아아, 마성후 씨. 나를 술 프게 만든 몹쓸 남자……. 아아…….
“누나.”
태풍의 목소리는 다정의 귓가에 닿기도 전에 부서졌다. 그녀의 멍한 눈동자엔 오직 마성후만이 깃들어 있었다.
한 잔 기울일 때마다 술잔 위로 찰랑거리던 그의 얼굴을 떨쳐내듯 연신 마셔댔다. 그리고 히쭉히쭉 웃으며 가벼운 대화를 이어왔다.
그러기를 벌써 세 시간 째.
모두 그에게 받은 상처로부터 달아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실컷 도망쳐 보았건만, 결과적으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도, 상황도.
그를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것들 나눴다고. 한 수십 년을 사랑한 사람처럼 모질게 상처받은 걸까.
성후와 부연의 야릇한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을 꽉 채운다.
나쁜 놈! 나쁜 놈!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술잔 안으로 툭 떨어지는 순간,
“누나!”
태풍이 거칠게 다정의 손목을 잡아챘다.
술 취한 다정이 아이처럼 울먹댄다.
젖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자, 되레 태풍이 울컥했다.
“마성후 씨랑 헤어졌어요?”
술이 깼는지, 그의 말이 다시금 높아졌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맞든, 아니든! 질질 짤 거 뭐 있어요?”
피곤한 상태에서 너무 달려버린 탓일까. 다정의 정신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냥 저랑 사귀어요.”
“……뭐라고?”
분명 한국언데. 다정은 태풍의 말이 전혀 해석되지 않았다. 그저 눈살만 찌푸려진다. 그리고 쿵!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얼마 후 그녀가 희끄무레하게 눈을 떴을 땐, 꿈과 현실 사이 어느 경계선에 놓여 있는듯했다.
“아… 일어났어요?”
의사 가운이 아닌 샤워 가운을 걸친 태풍의 모습이 보였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있는 그의 행동에 조금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태풍은 산책하듯 무심하게 다정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 가…”
그 순간 그녀의 세상이 다시금 핑그르르 돌았고 이내 완전히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요즘 성후 상태는 어떻습니까?”
답답했던 넥타이를 비틀어 풀며 기태가 말했다.
“성실히 입원 치료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인상의 비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연석이한테 연락은 해봤고요?”
“네. 때때로 소식을 전해 받고 있습니다.”
기태의 비서 운용은 연석의 부친이었다.
“특별한 것은요.”
얼마 전 연석이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아니에요.’
라고 말끝을 흐리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확인된 것은 없기에 운용은 평소처럼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험이 많은 비서는 감추는 데 능숙했다.
“피아노에 대한 건 완전히 놓은 거 같던가요?”
물으면서도 가슴이 아릿해지는 기태다. 오랜 시간 일에 미쳐 아들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이 칼이 되어 목을 겨누었다.
성후가 어려서는, 사랑한 적 없던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이라 외면했고 커서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선화에게 떠맡겼다.
아비로서 해준 거라곤 그저 ‘돈’으로 할 수 지원이 다였다. 그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쉬운 것에 불과한.
그럼에도 아들은 저 홀로 잘 자라주었다.
요즘은 때때로 ‘피아니스트 마성후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할 만큼 말이다.
“괜찮은 집안의 여식을 알아보면 어떨까요?”
가족처럼 오래된 비서의 의견을 물었다. 기태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결혼이라도… 시키겠다는 말씀입니까.”
서재 안, 통창 너머의 새카만 밤을 쳐다보는 기태다. 달빛을 받은 정원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고요해서 좋았던 정원이, 오늘따라 그의 심정만큼이나 황량하게 느껴진다.
“성후가 마음 붙일 곳이 있다면…”
몸을 빙글 돌려 운용을 직시한 기태가 말했다.
“나쁘지 않겠지요, 결혼도.”